군수 부임인사 올렸던 객사 읍성 중심 눈 띄는 곳 위치 사라진 날짜 등 기록 없어
시험날이면 붐볐던 향교 이튿날 '향음주례' 잔치에 봉급 들여 상품 마련하기도

조선은 민국(民國)이 아니라 왕국(王國)이었다. 국민이 아닌 임금이 주권자였다. 임금을 상징하는 객사(客舍)가 고을에서 동헌보다 더 크고 높은 까닭이다. 객사는 한가운데 높은 자리에 임금을 대신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있었다. 조선은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가 지배하는 나라였다. 향교(鄕校)는 요즘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되지만 교육 기능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자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이었다. 여러 의식과 행사로 양반과 일반 백성에 대한 수령의 영향력을 넓히는 문화·행정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다. 객사와 향교는 관아 못지않게 중요한 활동 무대였다. 임금을 모시는 객사는 임금과 그 대리인인 수령의 권위를 내보이는 장소였다. 공자를 모시는 향교는 수령이 지배 이념과 질서를 지역에 널리 인식시키고 확산시키는 장소였다.

◇객사 전패에 부임 인사를 올리고

오횡묵이 함안군수로서 최초로 공식 의례를 치른 데도 객사였다. "관문(官門=관아의 정문) 바깥에 누각이 하나 있다. 객사 문루로 태평루(太平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가마에서 내려 객사로 들어가니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는데 일주문이다. …객사에 드니 대청(大廳)이 셋 있는데 중청(中廳)이 전패(殿牌)를 봉안하는 장소이고 파산관(巴山館) 현판이 걸려 있다."(1889. 4. 21.)

오횡묵은 먼저 전패를 향하여 배례(拜禮)하였다. <함안총쇄록>에는 "교생(校生=향교의 유생)이 자리에 나아가 예절을 거행하였다. 수창(修唱)·행례(行禮)·예필(禮畢)이었다. 정선(旌善)·자인(慈仁)에서 했던 바와 대개 같았다"고 나온다. 오횡묵이 정선현감 시절 적은 <정선총쇄록>을 보면 1887년 윤4월 19일 객사 도원관(桃源館)에서 '연명례(延命禮)를 행하였다.' 연명례는 수령이 고을에 부임하여 치르는 첫 행사다. 전패에 절을 올리고 임금께서 내리신 어명을 삼반관속과 지역 주민들에게 널리 밝히는 의식이었다.

▲ 함안향교 대성전.
▲ 함안향교 대성전.

◇제사 지내는 제물을 살피던 자리

옛날에는 제사가 참으로 많았다.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 하도 많았고 그만큼 하늘이나 조상 또는 귀신에 대고 빌 일도 많았다. 위로는 나라의 임금에서부터 아래는 고을 수령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위하여 지내야 하는 제사가 넘쳐났던 것이다.

먼저 공자에게 바치는 석전제(釋奠大祭)가 있었는데 석채례(釋菜禮)라고도 했다. 농사 잘되게 해달라 비는 사직제(社稷祭)도 있는데 사(社)는 땅의 신이고 직(稷)은 곡식의 신이었다. 이 밖에 풍년을 비는 기곡제(祈穀祭), 마을을 지키는 성황신에게 비는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 역병이 돌지 않도록 원통하게 죽은 귀신에게 비는 여제(려祭)도 있었다.

제사 지내는 장소는 저마다 달랐다. 석전제는 향교 대성전, 사직제·기곡제는 사직단, 성황발고제는 성황사(祠), 여제는 여단(려壇)에서 지냈다. <함안총쇄록>에 나오는 <군지>에 향교는 남쪽 3리, 사직단은 서쪽 1리, 성황사는 남쪽 6리, 여단은 북동쪽 2리에 있었으니 오횡묵은 동서남북을 돌아다니며 제사지내야 했다.

제사에 쓰일 제물을 감봉(監封)하는 자리는 언제나 객사였다. 제물은 풍성하기도 해야 했지만 격식과 제도에 따라 숫자나 크기와 모양까지 알맞게 갖추어야 했다. 제대로 마련이 되었는지 살펴보고 또 손타지 않도록 마감하는 일까지 언제나 수령 차지였다.

◇시나브로 없어진 파산관과 태평루

함안 객사 '파산관'은 읍성 한복판 동서남북으로 통달하는 자리에 있었다. 안팎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자리였고 읍성에 들르면 대개 한 번은 지나가게 되는 위치였다. 고을 수령으로서 백성을 위하여 이렇게 애쓰노라 보여주기에 이보다 더 좋은 데는 없었다.

당시 함안읍성의 중심이었던 파산관 객사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르게 시나브로 사라지고 말았다.

옛날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단초도 거의 없다. 파산관은 현재까지 오횡묵의 <함안총쇄록> 기록이 전부여서 '대청이 셋'이라는 대략적인 형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반면 객사 문루인 태평루는 1929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작성한 '고건축물목록(경상남도)'에 남아 있다. 지번이 '북촌동 1002-5'라 되어 있는데 지금 함성중학교 진입로다. 넓이 '1104평'에 규모가 '정면(間口) 4칸 4푼, 측면(奧行) 2칸 4푼 5리'인데 당시에 이미 "매우 낡고 헐어 무너질 우려가 있고 보전이 어려운 상태"였다.

◇공자 알현은 부임 사흘째에

당시는 공자를 부임 사흘째 되는 날에 찾아뵙도록 되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묘각(卯刻=아침 6시 전후)에 관복을 갖추어 입고 남문을 나가 문묘(文廟)에 갔다."(1889. 4. 23.)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 문묘인데 여기서는 향교를 가리킨다. 삼반관속과 함께였고 고을 백성들이 잔뜩 구경하는 가운데였다.

"주산인 모산(慕山)에서 …가운데 한 줄기가 굽이 뻗어내려 거북등처럼 생긴 머리 위에 성전(聖殿=대성전)이 있다. 용마루는 활처럼 휘었고 공포는 날아갈 듯 아름답다. 동무·서무가 양쪽에 있고 앞에 삼문이 있는데 낮은 담장을 쌓아 터를 잡았다.

명륜당은 담장 아래 가파르게 열 길 정도 내려간 자리에 세워져 있다. 좌우에 전설소(奠設所)·서책고(書冊庫) 등이 있고 앞에는 풍화루(風化樓) 편액이 달린 폐문루(閉門樓)가 있다. 누각 왼쪽에는 민가가 열 집 남짓 있는데 들으니 모두 교속(校屬=향교에 딸린 일꾼들)이다."

명륜당 지나 대성전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관노에게 양쪽을 부축하게 하여 오르노라니 옆구리에 숨이 찼다." 잠깐 쉬었다가 "성전 마당에 들어가니 대성전 편액이 있고 아래에 삼층 석대를 쌓았다." 알성례를 올린 오횡묵은 명륜당 동재에 들러 향교 임원들과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강학과 시험을 치르던 향교

조선시대에는 '수령칠사(守令七事)'가 있었다. 원님이 힘써야 하는 일곱 가지 일이다. 농상성(農桑盛)과 호구증(戶口增) 다음 세 번째가 학교흥(學校興)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시장·군수가 교육장을 겸하는 셈인데 학교흥이 이룩되면 지역사회의 질서와 위계는 절로 가지런해진다. 오횡묵이 봉급을 털어서까지 학문 권장에 적극 나선 이유라 하겠다.

1891년 12월 21일 장소는 향교였다. 대성전이 아니고 재실이었다. 열여덟 면에서 모인 강장(講長)·약장(約長)·직월(直月)·강생(講生)이 300명 남짓이었다. 사람은 많고 날은 짧은데 추위까지 겹쳐 여러 방법으로 서두른 끝에 진시 초각(아침 7시)에 시작한 강학을 신시 말각(저녁 5시)에 마칠 수 있었다.

"아이(童蒙)들은 영리함으로 청년(冠者)들은 난숙함으로 기준을 삼아 새긴 뜻과 알아들은 정도가 훌륭하여 장래 본받을 만한지를 종합하여 1등 조경식(趙敬植) 등 3인, 2등 박영만(朴榮萬) 등 7인, 3등 조성석(趙性錫) 등 105인을 뽑았다. 1등은 백지 두 묶음(束=100장)씩, 그 아래는 백지 한 묶음씩을 상으로 주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종이가 보석이나 화폐만큼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상으로 그치지 않고 잔치까지 치른 적도 있다. 1892년 10월 24일이었는데 모인 사람이 더욱 많았다. 남여를 타고 명륜당으로 가면서 보니 "다박머리에서 백발까지 많은 선비들이 물고기 비늘처럼 길에 가득 깔려 있었다. …사람은 많고 해는 짧아 혼자서는 다할 수 없어서 작년처럼 열여덟 면에서 강장을 나오도록 하여 강생들을 다른 면으로 바꾸어 사정(私情)이 통하지 않도록 하였다."

이렇게 1차로 추려낸 다음 합격한 참방자(參榜者)들을 불러 몸소 강의하고 바로 앞에서 시험을 치렀다. "삼경(三經)을 모두 통달한 안정여(安鼎呂) 등 10명을 1등, 삼경에서 둘을 통달한 조노사(趙老賜) 등 15명을 2등, 사서삼경과 통감(通鑑)·사기(史記)에서 하나를 능통한 이쾌경(李快敬) 등 264명을 3등으로 삼았다."

잔치는 이튿날 향음주례(鄕飮酒禮)에 뒤이어 마련했다. 장소는 마찬가지 향교였다. "댓돌 아래에서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호중(呼中)을 시작하니 합격한 유생 289명이 차례로 올라왔다. 음식을 제공하고 상을 주었다. 1등은 후지(厚紙) 세 묶음, 2등은 두 묶음, 3등은 한 묶음씩이었다. 교문에서 마루까지 보는 사람이 많아서 어깨가 부딪힐 정도였고 부형들은 기뻐서 안색이 움직였다. 고을 양반들에게 낸 점심이 370상 남짓이었다."

비용은 자기 봉급에서 덜어내는 연름(捐름)으로 하였다. 10월 26일 대구감영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합격한 289명에게 나눠준 종이는 324묶음이었고 호중상에 들어간 비용은 343냥 7전이었다. 감영은 이에 오횡묵을 칭찬하고 1등과 2등에게는 역서(曆書)를 한 권씩 내려보냈다.(1892. 11. 18.)

◇한 달 두 차례 객사·향교 들러야 했던 오횡묵

객사와 향교는 특별한 행사만 치르는 공간이 아니었다. 수령이라면 적어도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가야 하는 장소였다. 객사에서는 하례(賀禮)를 했고 향교에서는 알성(謁聖)을 했다. 하례는 임금을 위하여 전패를 향하여 네 번 절을 올리는 예식이고 알성은 공자의 신위에게 뵈옵는 의식이다.

이날에는 점고(點考)도 했다. 점고는 임금이나 공자를 위하는 의식은 아니었다. 수령이 자신의 손발인 삼반관속을 동헌에 모아놓고 출석 여부를 점검하면서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함안총쇄록>을 보면 셋 모두 한 적이 가장 많지만 하나나 둘만 하였거나 셋 모두 하지 않은 적도 적지 않다. 초하루나 보름날인데도 하례·알성·점고 기록이 없는 경우는 함안에 오횡묵이 없는 날이었다. 통제영·진주병영·대구감영·마산창에 출장을 갔거나 다른 고을로 겸관이 되어 조세를 걷으러 갔거나 개인 사정으로 서울 본가나 시골 집에 갔거나 했다.

◇여전한 은행나무 살아남은 대성전

파산관이나 태평루와는 달리 향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횡묵이 찾았던 그 자리에 명륜당과 대성전을 비롯하여 다른 건물까지 제대로 있다. 하지만 <문화유적 분포지도-함안군>(2006)을 보면 "6·25전쟁으로 대성전이 반파되고 명륜당과 동재·서재 등이 완전 소실되고 문서도 완전히 잃었다." 또 <경남문화재대관>(1995)에서는 "대성전이 1880년 중건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이 맞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함안향교 대성전은 오횡묵이 130년 전에 드나들었던 그 대성전과 동일성이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감회에 젖어 둘러보니 기둥부터가 오래 된 기미가 느껴졌는데 1958년에 새로 지은 명륜당과 견주니까 더욱 뚜렷하였다. 앞쪽 가운데 두 기둥 아랫부분은 세월을 못 이기고 썩었는지 해당 길이만큼 새로 들어온 석재가 받치고도 있었다.

▲ 함안향교 대성전 주춧돌.
▲ 함안향교 대성전 주춧돌.

대성전 주춧돌은 옛 모양이 더욱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은 지 60년 남짓 된 명륜당의 주춧돌은 하나같이 둥글게 인공으로 깎은 모양이지만 대성전은 그렇지 않았다.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자연석은 두 개였고 나머지 여덟 개는 원형이 석탑이나 석등이었다. 옆에 나란한 동무·서무에서도 같은 주춧돌이 여럿 눈에 띄었다.

새롭게 떠오르는 종교가 앞선 시기 왕성했던 종교를 대신하여 그 터전에 건물을 세우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종교의 자유 관점이나 숭유억불정책의 결과로 보기보다는 자재가 태부족하던 시기 자연스레 이루어진 재활용으로 보는 편이 합당하다. 불교의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는 유교가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 함안향교에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
▲ 함안향교에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

함안향교는 은행나무가 여럿 들어서 있다. 다들 멋지지만 풍화루 안쪽과 바깥쪽에 있는 두 그루는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다. 바깥쪽 나무는 몇 아름이나 될 정도로 굵고 키도 아주 높이까지 솟았고 안쪽 나무는 굵기는 덜하지만 높이는 전혀 처지지 않는다.

오횡묵도 130년 전에 이 나무를 보았다. <함안총쇄록>에 그 기록이 있다. "은행나무 두 그루가 풍화루의 안팎에 나누어져 있는데 크기가 저마다 수십 아름이었다. 위로 하늘을 찌를 듯하고 가지가 쭉쭉 뻗어나가서 그늘이 매우 짙었다."(1889. 4. 23.)

이어 "행단(杏壇)은 언제나 사람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며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을 공경하는 한시를 읊었는데 마지막이 이렇다. '뿌리와 밑동에서 비롯하여/ 가지와 줄기가 끝없이 뻗어가네/ 알고 아끼는 사람 얼마나 될까?/ 이리저리 거닐며 깊이 경계하노라.' 그러고 보니 뿌리와 밑동은 인간세상에서도 알고 아껴야 하는 것이고 자연생태에서도 알고 아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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