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이 여운 남기던 서늘함을 끝내 밀어버 리고 완연한 봄이 왔다. 생명이 다투듯 깨어나 고,황량했던 대지에는 초록빛이 번졌다.텅 빈 나뭇가지에 소복이 쌓였던 벚꽃이 어느새 지고 잎이 파릇파릇하게 돋았다.아름답다 못해 눈이 부신 4월. 생명이 샘 솟 는 달에 무수한 죽음을 떠올린다. 그저 찬란하 게 빛나는 줄만 알았지 이토록 아픈 계절인 줄 몰랐다.붉은 동백꽃이 땅으로 떨어지듯 스러져간 영 혼을. 시린 바다에 묻혀 피워 보지도 못하고 꺾 여 버린 꽃들을. 무참하게 피 흘리며 민주주의 싹을 틔운 넋들을.설렘과 희망만 품을 것 같은 나
간간이 오가던 대화가 잦아들었다. 빈 소주잔은 어느새 침묵으로 채워졌다. 서로 시선은 엇갈리고 애꿎은 기침만 뱉을 뿐이다. "이제 이야기 소재가 다 떨어졌나. 허허."어색한 분위기가 멋쩍어 누군가 한마디 던져보지만 정적 속에 허무하게 바스러진다. 각자 상념에 빠져 오직 깊은 숨소리만이 적막에 균열을 낸다.같은 세월을 먹고 자라 중년이 된 이들은 주어진 삶의 무게를 이고 지느라 마음마저 메말라 버렸나. 속에 눌러 담은 말이 너무 깊이 박혀서 술 한잔에도 툭 털어놓지 못하나. 안주로 나온 국물을 묵묵히 떠먹으면서 하고픈 말도 습관처럼
몸을 웅크리게 하는 찬 기운을 밀어내고 모처럼 햇살이 잔잔히 비친 골목 어귀에서 잠시 쉼을 청한다. 양지바른 곳에 앉은 할머니 옆에 녀석이 조용히 궁둥이를 붙인다. 지나는 차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다가도 세월에 그을린 할머니 얼굴을 틈틈이 핥는다."강아지가 애교 많네요." 낯선 이의 목소리에 녀석의 눈빛이 반짝인다. "아들이 유기견보호센터에서 데리고 왔어."철장 안에서 두 다리를 들고 서 있는 녀석을 가리키며 안락사를 앞두고 있다는 직원 말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아들. 종일 TV만 봤던 할머니는 녀석이 온 뒤로 그나마 말 한마디
병원 주사실 밖을 한참 서성이던 청년이 보호자를 찾는 소리에 쫓기듯 안으로 들어간다. 링거를 떼고 일어나는 할머니를 부축하며 옷가지 등을 살뜰히 챙긴다. 화장실로 곧장 걸음을 옮긴 할머니가 속을 게우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안절부절못한 청년이 간호사를 다급히 찾는다. 잠시 후 기력이 다해 나온 할머니를 청년은 그저 지그시 바라본다. 괜찮으냐는 말로 차마 다할 수 없는 걱정과 안쓰러움이 녹아 있다.그들에게 시선이 머물고 있으니 간호사가 어느새 다가와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살핀다. "사람 보는 눈이 비슷하네요. 손자가 참 애틋하죠?" 대
장바구니를 든 앙상한 팔이 마른 나뭇잎처럼 떨린다. 잔뜩 구부러진 허리로 시선은 한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보다 못해 장바구니를 잡아든 순간 예상치 못한 무게감이 짓누른다. 할머니는 괜찮다며 억지로 가라고 손짓한다.장바구니 안을 살짝 들여다보니 무, 당근, 감자, 호박 등 음식재료가 한가득이다."날씨도 궂은데 뭐한다고 이리 사왔습니까?"지팡이에 몸을 지탱하며 겨우 걸음을 떼듯 입을 뗀다."며느리가 일하느라."한평생 자식을 위해 희생했을 노모는 여전히 따뜻한 밥 한 끼 해먹이고 싶은가 보다. 노쇠한 몸을 이끌고 장을 봐오면서도 누군가에
추석을 앞두고 김해서부경찰서 경찰발전협의회와 장유1·2·3동 행정복지센터가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등 60명에게 육류세트, 건강 음료 등 위문품을 전달했다. 김균 김해서부경찰서장은 "안전한 추석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문정민 기자
작열하는 태양에 거친 숨을 고른다. 낡고 해진 러닝셔츠가 땀으로 흥건하다. 달궈진 도로에서 손수레를 끌다 말고 나무 아래 털썩 주저앉는다.편의점에 들르면서 마주친 노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넋 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노인에게 시원한 음료수를 건넨다. 말없이 받아든 노인이 한 번에 들이켠다. 사레가 걸렸는지 기침을 하며 뱉어낸다. 괜찮으냐는 말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인다.손수레를 가득 채운 폐지를 보고 있으니 굳게 다문 입을 연다. "그래 봤자 5000원밖에 안돼." 노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땡볕은 야속하리만큼 강렬하고
가방을 샅샅이 뒤져도 지갑이 보이지 않는다. 이틀 전만 해도 카드를 꺼내 사용했는데, 하루 사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곰곰이 전날 회식 자리를 되짚어본다. 미심쩍은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올라가던 기억이 대리기사에서 멈춘다. 잔뜩 불콰해진 얼굴로 잠이 들었던 순간을 떠올린다.'설마' 고개를 젓다가도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다. '아닐 거야' 다시 설핏한 기억을 더듬는다. 취기 오른 걸음으로 집에 들어와서 휴대전화를 찾는다고 가방을 쏟아냈었지. 혹시 몰라 침대 밑을 살펴본다. 아니나 다를까, 지갑이 눈에 들어온다. 새삼 부끄러움이 밀려
주말 저녁 일행이 기다리는 고깃집으로 향했다. 입구에 다다를 때쯤 한 청년이 앞을 막아섰다. 청년은 가게 안을 들여다보며 쭈뼛거렸다. 비스듬히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청년은 결심한 듯 먼저 가게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가 일행을 찾는 사이, 주인과 짧은 대화를 나눈 청년이 멋쩍게 돌아섰다.주인은 미안한 표정을 짓다 말고 가게를 나선 청년을 황급히 불렀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청년이 테이블에 앉았다. 잠시 후 그릇을 가득 채운 밀면이 나왔다. 허겁지겁 먹는 청년을 유심히 보던 주인이 계란과 육수를 더 건넸다. 청년은 사양하며 말했다.
"정민아, 내일까지만 하고 가게 문 닫는다."전화기 너머 사장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 퇴근길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틀었다. 골목 모퉁이를 밝게 비춘 가게에 들어서자 사장님 내외가 맞이했다. 여느 때처럼 반기는 표정 뒤에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묻어났다.도심 개발은 13년간 이곳을 지켜온 가게를 끝내 밀어냈다. 사장님은 맥주잔을 나르면서 가게를 일컬어 '해우소' 같은 곳이라고 했다. 근심, 걱정을 버리고 마음을 쉬어가는 공간. 오랜 단골을 자처한 내게도 그랬다.고민과 불안에 짓눌린 마음을 안고 들어왔다가 결국
반려견 간식으로 사다 둔 소시지가 없어졌다. 식탁 위 빵을 싸들고 나가는 엄마가 수상쩍다. 빈손으로 들어오면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의식한 듯 입을 뗀다."이웃집 지붕에 새끼 고양이 4마리가 삐쩍 말라서…." 언젠가 엄마는 길고양이를 보며 요물이라서 싫다고 했다. 개는 키워도 고양이는 못 키운다고 단호하게 말했다.바람이 몹시 매섭던 12월 어느 날, 한 녀석이 지붕 위에 미동 없이 누워 있었다. 엄마는 창가에 서서 시린 겨울보다 더 싸늘하게 식은 녀석을 말없이 내다봤다. 창틀에 끼운 스마트폰에서 불경이 흘러나왔다. 다음 날 엄마는
부쩍 옅어진 햇살을 등에 지고 선선한 바람결 따라 단풍 빛이 흩날린다. 도심 속 가로수 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잎이 힘에 겨운 듯 떨어진다. 길바닥을 뒹굴다가 오가는 자동차 바퀴에 치이고 무심한 발길에 짓이겨진다.길에 뿌려진 낙엽을 쓸어내는 비질 소리가 거리를 채운다. 차도와 보도 사이 비집고 쌓인 계절의 흔적을 무수히 긁어 모은다. 행여 배수로를 막거나 자칫 행인이 밟고 미끄러질까 부지런히 쓸어낸다.어스름한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도시의 풍경을 닦는다. 만추의 정취는 산과 들판에 오롯이 맡기고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가을만 남겨놓은
"아가씨, 미안하지만 잠깐 이거 좀 봐줄 수 있습니까."집을 갓 나선 발길을 보도턱에 걸터앉은 할머니가 잡았다. 할머니는 망설이면서 하얀 봉투를 건넸다. 봉투 속 종이를 꺼내니 LH 저소득층 매입임대주택 안내문이다. 그제야 글을 읽지 못한다고 수줍게 고백했다.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였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기초연금과 노인 일자리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고. 먼저 세상 떠난 할아버지와 라면 하나 사먹을 엄두도 못 냈다고 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고 나서야 먹고 싶은 고기반찬 정도는 사먹을 수 있다고.할머니는 덧
창원시 진해구 이동 도로에 가로수가 뿌리채 뽑혀 쓰러져 있다./문정민 기자
집에 그냥 가기 아쉬웠을까. 괜스레 친구를 불러내 동네 한바퀴 돈다. 여름밤 정취에 시원한 맥주 한잔 떠올린다. 마침 어느 가게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눈에 들어온다.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포크를 쥔다. 머리를 겨우 가누며 치킨 한 조각 뜯는다. 부산스러운 분위기에도 입구 쪽을 향해 시선을 놓지 않는다. 매장 밖에 전동휠체어 한 대 덩그러니 있다. 계단 형태 문턱을 손님들이 무심히 넘나든다. 마른 목을 축이고 출출한 배를 채우는 데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누군가를 갑작스레 만나 가벼운 산책을 하고 술 한잔 기울일 곳 찾는 게 자연스러
안이 훤히 보이는 마당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내 문다. 표정을 감춘 뒷모습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끼니때면 밥 짓는 냄새 솔솔 넘어가던 담 위로 허기진 길고양이가 방황한다. 웃음 넘쳤던 놀이터, 수다 가득했던 미용실, 묵은 때를 벗겼던 목욕탕은 황량하기만 하다.재발견보다 재개발이 앞선 이곳은 그가 80년간 이어온 삶의 공간마저 지워버릴 테다. 종일 곰국을 끓이던 아궁이도 직접 심은 모과나무도 심다 만 텃밭의 상추도 곧 사라져버린다.희뿌연 담배 연기가 눈부신 봄 햇살 아래 흩어진다. 넉넉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살아낸 기억들이 연
청년상생포럼(대표 이재환)은 지난달 28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과일 150상자(150만 원 상당)를 창원시 성산구청에 전달했다. 청년상생포럼은 창립 첫해인 2020년부터 반찬세트와 곰탕 기탁 등 3년째 이웃돕기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 한 줌에도 위태롭게 나부낀다. 메마른 태양에 고왔던 빛이 바랬다. 텅 빈 하늘 아래 앙상한 나뭇가지를 겨우 붙들었다.종일 소란스럽던 새들은 떠나고, 화려했던 꽃들도 모두 져버렸다. 오직 길어진 그림자만 남았다.강한 비바람을 버텼던 삶에 익숙해져 버렸나, 초록이 무성했던 지난날 못다 한 후회와 미련이 남았나. 떠나야 하는 걸 알면서도 애써 그 시간을 놓지 못하는 듯하다.성치 않은 마음에 가까스로 매달린 집착과 연민, 애증을 놓지 못하는 것처럼.숱한 감정을 정리하고 작별을 고하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마지막
한창 열기를 내뿜던 컴퓨터가 차갑게 식었다. 타닥타닥 자판 두드리는 소리는 멈췄고 질세라 분주했던 마우스도 침묵한다. 주인 없는 빈자리에는 갈 곳 잃은 공기만 맴돈다. 치열하게 써 내려간 삶의 기록이 한순간에 지워졌다. 묵묵히 이어가던 열정도 무수히 반복한 고민도 사방으로 흩어졌다.행여 부담될까 삼켰던 관심이나 참견 따윈 메말라 버렸다. 어쭙잖은 위로나 걱정마저 결핍됐다. 아쉬움은 어느새 옅어지고 추억도 슬며시 기억 저편으로 물러난다. 오늘만 그저 살아간다.빈자리는 늘 그렇듯 또 다른 주인으로 채워질 테다. 비움을 채움으로 대신할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고개를 든다. 턱까지 찬 숨을 한 번에 몰아쉰다. 거칠게 새어나온 입김에 마스크가 들썩인다. 뱉었던 숨을 한껏 들이마시며 마스크를 고쳐 쓴다. 흐트러진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이내 고개를 떨구고 굽은 허리를 더 깊숙이 숙인다.한 발짝, 한 발짝 더딘 걸음을 옮긴다. 바퀴만 겨우 내민 손수레가 힘겹게 밀린다. 켜켜이 쌓은 폐지 위에 제법 뜨거운 햇살이 쏟아진다. 앙상한 팔과 다리가 미세하게 떨린다.어제와 다르지 않은 일상은 그저 무겁기만 하다. 고단하지만 버틸 수밖에 없다. 현실이 버거울수록 오늘을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