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태훈 지역스토리텔링연구소장 "축제인가 쇼인가"

진주 유등축제가 유료화 문제로 시끄럽다. 급기야 누군가가 유등 행사장을 돈 안 내고 구경할까봐 2미터 높이의 가림막까지 설치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시원하게 펼쳐진 남강은 누구나 감상할 수 있는 ‘풍경’이었는데, 유등을 품은 남강은 졸지에 입장료를 내야만 구경할 수 있는 ‘쇼’가 돼버렸다.

이 가림막을 따라 걷는 진주시민들의 마음은 대체로 불편한 것 같다. 9월초 유등 축제의 전면 유료화 방침이 발표됐을 때만 해도 의견은 엇비슷하게 갈렸다. 지난 몇년 간 교통 문제로 워낙 고생을 해온 터라 유료화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러나 그 유료화에 가림막까지 포함됐을 줄이야….

유료화에도 스펙트럼이 있다.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료화에서부터 축제 재정 건전화를 위한 유료화, 나아가 수익 극대화를 위한 유료화까지 그 기준에 따라 유료화 정책은 다양한 표정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이번 입장료 1만원에 가림막이라는 유료화는 스펙트럼의 어디 쯤에 해당할까? “돈독이 올랐다”는 비아냥이 적지 않은 걸 보면 수익성 지상주의에 바짝 다가갔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한편으로 이번 논란은 자연스럽게 축제의 본질을 묻는 질문으로 확장되고 있다. 도대체 축제는 왜 하는가? 누구를 위한 축제인가? 축제의 주인은 누구인가?

00.jpg
▲ 진주남강유등축제 장면./경남도민일보DB

축제는 본래 ‘우리’를 위한 것

제사에서 비롯된 축제는 인류 문명과 그 뿌리를 같이 한다. 인류가 8,000년 전 도시를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축제는 시민의 ‘결속’을 다지고 공동체의 핵심 가치를 ‘갱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치였다. 멋 부리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전쟁이나 혹독한 자연환경을 이기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다. 축제를 통해 시민들은 자기가 어디 소속인지를 확인했고, 자기 도시에 대한 자부심을 키웠다. 그래서 도시의 미래를 위해 협동도 하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나가 싸우기도 한 것이다.

옛날 고대 문명의 축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축제는 ‘우리 공동체’의 생존 전략으로 작동하고 있다. 웬만한 조직이나 단체 치고 축제하지 않는 곳이 있던가? 어린이집에서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코딱지만 한 사무실에서 큰 빌딩을 소유한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꼭 축제라는 이름을 내걸지 않더라도 단합대회가 됐든, 체육대회가 됐든, 발표회가 됐든, 아무개 잔치가 됐든 1년에 한두 차례는 일상에서 벗어나 나름의 의식을 치르지 않던가? 그 시간을 통해 ‘우리’를 확인하고, 사기를 드높이고, 공통의 비전을 다짐하지 않던가? 이처럼 축제는 원래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지자체들이 주관하는 축제 대부분에서 ‘우리’를 찾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축제의 주인공은 어느새 ‘손님’이 됐고, ‘우리’는 그들의 만족을 위해 때로는 무시 당해도 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축제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도 뒤집어진지 오래다. 시민 공동체의 결속 따위는 축제의 목적에서 이미 사라졌고, 그 자리를 관광객 숫자와 그들이 쓰고 간 돈의 액수가 차지하게 됐다. 관광객이 많이 찾아와 돈 많이 쓰고 가는 것이 지역사회를 위한 것이니 ‘우리’는 좀 참으라고까지 한다.

01.JPG
제1문인 촉석문에서 진주교 아래 제2문으로 이어지는 인도 위에는 남강을 볼 수 없게 성벽 조형물이 이미 길게 설치돼 있다./단디뉴스

신자유주의와 도시 마케팅

축제를 이처럼 비즈니스로 보는 풍조는 20세기 말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됐다. 시카고대학의 통화주의자들이 주장하고 레이건과 대처 등이 앞장섰던 신자유주의는 일관되게 작은 정부와 자유무역체제를 밀어붙였다. 자본이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국가가 아닌 도시간 경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아이러브뉴욕’이니 ‘아이암스테르담’이니 하는 도시 상표(브랜드)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도시 마케팅을 위해 매력도(어메니티)와 경관 관리 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이 이 흐름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인천을 필두로 로고 이미지를 만드는 도시 아이덴티티(CI, City Identity) 사업이 크게 유행했고, 1995년 6월에 열린 1차 지방선거에서 민선 자치단체장이 등장하면서는 지역 축제가 경쟁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도시 브랜드, 도시 마케팅이란 용어들이 서서히 지자체 보고서를 장악해 나갔고,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반박하기 어려운 당위도 덧붙여졌다.

그러나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격이랄까? 글로벌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세계적인 메트로폴리스들의 전략과 정책을 한국의 일개 도시가 흉내 내고 있는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글로벌 자본 대신 겨우 관광객의 지갑을 겨냥하고 있는 우리 도시들의 마케팅 전략은 과연 성공적인가? 아니 성공할 가능성이라도 있는 것일까?

02.JPG
제4문 망경분수광장. '6.25전쟁 호국영웅존'으로 가림막이 설치돼 있다./단디뉴스

유등축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주최측에 따르면 남강유등축제의 기원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군에게 포위됐을 때는 왜군의 진로를 방해하고 외부와 소통하는 수단으로, 왜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된 이후로는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7만 여명의 군인들과 백성들을 기리는 목적으로 진주 시민들이 등을 강에 띄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전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바로 ‘소망등’일 것이다. 도시 전체 인구에 해당하는 인구 7만이 한꺼번에 몰살 당한 기억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 진주 사람들은 매년 남강에 각자의 소망을 담아 유등을 띄운 것 아니겠는가? 그 기억이 참혹했던 만큼 소망도 절실했을 것이다. 이 의식을 통해 진주 사람들은 하나가 됐을 것이고(결속), 평화를 지키기 위한 다짐을 되새기지(가치 갱신) 않았을까? 이 부분이 바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유등축제의 뿌리이고 진주시가 추구해야 할 도시 정체성 아니겠는가?

사실 소망등 행사는 최근까지도 유등축제의 핵심이었다. 지금은 참여 프로그램의 하나로 부대행사처럼 취급되고 있지만, 원래 진주 거리를 수놓던 유등은 휘황찬란한 디자인 등이 아니라 바로 소망등이었다. 아래는 진주 출신의 하청일 경남도민일보 부장의 회고다.

“진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던 나는 개천예술제가 열리면 학교에서 단체로 구입한 유등을 들고 시가지를 돌았던 기억이 있다. 사각으로 된 유등 틀 가운데에 촛불을 밝혀 시가지를 돌면 위아래로 바람이 통하게 한 등이라 촛불이 잘 꺼졌다. 집 밖으로 나와 구경하던 시민들이 안타까웠던지 집에 있던 성냥을 내놓거나 심지어 구멍가게에서는 팔려고 진열해둔 작은 성냥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 덕분에 학생들은 불 꺼지는 걱정 없이 유등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곤 했다. 그렇게 시가지를 돌고 나면 마지막엔 유등을 남강에 띄워 보내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2015년 9월 8일자 데스크칼럼)

당시 유등축제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진주시민이었다. 거리를 행진하는 이들과 구경하는 이들은 소망을 담은 촛불을 매개로 하나가 됐다. 그 소망을 무사히 남강에 띄워보낼 때 ‘진주다움’은 다시 힘을 얻고 시민들이 다가오는 1년을 살아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올해 풍경은 살벌하기만 하다. 진주 시민을 가림막을 기준으로 돈 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분열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03.JPG
▲ 천수교에서 제7문인 서문으로 가는 길에 설치된 가림막. 2겹으로 돼있어 전혀 보이지 않는다./단디뉴스

축제인가 쇼인가?

사람들은 흔히 함평나비축제와 보령머드축제를 성공적인 지역축제로 언급하곤 한다. 물론 이때 기준도 관광객 숫자와 그들이 쓰고 간 돈의 액수다. 그러나 과연 이들 축제를 제대로 된 축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함평의 나비축제와 보령의 머드축제가 과연 함평군민과 보령시민을 결속시킬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가? 이들 축제가 두 도시공동체의 어떤 핵심 가치를 지속적으로 갱신하고 있는가?

한국에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몇몇 축제는 엄격하게 따지자면 일시적인 테마파크나 담을 치고 입장료를 받는 쇼(전시회)에 가깝다. 신기하고 흥미로운 아이템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호객하는 일종의 컨벤션 비즈니스를 지자체들이 축제라고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쇼라고 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른바 국제대회란 것들도 일종의 쇼비즈니스이고, 한국의 지자체라고 해서 세계적인 쇼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못하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축제와 쇼는 다르다란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 쇼가 축제를 대신할 수는 없다. 도시 공동체를 결속시킬 스토리가 쇼에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멀쩡한 축제를 뜯어고쳐 억지로 쇼로 둔갑시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수백년간 이어져 오던 도시 공동체의 핵심가치가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으로 전락하는 상황이 과연 바람직한지 진주 시민들은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김태훈.jpg
현재 대한민국의 크고 작은 축제를 모두 헤아리면 1만 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처럼 축제가 많아진 배경에는 지방자치제의 정치적인 배경도 무시할 수 없다. 정치인인 자치단체장 입장에서 보면 지역 축제는 세금을 활용해 유권자들에게 인상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합법적으로 얼굴을 알릴 수 있는 매우 요긴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번 남강유등축제는 이 관점에서 봐도 낙제점에 가깝다. 유권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상당수 시민에게 모욕감까지 안겨주는 결과를 낳았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