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몰랐던 경남문학지대(4)우정(雨庭) 양우정
반일학생사건 연루로 퇴학 … 일본서 귀국 후 카프 중앙위원친일잡지 관여 후 '이승만 오른팔', 간첩혐의로 쓸쓸한 말년

양우정 묘비.
경남에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던 날이었다. 장대비는 장대비대로 보슬비는 보슬비대로 번갈아가며 나름의 운치를 자아내는 그런 날이었다. 함안군 여항면 봉수산에 있다는 우정(雨庭) 양우정(梁又正·1907∼1975)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양우정의 5촌 조카 양희길(함안면·67) 씨의 설명을 듣고 길을 톺아가기 시작했지만, 어려운 길이었다. 물기 머금은 풀 때문에 옷은 다 젖었고, 여러 갈래로 나 있는 산길 때문에 양의길 씨한테 수차례 전화를 걸어야 했다.

마침내 찾은 양우정의 묘. '우정양우정선생지묘'라 적힌 묘비는 빗물이 파고들 정도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그 뒤로 잡풀 무성한 무덤이 있었다. 이 묘소가 생기던 1975년 당시에는 군수와 경찰서장을 비롯해 지역 유지들은 물론이고, 중앙 정계에서 활동했던 거물 정치인들이 찾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양우정은 함안군에 지역구를 둔 2대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이다.

문학인으로도, 정치인으로도 잊혀져 가는 이름 양우정. 그는 과연 누구인가?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중앙위원, 양우정

함안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함안예총 이상규 회장은 "솔직히 말해 양우정이 우리 지역의 국회의원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도, 문학판에서 활동한 것은 잘 몰랐다"고 털어 놓았다.

양우정은 1907년 함안면 북촌리 출생으로 본명은 양창준이다. 1918년께 함안보통학교(현 함안초등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로 유학하게 되는데, 4학년 때에 반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퇴학 당한다.

일본행을 선택한 양우정은 와세다대 전문학부 경영학과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귀국한다. 귀국 후에는 카프 중앙위원이 되었고, 팔봉(김기진)과 회월(박영희)이 사회부장과 문예부장을 맡고 있던 <중외일보>에 수십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이 때가 1928년, 그의 나이 22살 때였다.

당시에 발표했던 작품은 민요풍의 시가 대부분이고, 가난한 농촌 실상을 현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면서기(1928.8.3)'라는 시다. "우리아들 면서기라/월급받아 일백쉰냥/쉰냥을랑 쌀값주고/스물닷냥 면장주고/주재소에 순사부장/술먹자고 찾아오고/…(중략)…면서기질 삼년만에/칠백쉰냥 빚을 졌네/논밭사긴 고사하고/관리대접에 집팔었네"

양우정이 카프 개성지부 기관지 <군기>에서 주간을 맡고 있던 1931년은 '카프 1차 검거'가 이루어진 해다. 이 해 양우정은 '국내공작위원회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4년간 복역하게 된다. 출옥 후 1936년 한 차례 더 체포되고, 1940년대 말에는 친일잡지 <녹기>에 관여하게 된다.

친일잡지 <녹기>에의 관여는 양우정의 '대 변신(?)'을 예고하고 있다.

◇이승만의 오른팔 양우정

해방 후 양우정의 행적은 '반공극우'로 나타난다. 1945년 반공신문인 <대동신문> 주필을 시작으로 1946년 3월엔 <현대일보>, 이어서 같은 해에 <평화일보>를 창간한다. 그러면서 양우정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반탁투쟁'의 전면에 나선다.

이 때 그가 남긴 저술로는 '이승만대통령 독립노선의 승리(1948)'·'이대통령 투쟁사(1949)'·'이대통령 건국정치이념(1949)' 등이 있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애를 썼거나, 아니면 이승만에 대한 충정이 남달랐음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양우정은 1949년에 이름을 아예 '양우정(又正)'으로 개명한다.

양우정은 1950년 5월 제2대 민의원(함안·무소속)에 당선된다. 자유당 결성에 공헌해 정무국장이 되었고 일약 자유당의 실세로 떠오른다. 이후 부산정치파동(1952)의 최선봉에서 활동하면서 명실공히 이승만의 오른팔이 된다.

막강한 금력과 권력을 행사했던 '자유당의 2인자' 양우정은 1953년 소위 '정국은 사건'이라 불리는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만다.

양우정의 5촌 조카 양희길 씨는 "(양우정이)이승만의 양아들이었다는 말이 파다했다. 그랬는데 1953년에 정보부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우리 집안(종가)을 샅샅이 뒤지면서 조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양우정은 공산 간첩혐의로 징역 7년 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한다. 이듬해에 이승만의 총애가 두터웠기 때문일까,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게 되기는 하지만, 이후 재기하지 못하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1965년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며, 1975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대략적인 양우정의 연보를 일별했다. '양우정 (하)' 편에서는 좌익과 우익을 넘나든 양우정 문학의 변천 과정과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의 위치, 그리고 1930년대 함안에서 아동문학가 이원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 한 자락을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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