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 넘나든 정체성과 문학'카프' 제명된 후 만난 이원수 독서회 활동으로 함께 복역농민 토지소유 부르짖던 그 정치 권력 싸움서 밀려 몰락

호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양우정(1907∼1975)만큼 흥미로운 인물도 드물다. '좌'와 '우'를 넘나드는 이념의 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최고 권력을 구가하던 시절과 초라했던 말년의 삶을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 좋은 시절에 호사가가 되어 양우정을 논하기에는 꺼림칙하다. 역사 속에 자리잡은 그의 위치가 엄중할 뿐 아니라, 그가 시도했던 역사의 변화 또한 엄정한 평가가 뒤따랴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반일운동을 했던 '카프 시인'이었으며 제 1공화국 때는 의정 질서를 파괴한 '자유당 정치인'이었던 양우정. 그의 행적을 계속 더듬어 본다.

이범석, 안호상, 진헌석 제씨와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양우정 시인)
◇ 함안에서 이원수(1911∼1981)와의 인연


함안 출신 양우정이 1930년대, 당시 함안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만났거나, 어떻게든 관계를 유지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1930년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한 이원수는 이듬해 함안 금융조합에 취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1935년 '함안 독서회' 사건에 연루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다. 서범석 교수의 <우정 양우정의 시문학(1999)>에 나오는 연보를 보면, 양우정은 1936년 무렵에 '경남문학청년동맹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복역'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원수의 '함안 독서회 사건'과 같은 사건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 박태일(경남대) 교수는 이원수를 논하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흔히 이원수의 삶과 문학을 말할 경우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함안 금융조합에서 일할 때 독서회로 말미암아 겪었던 투옥과 1년에 걸친 감금 경험을 크게 드높인다. 그러나 '그와 함께 잡혔던 양우정'의 문학활동과 견주어 보면, 이원수의 소극성은 금방 드러난다."< 경남·부산 지역문학연구1(2004)>당시 양우정과 이원수의 정확한 행적을 확인할 수 없지만, 두 인물은 함께 '공부' 또는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양우정이 1907년생이었고, 이원수는 1911년생이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생긴다.

양우정 생가 터.
◇ 양우정의 카프 제명


양우정은 1931년 '카프 중앙위'에 의해 제명된다. 당시 카프 중앙위 명의로 발표된 여러 문건을 보면 카프의 기관지였던 <군기> 편집장을 맡고 있던 양우정(당시는 양창준)에 대해 "반동계급의 의도를 원조하고 그후 자기 분파만의 원고로 암암리에 반동적 편집을 진행(카프 비평 자료총서6)" 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 1931년 <조선일보>에 전재된 카프 중앙위의 성명에는 "카프 중앙위 서기국은 중앙위원 전원 합의하에서 이적효, 양창준(양우정), 염홍섭, 민병휘 등 4인의 반카프적 반혁명적 분파적 파괴행동의 음모와 <군기> 탈취 책동에 대해 동인 등을 우리 카프와 전 예술 전선에서 방축함을 결정하는 동시에…"라고 명시되어 있다.

양우정이 함안에서 이원수와 함께 '독서회' 활동을 했을 때는 이미 카프에서 제명된 상태였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또 이때는 '카프'도 해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카프'라는 조직에서 제명된 양우정과 갓 스물을 넘긴 이원수는 어떤 '공부'와 '활동'을 했던 것일까?

◇ 작품의 변화

국회의원들을 핍박해서 '발췌개헌'을 통과시킨 부산정치파동의 최선봉에 섰던 양우정은 1953년 간첩혐의로 숙청되었다. 이때 함께 숙청된 이들은 이범석(초대 국무총리)을 위시한 조선민족청년단(족청) 계열이었다.

양우정의 5촌 조카 양희길 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정국은'이라는 양반을 동양통신 편집국장으로 임명했는데, 정국은 씨의 간첩혐의가 드러나면서 '양우정'도 그 사건에 휘말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이기붕 세력의 견제와 음모도 양우정의 몰락을 부추겼다.

양우정은 이후 칩거생활을 하게 되는데, 1959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때 쓴 시편들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었고 서범석 교수가 <우정 양우정의 시문학>에서 소개하고 있다.

1960년에 쓴 '낙동강'이라는 시는 "…가난한 친구들 모여앉아/이 강을 가리켜 권력이라 하였다/어떤 사람은 핏줄이라 하였다//슬픔도 기쁨도 이 강물에 띄웠다/사랑도 미움도 이 강물에 띄우리…"라고 흐르고 있다.

그런데 1930년에 발표한 '낙동강'은 이렇다. "…칠백리 벌판은 넓기도 하다/이 들판 임자가 누구라드냐/하늘이 열리고 땅이 생길때/이 들판 저절로 생겼든 게지…"

농민의 토지 소유를 부르짖는 패기 넘치는 모습과,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쓸쓸한 노인의 모습은 쉽게 겹쳐지지 않는 게 사실이다.

양우정의 호는 우정(雨庭)이다. '우정 양창준'은 1949년 이름을 양우정(梁又正)으로 개명한다. 한 인물의 정체성 변화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단초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양우정의 생가는 한국전쟁 당시 불바다가 되다시피 한 함안군 함안면에 있고, 그의 묘소는 한국 전쟁 당시 포탄이 비오듯 쏟아졌던 치열한 격전지 함안군 여항면에 있다. 이렇듯 역사는 한 개인 옆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무엇인데, 양우정은 과연 어떠한 역사적 평가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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