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 다케히코 지음
누구나 불안·후회 느끼지만 어떤 삶이든 '가치'있을 것…환상·긍정보다 현실적 위로

걷는다는 것. 이 단조롭고 아무렇지 않은 행위를 잠시 생각해 보자.

먼저 오른쪽 다리를 뻗어 내디디며 왼팔을 앞으로 살짝 흔들어 균형을 잡는다. 오른쪽 다리가 땅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왼쪽 다리를 뻗고 동시에 팔도 교차한다.

마냥 단순했던 걸음걸이가 복잡해진다. 한발 한 발 정성스럽게 내딛지 않으면 휘청대거나 넘어질 수 있다.

산다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바로 앞의 한 발만 제대로 내디디며 그저 걸어가는 것.

물론 걷는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또 다른 나와 마주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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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건 아니겠지?>.

너무나 인간적인 제목이다.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단정 지을 수 없어 '설마'라는 수식어로 슬쩍 위로를 원하는 메시지를 얹어 놓았다.

이 자신 없고도 긍정적인 제목에 끌려 덥석 책을 펼쳤다.

만화가 시마 다케히코는 일본 시코쿠의 유명한 순례길 헨로를 걷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써내려갔다.

일본 시코쿠 섬에는 진언종의 큰스님 구가이가 수행을 위해 방문했던 여든여덟 사찰을 도는 길 '헨로'가 있다.

장장 1200㎞, 완주만 한 달 남짓. 구가이 사후 여든여덟 사찰을 도보로 돌아 참배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통이 생겼고, 각각 사연을 가진 이들이 헨로를 찾아 걷고 또 걷는다.

헨로를 걷는 주인공 '안 팔리는 에로 만화를 그리는 30대 남자'는 어느 날 담당 편집자에게 "선생 작품은 그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회사도, 독자도, 선생도"라는 말을 듣고 실의에 빠진다.

주변 동료는 승승장구하는 반면 자신은 점점 나락으로 빠져드는 일상 속 어느 날, 사람을 상해하고 시코쿠 헨로로 숨어들어 간 한 화가가 그곳에서 신분을 드러내며 작품 활동을 하던 중 불심검문에 걸려 달아났다는 뉴스를 보며 주인공은 의아해한다.

'헨로라는 곳이 어떤 곳이기에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호기심과 비루한 현실에 이 만화가의 발길은 시코쿠로 향한다.

걷는 동안 이 만화가는 건성건성 하루를 보내다 온 백수, 취업 준비 중인 여대생, 특전사로 살다 가업을 물려받기 전 마음을 정리하려고 찾아온 남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도 만난다.

"아니! 아니! 난 너희 인생 따위 하나도 부럽지 않아! 대학생 알바비랑 비슷한 연수입이라도 아무렇지도 않아! 나에겐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있어! 만화가 있어!"라고 했다가 "사실은 만화를 그만두고 싶어 미치겠지?"라고 고민하는 자아와 마주하기도 한다.

이런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걷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고행의 끝에 집으로 돌아간들 지금의 마음을 유지한 채 얼마나 지낼 수 있을까.

만화는 '걷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환상 대신 모든 것이 회의적이고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여든여덟 사찰에서 벗어난 외곽 사찰에 들러 한 스님과 마주한 주인공은 묻는다.

"세상에는 어째서 '꿈을 가져라'라거나 '꿈을 포기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꿈을 잘 포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나 책은 없는 걸까요?" 스님이 대답한다. "말하지 않기 때문이야.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남에게 말하는 사람은 드문 법이지." 그래서 헨로를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가는 많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고 한다. 스님의 말이 이어진다. "지금 이대로 이 길을 계속 가도 되는지, 불안한 게 아닌가? 자네가 조금 편해질 수 있는 말을 해주지"라며 "자네는 어떤 인생을 산다 해도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어!"

또 다른 스님은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선생만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소이다. 커다란 일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어요. 가족을 사랑하고 태어난 고장의 활동에 공헌하고 그것을 발견한다면 분명히 충실한 인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1·2권. 각 8500원. 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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