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황금어장, 마른멸치에 있소이다'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어버린다는 멸치(蔑致), 작고 힘도 없으면서 성질까지 급하다. 그래도 속담에 '멸치도 뼈가 있다' 또는 '멸치도 창자는 있다'라는 말이 있다. 크기는 작지만 큰 생선들이 지닌 배설기관을 다 갖고 있다는 말이다. 속담에서 '창자'라는 말은 성깔, 자존심을 의미한다. 미약한 존재라도 나름대로 개성적 특성이 있는 '멸치'와 동반자가 되어 한길을 걸어온 이가 제2의 황금어장을 준비하고 있다.

"예 14번 중도매인 정홍윤입니다. 지금 통영에서 물건 경매 중입니다. 일 마치고 마산 멸치공장에 도착하려면 오후 3시 정도는 돼야겠습니다. 그때 인터뷰하러 오세요."

그를 인터뷰이로 추천을 받았을 때는 건어물 식품회사 대표이사로 알고 있었는데 '웬 중도매인 그리고 통영?' 소개를 잘못 받은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며 공장으로 향했다. 

마산합포구 진동면 신기리 팔의사창의탑을 지나 고개를 숙인 벼들로 꽉 찬 들녘을 지나자 '특선 대영수산·식품'이란 간판이 나타났다. 건어물 공장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비릿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 1층 현관문을 열자 에어 커튼에서 찬 바람이 쏟아지고 '창조적 사고', '능동적 실천', '철저한 품질관리'란 사훈이 눈에 들어온다. 흰 가운을 입고 머리카락을 모두 덮은 모자를 쓴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공장을 뒤로하고 도착한 2층 사무실, 그는 요즘 보기 어려운 낡은 주판으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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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식품 전경./박민국 기자

"건어물 공장 대영식품 방문도 고맙지만 제 고향 진동에 와 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신규 직원 입사 면접도 있고 인터뷰 시간도 맞추려고 통영에서 좀 밟았습니다."

통영기선권현망수협 14번 중도매인이자 주식회사 대영식품 대표이사 정홍윤(52) 씨는 악수를 하면서도 한 손에는 주판을 들고 있었다. 상업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32년을 그와 함께 한 주판, 정씨는 아직도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마산상고, 빚잔치 그리고 해병대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 서촌이 고향인 그는 삼진중학교를 졸업했다. 3학년 재학 시절 반장을 하며 대학 진학을 위해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꿈꿨던 그에게 아버지의 사업부진은 인생 진로를 수정하는 첫 번째 계기였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아버지가 대한통운에 근무하셔서 그런대로 가정 형편이 괜찮았어요. 중학교 진학하고 아버지가 화물운수업에 손을 대시면서 사기를 당한 것 때문에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워졌지요. 대학보다는 사회에 먼저 진출하라고 상고 진학을 권하셨어요. 2남 3녀 중 차남으로 밑으로 여동생만 3명인 제 처지에서는 선택의 길이 없었죠. 그래서 79년에 마산상고에 입학했죠." 

한번 기울어진 가세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수학여행을 얼마 앞둔 81년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컸다. 얼마 남지 않은 재산으로 '빚잔치'를 벌이고 단칸방에 할머니와 어머니, 셋 여동생까지 총 6식구 함께 살았던 고등학교 시절은 그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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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홍윤 대영식품 대표./박민국 기자

1982년 마산상고를 졸업하던 그에게 돌파구는 없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과 가정형편의 몰락은 그가 제대로 된 미래를 준비할 시간을 빼앗아 갔다. 마산어시장 중도매인 사무실에서 일을 하던 동네 선배가 그를 불렀다. 숙식이 해결되는 부둣가 일을 정 씨에게 넘기고 선배는 군대에 갔다. 졸업 한 달 만에 얻은 직장은 고단했다. 새벽 4시부터 마산, 고성, 거제에서 들어오는 마른멸치 상자를 입고하고 장부에 적었다. 낮에는 근처 소매점에 배달을 하고 밤이면 가게를 정리하고 쪽잠을 청했다. 한 달을 근무하고 그의 손에는 8만 원이 쥐어졌다. 같이 상고를 졸업한 친구들이 은행에 취직해 받던 월급의 절반 정도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자마자 택한 일이 중도매인 서기 일이었죠. 말이 서기이지 잡부죠. 요즘 말로는 멀티플레이어죠. 6개월 정도 일을 하고 나니 미래가 보이질 않아요. 세상도 원망스럽고 방황이 밀려올 때 탈출을 감행했죠. 당시 친구들은 대부분 육군 아니면 방위 근무를 했는데 저는 해병대 단기 하사관을 지원했습니다. 고생도 맛보았는데 이왕이면 해병대 가서 빡세게(열심히) 생활하자. 그렇게 36개월 대한민국 해병대 생활이 시작됐죠." 

오직 멸치만이 내 밥줄이다

1985년 8월 군 복무를 마친 그는 끈기와 집념이 넘치는 청년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첫 직장 문을 다시 두드렸다. 3년 전 근무하며 결근 한번 없던 그를 마산어시장 중도매인은 한눈에 알아보았고 변하지 않는 직급 서기 일을 다시 맡겼다. 그가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버리면서 새로운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튕겼던 주판 솜씨는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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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홍윤 대영식품 대표./박민국 기자

"당시에 중도매인은 옛날 객주나 마찬가지였죠. 주된 업무는 멸치배 선주와 도매인 사이에서 멸치를 매매하고 그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 위탁매매업을 담당했고. 또 부수업무로 위탁자에게 사무업무, 금융업무, 창고업무, 그리고 수송업무까지 맡아서 했어요. 근무하던 곳에는 멸치배 선주 10여 명 정도가 거래하고 있었는데 이분들 사무도 제가 다 보아드렸죠. 80년대 중반만 해도 마산어시장에는 개도 만 원짜리 지폐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때 마산어시장 경기는 말할 것도 없었죠. 마산이 7대 도시일 때 마산어시장은 전국 3대 시장이었죠."

근무하는 중도매인 사무실은 번창을 거듭했다. 가게 규모가 커져 직원을 충원해도 미래에 목표가 없는 종업원들은 오래 붙어 있지 않았다. 지금 마산어시장 근무 형태는 격주 휴일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그 당시 1년에 쉬는 날이라곤 1월 1일, 설날, 정월 대보름, 추석 등 고작 4~5일에 불과했다. 이런 근무 여건 속에서도 정씨는 중도매인 서기 직분을 지켰다. 한 해 두 해 근무가 이어지며 멸치를 보는 눈과 정보도 고스란히 축적됐다.

"아침 멸치 경매를 위해서 하루 전날 저녁에 일일이 멸치배 선주들에게 전화를 돌렸죠.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사무실에 앉아 유선수화기를 들고 한 귀로 남해안 멸치 현황을 파악하는 거죠. 오늘은 거제 칠천도 앞바다에서 조업을 많이 해서 내일 들어간다. 고성에서는 뭐가 어떻다. 통영은 어떻다. 뭐 이렇게 선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 경매에 나온 멸치를 보고 외우는 거죠. 오직 멸치만이 내 밥줄이다. 이 생각만 하면 저절로 외워지더라고요."

멸치만 구별할 줄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 그에게는 유통에 대한 지식도 필요했다. 마산어시장에서 전국으로 팔려나가는 멸치에 대해서도 자료를 쌓아나갔다. 가게 서기로 출발해 멸치 구입부터 유통업무까지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성실한 그를 눈여겨보고 업무를 맡긴 중도매인 사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장님께 배운 게 절대다수죠. 서울에는 잘 생긴 멸치. 배가 볼록한 멸치는 대구로, 붉은 멸치는 광주로 등 지역 특성을 전수해 주셨죠. 물론 사장님께는 10년 후에 독립한다고 말씀을 드렸죠. 85년 제대하자마자 다시 들어가서 딱 10년 되는 95년 독립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막하데요. 상도의 때문에 전 사장님이 계시는 마산어시장에서 가게를 열 수는 없고…. 그래서 선택한 곳이 통영입니다."

1995년~2014년 하루 왕복 130Km

통영 기선권현망수협 중도매인 14번 대영상회. 마산상고를 졸업한 지 13년 되던 해였다. 시작은 변변치 않았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어음. 그는 적게 벌어도 현금을 고수했고 자신의 신용을 사업의 첫 번째로 여겼다. 넉넉하지 못한 자본금으로 시작했지만 부채 없이 사업을 하겠다는 결심은 늘 그를 부지런하게 만들어 나갔다. 멸치만을 바라보며 작은 거래에도 집념과 끈기를 다하는 그에게 행복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부터 마른멸치 위탁시장 판세가 마산에서 통영으로 옮겨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수년 전 마산어시장에 근무하던 시절 거래하던 전라도 대형 유통업자를 통영에서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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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홍윤 대영식품 대표./박민국 기자

"통영에 중도매인 사업을 시작하고 주머니 사정에 맞게 가계를 꾸려 나갔죠. 무리하지 않고 품질 좋은 멸치를 확보하는데 우선순위를 두었죠. 식탁의 감초 역할을 하는 멸치도 자체상표가 생기고 소비자 선호가 분명해지면서 좋은 멸치를 어떻게 선별하고 확보하느냐가 사업의 관건이 되었죠. 때마침 유통업자도 만나고요. 고등학교 시절 불행이 한꺼번에 왔는데 행복은 천천히 오더라고요."

정 씨 혼자의 힘으로 사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마산합포구 상남동에 70평 규모의 사무실과 작업장을 마련했다. 소비자 패턴에 맞추어 건어물 소포장 전문업체 대영상회를 개업한 것이다. 사세는 확장하였으나 아직 마산어시장과 통영시장 중도매인 경영기법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장인 정 씨와 경리가 번갈아가며 포장을 하고 배송을 하는 형태로 세상의 문을 두드리기에는 의욕만이 앞서 나가고 있었다.

"농협 하나로마트에 멸치를 공급하던 유통업자가 이해타산이 맞지 않아 손을 뗐을 때 연락이 왔어요. '한 달 안에 새로운 상표로 납품이 가능하냐?'라고. 기회가 온 거죠. 멸치 품질에 자신이 있었고 제가 중도매인이라 중간 유통이 없어서 가격 경쟁력이 있었죠. 그리고 이때부터 규모의 경제를 생각했습니다. 멸치를 넘어 건어물 종합 식품 공장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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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영식품 공장 작업 모습./박민국 기자

70평 규모의 가내수공업으로 출발한 지 13년 만에 2011년 그의 고향땅 진동에 대지 1300평에 냉동·냉장 창고와 1층 가공장, 2층 사무실을 갖추고 직원 22명이 함께 꾸려가는 공장을 준공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들과 '빚잔치'를 한지 딱 30년 되던 해였다. 이듬해엔 마른멸치 도매·중개를 전담하는 대영수산과 건어물 소포장 전문회사인 대영식품으로 상호를 변경하였고 2013년에는 주식회사 대영식품으로 법인등기를 마쳤다. 또한 그가 배우고 쌓아온 건어물의 안목과 신용을 바탕으로 인터넷 쇼핑몰은 전 세계 네티즌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그는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마산상고 졸업할 때 은행에 입사했던 동기들이 하나 둘 퇴직한다는 연락이 와요. 멸치가 아니었으면 저도 퇴직했겠죠. 이제 새로움 꿈이 있습니다. 제가 중도매인에게 배워 사장이 되었듯이 우리 공장에서도 많은 사장이 나오길 바라는 것입니다.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면 거기가 바로 황금어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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