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 어려워 습지보존 최적
자연교육장 활용 손색 없어
사라진 마을 스토리텔링도

◇너무 먼 생태관광지

2018년 밀양 사자평 재약산이 환경부 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되었을 때 이상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경관이야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너무 먼데다 찾아가는 길조차 대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자평은 재약산 정상 수미봉 동남쪽 비탈 해발 700~800m에 너르게 탁 트인 억새평원이다. 삵·담비·하늘다람쥐, 은줄팔랑나비·꼬마잠자리·비단벌레 같은 희귀생물이 살고 습지보호구역이라 억새·진퍼리새·버드나무 등 습지지표식물도 곳곳에 자란다.

어쨌든 관광지라면 손쉽게 찾아갈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조건이 사자평에서는 애초부터 글렀다. 표충사 이르기 전 오른쪽 작전도로가 유일한 자동차 통로인데 그나마 조그만 승용차나 승합차만 다닐 수 있을 뿐이다.

▲ 비가 내리는 가운데 안개에 싸인 사자평 억새 평원. /김훤주 기자
▲ 비가 내리는 가운데 안개에 싸인 사자평 억새 평원. /김훤주 기자

◇알고 보니 '교육'이 초점

이런 의문을 안고 18일 찾았다. 사자평을 담당하는 밀양시청 환경관리과 김병주 씨와 함께 오르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나니 전후 사정이 제대로 짐작되었다. '관광'이 아니고 '교육'이 핵심이었던 것이다.

밀양시청은 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되자 지역 학생과 선생님을 상대로 현장교육과 연수를 진행했다. 아이들에게 지역의 자연을 알려주는 일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 교육 본연의 역할인데도 지식과 진학이 위주다 보니 그동안은 팽개쳐져 있었다.

밀양 아이들이 한 번이라도 사자평을 몸소 밟아보고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꼈느냐 아니냐는 아주 중요하다. 이런 경험과 기억이 있으면 나중에 진학이나 취업으로 다른 도시로 나가도 고장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지만 모르고 나가면 자기 비하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경남에는 신불산이나 천성산을 비롯해 고산습지가 여럿 있다. 사자평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곳도 교육을 위해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밀양시청의 시도는 보전에서 나아가 '현명한 활용'으로 발상을 전환한 좋은 보기라 할 수 있다.

◇초가을의 재약산 사자평

재약산 사자평을 찾은 이날은 비도 내리고 바람도 불었다. 평원에는 자욱하게 안개도 깔렸다. 방수 겉옷을 챙겨 입었지만 추위가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걱정도 되고 거추장스러웠지만 조금 있으려니 날씨에 저절로 적응되었다.

울산 경계까지 평원을 한 바퀴 본 다음 고사리분교 터를 거쳐 층층폭포와 구룡폭포·흑룡폭포가 잇따르는 산길로 들어섰다. 가파르지만 거리가 짧아 하산에 적당한 길이다. 반면 작전도로는 두르는 편이지만 비탈이 덜해 올라갈 때 적당하다.

눈에 담기는 풍경은 멀리나 가까이 모두 멋졌다. 본격 단풍이 들기 직전으로 나뭇잎이 조금씩 누르스름 불그스레해지고 있었다. 사자평이 사철 알맞게 물을 머금어주는 덕분에 골짜기를 흐르는 물줄기는 언제나처럼 넉넉했다.

물줄기는 고이고 흐르면서 단풍이 막 들려고 하는 나무들을 물구나무 시켜놓고 있었다. 자드락 산길은 지루하지 않게 걷는 재미를 더해주었으며 다른 데서는 한 번도 보기 어려운 폭포들이 띄엄띄엄 나타나 눈맛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 흑룡폭포 전경.
▲ 흑룡폭포 전경.

◇작전도로 생채기를 치유하고

사자평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묵은 상처가 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만들어진 군사작전도로가 말미다. 군사용으로 쓰임을 다한 뒤 2000년대 초반까지 '오프로드' 지프차들이 줄지어 누벼댔다.

때문에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지반도 약해져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 태풍 매미에 표나게 파였다. 이어 2006년 태풍 에위니아에는 너비 15~30m, 깊이 5~10m로 두 군데 4km가량이 파였다. 없던 골짜기가 길게 생긴 셈인데 물은 고일 틈도 없이 바로 빠져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2008년 작업을 벌였으나 골짜기를 원래대로 메우는 대신 파인 바닥을 곧게 다듬은 위에 바위를 깔았다. 물이 잘 빠지도록 배수로를 낸 것이다.

이대로 두었으면 사자평은 메마르고 말았다. 습지가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보기 드물게도 잘못을 바로잡는 결정이 내려졌다. 2013~15년 복원은 배수로를 되메우는 등 물기를 더 머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덕분에 사자평은 지하수위도 높아졌고 습지식물도 많아졌다.

◇한때 사람이 살았던 억새평원

사자평은 깊은 산중이지만 마을을 이룬 적도 있었다. 소설가 배성동이 2013년 펴낸 <영남알프스 오디세이>에 실려 있다.

"십 리 간에 집들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재약산 아래 양지바른 땅에 두서너 집 있었고, 주개 대가리에 한두 집, 칡밭 인근에 두 집, 또 함석 막사가 있는 사자평 목장에 두 집 정도였다."

고사리분교는 사람살이의 흔적이다. 흙집을 쓰다가 콘크리트 교실을 지었는데 건물은 사라지고 교적비만 남았다.

'1966년 1월 29일 개교하여 졸업생 36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음.' 1960년대는 정부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화전민을 지역마다 거점을 두고 끌어모으던 시절이다.

1990년대 재약산 주인 표충사가 이들을 나가도록 했다. 사람들은 농사도 지었지만 염소 등을 장만해 등산객들한테 팔기도 했다. '살생하지 말라'는 부처님 가르침과 어긋나는 일이 경내에서라도 없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내보냈다. 민가는 1997년 없어졌고 학교는 그 한 해 전에 문을 닫았다.

고사리분교 자리에 습지지원센터가 들어설 예정이라 한다. 거기에 이런 얘기들이 들어가면 좋겠다. 이 밖에도 사자평은 스토리텔링에 활용될 거리들을 넉넉하게 품고 있다. <영남알프스 오디세이>에 군데군데 나온다.

※생태관광과 습지문화에 대한 인식 증진을 위하여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과 경남도민일보가 함께합니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은 2008년 람사르협약 제10차 당사국총회 경남 개최를 계기로 설립된 경상남도 출연기관입니다. 습지·생태 보전을 위한 학술 연구와 정책 지원, 환경 보전 인식 증진과 교류 활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