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문제로 웅크린 감정
필연처럼 또 만나 고백할까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주요 장면들. /스틸컷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주요 장면들. /스틸컷

<유열의 음악앨범>은 각자의 문제로 오랜 시간 엇갈리고 마주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야기다.

이 사랑은 1994년 10월1일 가수 유열이 <유열의 음악앨범> 라디오 DJ를 처음 진행하던 날, 엄마가 남겨준 제과점에서 문을 열 준비를 하던 미수(김고은)의 가게 안으로 현우(정해인)가 불쑥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10년 세월 동안 이들은 세 번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해피엔드>(1999), <사랑니>(2005), <은교>(2012), <4등>(2016)의 정지우 감독이 1990년대 청춘들을 소환해 오랜만에 웃음기를 쏙 뺀 감성멜로로 돌아왔다.

감독은 "휴대전화가 나오지 않는 멜로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제작 이유를 밝혔지만 영화는 그저 말랑말랑한 그때 그 시절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그 중심에는 평생 용서를 빌어야 하는 현우의 과거가 있다. 선명하게 표현되지는 않지만 현우와 친구들은 친구를 잃었고 그 일로 현우는 소년원을 들락거리게 된다. 이 일로 친구들은 애써 행복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것 같고, 현우 역시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우는 이 사실을 세상에 단 한 사람 미수만은 모르기를 바란다. 때문에 현우는 미수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주춤댄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친언니처럼 의지하는 은자 언니(김국희)와 제과점을 운영하며 대학에 다니는 미수는 졸업과 함께 들이닥친 IMF 금융위기 앞에 휘청댄다. 열심히 공부하고 졸업하면 원하는 곳에 취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미래를 꿈꿨지만 부모 세대조차 처음 겪어보는 갑자기 닥친 고난 앞에 미수 역시 때론 힘들고 때론 괜찮다.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주요 장면들. /스틸컷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주요 장면들. /스틸컷

그런 미수의 일상 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갑자기 사라지는 현우. 미수는 그런 현우가 간절히 보고 싶다가도 '후지기만 한'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아 되레 안도하기도 한다.

상대가 변심하거나 누군가의 이간질, 혹은 오해나 반대로 헤어지는 것이 아닌 각자의 문제 때문에 먼저 실망하고 움츠러드는 남녀의 만남. 감독은 마치 주파수를 맞추려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던 그때 그 시절, '지지 직∼' 거리던 라디오 같은 모습으로 1990년대 불안한 청춘들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미수와 현우가 엇갈리는 사이 미수가 살던 동네는 재개발이 진행된다. 골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반듯하기만 한 아파트가 들어선다. 동네 슈퍼는 편의점으로 바뀐다. 제과점도 문을 닫고 그 자리에 부동산이 들어선다. 시간은 그들의 일상과 상관없이 그저 흐를 뿐이다. 특히 그때는 무엇이든 참으로 빨리 변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시시하게 흘러가는 일상을 정박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아침만 해도 별거 없었는데, 굉장한 날이 된 것 같아."

라디오를 켜고, 탁자를 정리하고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려던 미수의 아침은 현우의 등장으로 잊지 못할 날이 된다.

"방송, 사랑, 그리고 비행기,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출발할 때 에너지가 가장 많이 든다는 겁니다."

무심히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DJ의 들뜬 목소리가 현우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우연과 우연, 그렇게 필연처럼 몇 번의 만남은 그들의 일상을 특별하게 바꾸어 놓는다.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주요 장면들. /스틸컷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주요 장면들. /스틸컷

참 별것 아닌 순간처럼 다가오는 '기적' 앞에 이들은 설레고 들뜬다.

영화는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 청춘의 터널을 통과한 이들을 위한 선물들을 곳곳에 놓아두었다. 듣는 라디오에서 보이는 라디오로 세상이 바뀌는 세월을 그 시대를 풍미했던 대중가요들이 함께한다.

핑클, 루시드 폴, 토이, 신승훈 등의 음악은 곧바로 그 시절을 소환하는 매우 강력한 무기다.

지구 반대편 사람과도 찰나의 순간에 친구가 될 수 있는 요즘을 사는 이들에게 미수와 현우의 만남과 이별이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궁금하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희미하게 비추는 가로등 아래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누군가를 그저 멍하니 기다리거나, 사랑하는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리는 차 뒤로 전력질주밖에 할 수 없던 청춘의 모습을 요즘 친구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우연과 우연에 기댄 만남은 정해인과 김고은의 연기가 설득해 낸다. 서로에게 서서히 스며들면서도 쉽게 한 발 내딛지 못하는 현우와 그런 현우를 잊지 못하면서도 고단한 현재를 살아가는 미수로 분한 이들은 섬세한 감정 연기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현우가 늘 돌아가고 싶어했다는 미수 제과점.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현우와 미수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믿어주었던 은자 언니. 영화는 어느덧 중년을 향해 가열하게 달려가는 그대에게 묻는다. 떠올리기만 해도 힘이 되는 그런 시절이 언제였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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