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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리라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20) 함안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4년 11월 27일 목요일

◇함안천·석교천·광려천

함안에는 물줄기가 많이 있다. 북쪽에 낙동강이 있고 서북쪽으로는 남강이 흐른다. 함안 물줄기들은 모두 북향해서 이런 남강이랑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옛적 아라가야였던 함안에서 그런 물줄기의 중심이 함안천이다. 함안천은 검암천·신음천·운곡천·옥열천 등을 쓸어담으면서 남강으로 향한다. 그 서쪽에서는 석교천이 군북면 일대를 아우르며 북쪽 남강으로 흘러드는데 일대는 곳곳에 늘어서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로 이름나 있다.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자취다.

그리고 함안천 동쪽, 가야시대에는 독자 세력 칠포국을 이뤘고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칠원현으로 함안과 별도 존재였던 삼칠(칠원·칠북·칠서면) 지역에는 광려천이 굽이치는데 이는 남강을 거치지 않고 낙동강으로 곧장 이어진다.

이런 함안 일대 물줄기를 두고 사람들은 남고북저(南高北低)라 하고 또 왕조시대에는 우리나라 강물들 대부분처럼 남쪽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거슬러오른다 해서 '역수(逆水의 땅'이니 뭐니 해서 불온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일 따름이고 실제 사람살이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는 함안 북류하는 물줄기들도 다른 지역 남류 또는 서류하는 물줄기와 다르지 않았다.

이런 물줄기들은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물길 교통로 구실도 톡톡히 했고 농경지 구실도 나름대로 알차게 했다. 가야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데 논밭은 기름져서 수확은 많이 나지만 홍수가 잦았다. 그러다가 1920년대 일제강점 시절 검암제를 비롯해 제방들이 쌓여지면서 조금씩 안정된 농지가 되기 시작했다. 옛날 뻘밭이었던 일대 명덕고교 자리에서는 청동기시대 논과 봇도랑도 확인이 됐다.

◇우두머리들의 유택 말이산고분군

규모가 엄청난 말이산고분군도 괜히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말이산(末伊山)은 이름에 끝 말(末)이 들어 있지만 이는 끄트머리라는 뜻을 새긴 말이 아니라 토종말 '머리'를 소리로 새긴 한자다. 머리산은 모양이 함안천·검암천·신음천이 합류하는 데로 불쑥 내밀어진 머리 같이 생겼다. 이런 머리산에 가야시대 전기와 후기 모두를 아울러 언제나 대단한 세력이던 아라가야의 '우두머리'들이 줄줄이 누워 잠든 유택(幽宅)이 있는 것이다. 머리산과 살짝 떨어진 바로 아래에서 산마루에 성산산성을 인 조남산 일대(지금 함안면)까지 아우르는 집단이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는 이 고분군은 또 함안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멋진 산책로이기도 하다.

말이산고분군.

도항리에서 말산리에 이르는 말이산은 전체가 가야 고분을 모시고 있다. 여기 옛 무덤 대표 유물로는 1992년 나온 말갑옷과 말얼굴가리개가 꼽힌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말갑옷이 나오지만 실물이 확인되기는 함안에서가 처음이었다. 이 밖에도 수레바퀴모양토기·불꽃무늬토기, 그리고 의례나 행사 때 위세를 떨치는 데 썼을 여러 가지 미늘쇠 등 다른 가야세력에게서는 볼 수 없는 유물들이 많다. 이런 아라가야 유물들은 말이산고분군 한편에 자리잡은 함안박물관에 제법 잘 갈무리돼 있다. 말이산고분군에서 가장 큰 4호분(밑지름 43m 높이 10m) 뒤쪽에는 경북 울진을 빼고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금송도 한 번 곁눈질은 할만하다. 잎사귀 끝쪽 1cm가 황금빛을 띠는 별난 소나무다.

◇아름다운 무기연당, 뿌리깊은 칠원향교

함안에서 아름답기로 으뜸인 문화재는 바로 칠원면에 있는 무기연당(舞沂蓮塘)이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고 관군에다 군량미를 내었던 주재성이라는 인물의 정원이다. 직사각형 연못과 굽은 소나무 그리고 누정 두 채가 어우러지는 품은 대단하다. 게다가 여기에는 욕심 부리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그런 뜻이 곳곳에 박혀 있다.

무기연당. 마주보이는 하환정과 소나무 뒤에 숨은 풍욕루.

'무기'라는 이름부터가 그렇다. <논어>에 나오는데, 좋은 물에서 몸을 씻고 기우제를 지낼 법한 언덕에 올라 노래를 부르며 시원한 바람이나 쐬며 살겠노라는 얘기다. 앞쪽 작은 정자는 하환정(何換亭)인데 '(이런 멋진 풍경과 더불어 지내는 삶을) 어찌 (벼슬 따위와) 바꾸겠는가' 하고 묻는 내용이다. 위쪽 누각은 풍욕루(風浴樓)로 바람으로 목욕하겠다는 바람이 담겼다. 풍욕루에서 연못으로 내려가는 돌계단 앞에는 탁영석(濯纓石)이 놓였는데 옛적 중국 사람 굴원이 지은 '어부사'에서 끌어왔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더러우면 발을 씻으리라." 연못 가운데 돌로 만든 석가산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과 양심대(養心臺)를 새겼다. 사람들은 이렇게 꼭꼭 새겨넣은 뜻까지 새기는 일은 별로 없고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과 배치에 감탄한다. 대문에는 주재성 충신 정려와 그 아들의 효자 정려가 나란히 걸려 있고 좌우에는 말과 더불어 드나들 때 쓰였지 싶은 둥근 돌이 놓여 있다. 대체로 50㎝ 안팎으로 보인다.

무기연당 하환정.

칠원에는 이 밖에도 새겨볼만한 문화재가 몇 있다. 칠원면 칠원향교는 함안면 함안향교와 더불어 그 들어선 지역이 옛적 전통시대에는 고을의 중심지였음을 일러주는 지표 가운데 하나다. 둘레에서 가장 높은 데 자리잡았는데 홍살문과 풍화루가 있으며 공부하는 명륜당이 낮은 앞에 있고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제사 지내는 대성전이 높은 뒤쪽에 있기는 다른 향교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어서 나이가 지긋한 학생(學生)들이 한 달에 두어 차례 정해놓고 모여 열심히 책을 읽으니 이는 아주 남다르다. 모름지기 향교에서는 책 읽는 소리가 울려야 제격이다.

◇작음으로 이룬 무릉도원 장춘사

칠원에는 오래된 절간도 있다. 대부분 절간은 드나드는 일주문이 웅장하고 사천왕 또한 근엄하다.

하지만 여기 장춘사는 그냥 대나무 사립문 하나로 성(聖)과 속(俗)을 나눈다. 사립문한테 한가운데를 내어준 정문은 '무릉산 장춘사(武陵山 長春寺)'라는 현판을 단 채 오른편으로 비껴나 앉았다. 장춘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7년 무염국사가 왜구를 물리치겠다는 원력으로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건물은 조선 시대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신라 말기 만들었다는 약사여래석불은 70년대에 금색을 입었다. 앞마당 오층석탑은 한 층이 사라진데다 제자리에 있지도 않다. 위로 올라갈수록 사다리꼴로 좁아지는 몸돌이 색다른데 덕분에 날렵한 느낌을 주면서 상승감을 불러일으킨다.

장춘사 사립문. 정문은 정작 비껴 앉아 있다. /김훤주 기자

장춘사는 그러니까 이런 조그마함이 생명이다. 대웅전도 크지 않아 설법을 강(講)하는 무설전(無說殿)보다 작다. 장춘사를 창건한 무염국사를 섬기는 조사전은 여염집 사랑채처럼 앉아 있고 약사불을 모신 약사전도 가로세로 한 칸짜리며 산신령도 조그만 산신각에서 조그만 호랑이랑 노닐 따름이다. 장춘사에서는 아무 데나 걸터앉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조그만 데서 오는 만만함, 만만함이 주는 편안함, 편안한 데서 솟아나는 치유 효과가 대단하다. 그러고 보니 장춘사 들어앉은 산 이름은 물론 칠원의 옛 별호조차도 무릉이다.

여기 이 절간이 품은 또다른 매력은 산기슭에서 장춘사까지 3km가량 이어지는 자드락 산길이다. 별로 가파르지도 않은데다 양쪽으로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잔뜩 키를 키운 채 늘어서 있다. 여름에는 시원한 기운을 내뿜고 겨울에는 활엽수 잎진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다사롭다. 게다가 이리저리 적당히 굽어 있기도 해서 산자락을 따라 오솔길 굽이굽이 걷는 재미가 제법 알차다. 장춘사는 이렇듯 걸핏하면 대형 불사를 일삼는 요즘 시류에서 벗어나 있다.

◇신라 기록의 보물창고 성산산성

말이산고분군에서 도항마을을 지나 함안면으로 발길을 옮기면 불꽃놀이로 이름높은 이수정이 나온다. 무진정이라고도 하는 이 정자와 바로 앞 연못에 눈길을 한 번 던진 다음 산길을 오르면 성산산성이 나타난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모두에게서 공부한 한강 정구는 함안군수로 있던 1587년 지역 사림 역량을 모아 <함주지(咸州誌)>를 펴냈다. <함주지>는 성산산성을 '가야 옛 터'라 일렀다. 지금껏 발굴이 이어지고 있는 성산산성은 신라 기록의 보물창고다. 예술이 아니라 군사·행정 목적으로 글자를 적었던 나뭇조각들이 엄청나게 발견돼 당시 생활상과 제도 따위를 좀더 많이 알 수 있게 됐다. 아마도, 아라가야가 쌓은 이 석성을 신라가 점령한 뒤 군사 요충으로 썼던 모양이다.

성산산성 안쪽 건물터로 보이는 자리.

산성은 봉우리를 통째로 두르고 있다. 동쪽과 서쪽에 성문이 있었던 모양으로 거기로 발굴이 집중돼 있는 듯하고 건물터로 보이는 자리도 한 군데 있다. 산성이 둘러싼 안쪽은 가운데를 향해 조금씩 기울어지며 있는데, 곳곳에 자라고 있는 갈대로 미뤄볼 때 물이 저절로 솟는 습지가 있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인지 과연 여기 산꼭대기에서 사람들이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다. 옛날 산성을 지키고 했던 사람들도 이런 습지에서 물을 얻었지 싶다. 여기 동문으로 이르는 산길은 가파르지 않고 산마루 석성을 따라 걷는 길도 거의 평탄하다. 나중에 복원돼 성곽 위로 우묵하게 자란 수풀들을 걷어낸다면 사방으로 탁 트이는 시원하고 멋진 조망도 덤으로 누릴 수 있겠다.

◇옛 동헌터에 남은 통일신라 사자석탑

함안은 함안읍이 아닌 가야읍에 군청이 있다. 가야읍(면)은 일제강점기 1914년 처음 생겼다. 그 이전에는 가야읍 가운데 말이산 기슭 말고 하천과 가까운 땅이 농사를 지을 수는 있어도 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금 함안면이 당시는 읍내면이었다. 함안군청은 줄곧 읍내면에 있다가 1954년 가야읍으로 옮겨갔다. 말하자면 옛적 중심지가 함안면인데 그래서 옛날에 고을마다 하나씩 마련했던, 지금으로 치면 공립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함안향교도 여기 봉성리에 자리잡고 있다.

함성중학교는 옛날 동헌 자리다. 지금도 그 주춧돌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들머리 왼쪽에 그럴듯한 돌탑이 하나 있다. 주리사지사자석탑으로 원래 여항면 주서리 주리사터에 있었는데 일제가 여항면사무소로 옮겼고 해방된 뒤 여기로 가져왔다. 기단에 사자 네 마리가 앉아 있는 독특한 모양이다. 사자는 발을 앞으로 나란히 하고 등을 맞댄 채 앞을 보고 있다. 전남 구례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을 비롯해 우리나라에 사자를 들이앉힌 석탑은 보기가 드물다. 비록 온전하게 남지는 않았지만 통일신라시대 돌사자를 보기 위해 한 번 정도 걸음할 수 있겠다.

함성중학교에 있는 주리사지사자석탑.

여기서 군북면으로 발길을 돌리면 방어산이 나오고 방어산에는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왼손으로 약그릇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다. 양쪽에는 두 손을 가운데 모으고 합장한 월광보살과 두 손을 든 채로 눈초리까지 치켜올린 일광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썩 잘 만들어진 불상은 아닌 듯하지만 조성 시기를 알려주고 있어서 소중한 존재다. 월광보살 팔꿈치께에 글자가 적혀 있다. "미도내미(彌刀乃未 사람 이름)가 정원(貞元) 17년 신사년(辛巳年 801년) 큰 바위 부처를 조성하고 적었다" 운운.

◇조선 땅에 세운 고려동 유적지

앞서 말한 대로 남고북저(南高北低) 지형이라 지배집단들이 '반골' '반역' 이미지를 덧칠하곤 했던 고을이 함안이다.

하지만 함안은 '권세나 시류에 휘둘리지 않고 할 말 하면서 반듯하게 사는 사람들의 땅'일 뿐이고 그런 뜻을 띠는 첫머리가 기와집 즐비한 산인면 고려동 유적지다. 산인면은 함안과 칠월 사이에 있다.

고려 왕조에서 성균관 진사 벼슬을 살았던 이오(李午)라는 사람은 새로 들어선 조선 왕조에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조아리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이는 여기 들어와 마을을 이루면서 담장을 쌓아 바깥과 구분지은 뒤 '고려동학' 비석을 세워 고려 유민의 고을임을 밝혔다. 그리고는 스스로 논밭을 일궈 자급자족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바깥세상과 마주하지 않았다. 자손들에게는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말라고까지 일렀다. 하지만 이 고려동 또한 조선이 아닌 다른 땅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끝>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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