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해인사 국사단, 여자 산신령 모신 까닭은

[경남 문화유산 숨은 매력] (17) 합천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4년 11월 06일 목요일

◇실천을 앞세운 남명 조식

남명 조식(1501~1572)은 조선 시대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선비였다. 경상좌도 대표 선비 퇴계 이황(1501~1570)은 예(禮)와 인(仁)을 강조했고 남명은 경(敬)과 의(義)를 내세우며 실천을 중시했다. 지금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외갓집에서 태어난 남명은 벼슬살이를 않는 대신 김해·합천·산청 일대에서 선비를 가르치며 자기를 부르는 임금에게 쓰고 곧은 상소를 올렸다. 그이는 작은 일 하나에도 선악을 구분하고 경과 의에 견줬다. 그이 한시 '욕천(浴川)' 끝부분은 이렇다. "티끌이 오장 안에 생기면/ 바로 배 갈라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리."

외토 마을에 들어서면 오른편 들판 너른 자리에 용암서원(龍巖書院)과 뇌룡정(雷龍亭)이 있다. 남명이 머물며(1548~1561) 제자들 가르치던 뇌룡정은 원래 양천 물가에 있었는데 요즘 무슨 공사를 한다고 지금 자리로 옮겼다. 오른쪽과 왼쪽 기둥에는 '시거이룡현(尸居而龍見)'과 '연묵이뇌성(淵默而雷聲)'이라 각각 적혀 있다. "주검처럼 가만 있다가도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연못 같이 묵묵히 있다가도 (때가 되면) 우뢰 소리를 낸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아무 때나 들이밀거나 나대지 말고 꼭 필요한 때 나타나 할 일만 하라'는 얘기다.

남명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이 세운 용암서원 앞에는 남명 흉상과 을묘사직소를 새긴 돌덩이가 놓여 있다. 단성소라고도 하는 이 상소는 단성현감직을 받지 않으면서 경의 정신에 서서 임금을 호되게 나무란 꼿꼿함이 표현된 명문으로 이름높다. 용암서원의 전신은 1576년 가회면 회현(晦峴) 아래 세워진 회산서원(晦山書院)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자 1601년 봉산면에 향천서원(香川書院)이 마련됐고 8년 뒤 임금이 용암서원 현판을 내렸다. 그러다 합천댐이 들어서면서 물에 잠기게 되자 1987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용암서원과 뇌룡정은 기운이 넉넉하고 따뜻하다. 바로 옆 양천강과 건너편 나지막한 산들 덕분이다. 뜻있는 선비들 좋은 선생과 공부하기 안성맞춤이겠다. 대문은 집의문(集義門)이고 건물은 거경당(居敬堂)이다. '의를 모으는 문'이고 '경이 머무는 자리'다. 마을 가운데에는 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사라진 그이 생가가 복원돼 있다.

◇합천군 창의사

남명 조식이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을 하지 않고 나아가 제자를 기르지 않았다면 조선은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결딴나고 말았다. 제자들 대부분이 의병으로 떨쳐 일어났는데 최초 의병장 의령 곽재우는 유명하지만 광해군 시절 영의정까지 올랐던 합천 정인홍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합천·삼가·초계처럼 의병 활동이 왕성한 데는 없었다.(합천·삼가·초계가 지금은 합천으로 한 몸이 됐다.) 남명이 길러낸 제자들이 시거이룡현 연묵이뢰성 그 뜻을 살려 자기가 필요한 국면이 되자 몸과 재산을 내어 의병을 일으켰다. 합천·삼가·초계 의병의 중심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경북 고령과 성주까지 장악했다.

합천 일대에서 벌어진 의병 활동을 담은 합천군 창의사가 2001년 합천댐 가까이에서 문을 열었다. 사당에는 정인홍을 중심으로 113 분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의령 충익사가 곽재우 장군을 비롯해 열여덟 분 위패를 모신 데 견주면 엄청난 규모다. 합천임란창의기념탑을 지나 더 올라가면 유물전시관과 사당을 들를 수 있다.

합천군 창의사 합천임란창의기념탑.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

남명 조식은 당대는 물론 근대에도 영향을 끼쳤다.

학문이 무르익는 40~50대에 강학 활동을 벌인 외토마을이 있는 삼가에서 대한제국 시기 의병이 많이 나왔고 1919년 3·1운동 당시는 대규모 시위가 2월 17일과 22일 두 차례 벌어져 연인원이 3만을 넘을 정도였다. 40명 정도 목숨을 잃고 150명 남짓 상처를 입었으며 50명 가량 끌려가 감옥에 갇혔다.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

삼가장터 들머리 삼가장터3·1만세운동기념탑에 얹힌 조각상은 힘이 넘쳐흐른다. 나팔을 들거나 맨손인 남녀가 투각된 태극기를 펼쳐 들고 사방으로 뛰쳐나간다. 제막은 2005년 했는데, 크지 않은 고을에서 그것도 90년도 넘게 전에 3만 넘는 사람이 모여 엄청나게 시위를 벌였음을 알려준다. 앞면에는 삼가장터 당시 풍경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삼가장터만세운동 내력과 의미가 적혀 있다. 완벽한 미래 문화재감이다.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일어난 의병활동을 기리는 빗돌도 있다.

삼가에서는 한치문·이차봉·김팔용·김우옥·김응오·김화숙·장명언·김찬숙·이소봉 등이 이듬해 순국했다. 빗돌에는 1927년 3월 20일 대병·상백·백산·가회·삼가 다섯 면 2000명 남짓이 돈을 모아 2년제 중등학교를 세우기로 한 끝에 이듬해 삼가농업보습학교가 문을 열었고 이것이 1938년 합천읍으로 옮겨가 합천중학교가 됐다는 내력도 적혀 있다.

◇해인사를 보는 또다른 관점

해인사를 일러 '법보종찰'이라 한다. 팔만대장경이 있기 때문인데 우리나라 3대사찰로도 꼽힌다.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장경판전이 뛰어난 건축물이라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해인사는 신라말 슈퍼스타 고운 최치원과도 인연이 있다. 그이가 머물렀던 데가 학사대이고 앞 전나무는 그이가 꽂은 지팡이에서 자라난 나무라는 얘기도 이제는 새삼스러운 편이다.(지금 전나무는 1757년 심겨진 후계목.)

해인사는 비로자나부처를 가장 큰 전각 대적광전에 모시면서도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을 하나 더 만들었다. 대비로전이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판전 가운데 북쪽 건물인 법보전에 있던 비로자나불과 대적광전에 있던 비로자나불을 함께 모시기 위해 2007년 11월 새로 지었다. 두 불상은 쌍둥이인데, 883년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불상 배 안에 감춰져(腹藏) 있다가 2005년 발견됐다. 제작연대가 확인되는 우리나라 목조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은 1769년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 대비로전 자리에는 원래 국사단(局司壇)이 있다가 해탈문 앞쪽으로 옮겨졌다. 가야산신은 남자가 아닌 여자다. 국사단 그림도 여자가 주인공이다. <동국여지승람>은 '경상도 고령현'에서 고운 최치원이 쓴 <석이정전(釋利貞傳:이정 스님 전기)>을 들어 대가야 건국신화를 전하고 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와 감응해 대가야 임금인 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가락국 임금인 동생 뇌질청예(惱窒靑裔)를 낳았다." 주일은 붉은 해를 뜻하고 청예는 새파란 끄트머리를 뜻한다. 정견은 불교식 표현인데 '깨달음'을 이른다. 해인사는 비로자나불이 가야산신 정견모주에게 땅을 빌려 일군 불국토다.

해인사 국사단에는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모셔져 있다. /김훤주 기자

해인사에도 미래 문화재가 있다. 일주문 들어서기 전 오른쪽 성철스님 사리탑이다. 사방으로 넓혀나가는 바닥 위에 둥근 원과 곧은 직선을 차례로 얹었다. 전나무들을 배경 삼아 가만 바라보면 끝없이 수렴하고 가없이 확장하는 진리를 나타내는 듯이 보인다. 옛날 양식을 벗고 현대 감각으로 입체감 있게 표현해 냈다.

홍류동 아래쪽 골짜기에는 '고운최선생둔세지(孤雲崔先生遯世地)'가 있다. 최치원이 여기에 신발과 갓을 벗어놓고 세상에서 도망쳤다는 자리에 후세 사람이 농산정(籠山亭)을 지었다. 건너편 제시석(題詩石)에는 고운이 썼다는 한시가 새겨져 있다. "첩첩 바위 사이 미친 듯 내달려 겹겹 쌓인 산 울리니/ 지척 사람 소리조차 구분이 어려워라/ 시비 다투는 소리 들릴까 두려워/ 흐르는 물로 산을 통째 두르고 말았다네." 과연 물소리가 굉장해 바위와 소나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압도한다. <삼국사기>는 최치원이 해인사에서 종로(終老)했다고 적었다.

◇월광사지와 영암사지

이정 스님 전기에서 대가야 건국신화를 적은 최치원이 순응 스님 전기에서는 대가야의 마지막을 기록한 모양이다. <동국여지승람>은 '경상도 고령현'에서 최치원의 순응스님 전기를 들어 '대가야 마지막 태자 월광(月光)은 정견모주의 10세손이요, 아버지 이뇌왕(異腦王)은 뇌질주일의 8세손으로 신라 귀족 비지배(比枝輩)의 딸과 혼인해 월광태자를 낳았다'고 적혀 있다. 순응은 선배 이정의 후배로 여겨지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인사를 창건한 인물들이다.

월광사지에는 삼층석탑 두 개만 있다. 월광태자에 빗대어 '비운'이라든지 '비애'와 연결지어 볼 수도 있겠지만 허하고 아쉬운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호젓하고 말끔한 느낌이 물씬하고 서너 그루 가지를 내린 소나무와 잘 어울리며 개울과 가까운 언덕배기 둘레 풍광도 썩 빼어나다.

월광사지 삼층석탑. 실물은 사진과 비길 수 없이 멋지다.

물론 월광사지가 이름은 대가야 마지막 태자 '월광(月光)'에서 왔지만, 석탑을 만든 시기는 아무리 올려 잡아도 통일신라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월광 태자가 여기에 절간을 짓지는 않았다 해도 월광태자가 쓸쓸하게 노닐던 자리 정도는 충분히 되고도 남을 것 같다. 들어가면서 먼저 마주치는 동탑이 뒤쪽에 서 있는 서탑보다 좀더 단정하고 맵시도 좋다.

월광사지가 아무리 그럴 듯해도 영암사지는 못 당한다. 체급이 다르다. 월광사지에는 석탑 둘만 달랑 남았지만 영암사지는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폐사지다. 그리고 망한 절터인데도 전혀 스산하거나 을씨년스럽지 않고 차라리 환하고 아름답다. 층층이 쌓은 돌 축대는 힘차고, 바로 앞 쌍사자 석등(보물 353조), 금당터 축대 연꽃 문양과 해태 모양 도들새김들, 그리고 탑비 거북들은 생생하다. 금당 아래 마당 작은 삼층석탑은 나대는 이런 것들 차분하게 만드는 단정함을 나름 보여준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영암사는 정통 불교와는 거리가 먼 밀교와 관련돼 있었으리라는 얘기도 나오고 또 서울 경주에서 떨어져 있는 합천 일대가 세력권인 토호가 세운 절간이리라는 짐작도 제기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주 불국사나 감은사와 마찬가지로 '왕립(王立)' 절간일 개연성도 있다. 금당 앞 축대가 한 발 툭 튀어나온 설치가 권위를 뜻한다 하고 가장자리와 가운데를 아울러서는 회랑 자리까지 확인이 됐다. 옛날 고귀한 인간들이 그렇지 못한 것들과 달리 눈비가 와도 몸에 묻히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마련된 시설이 회랑이다.

◇옥전고분군과 합천박물관

옥전(玉田)고분군은 합천의 뿌리를 일러준다. 가야시대 다라국(多羅國)이다. 옥전은 우리말로 하면 구슬밭이다.

여기 고분에서는 구슬이 엄청나게 나왔는데 M2호로 이름이 붙은 무덤 한 곳에서만 2000개 넘게 쏟아졌다. 또 구슬을 하는 데에 썼던 숫돌 옥마지석(玉磨砥石)도 나왔다. 명실상부한 구슬밭이 바로 이곳이다.

용봉 무늬가 새겨진 둥근 고리 큰칼 용봉환두대도(龍鳳環頭大刀)도 나왔다. 용봉은 임금과 같은 최고 지존만 쓸 수 있었는데, 여기서 한 자루도 아니고 네 자루나 나왔다. 투구는 금동제 하나를 포함해 13개, 갑옷은 철판으로 만든 하나를 비롯해 다섯 벌, 말투구는 다섯 개 나왔고 화폐처럼 쓰였던 쇠도끼도 130개 넘게 묻혀 있었다.

이렇듯 최고 우두머리급 무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을 끌어안은 옥전고분군은 그래서 가야뿐 아니라 고대 고분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가장 눈길을 끄는 유물은 '로만글라스'다. 2000년 전 서양 로마에서 만들어진 유리잔이다. 깨어진 채 발견됐으나 여기 로만글라스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빛이 난다. 서양과 동양을 잇는 비단길 실크로드의 처음과 끝이 이탈리아 로마와 중국 장안(지금 서안)이라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동남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다라국 주인공들은 대외교역도 이처럼 왕성했다.

합천박물관은 바로 옆에 있다. 전시 유물은 대부분 옥전고분군에서 나왔다. 합천박물관과 옥전고분군은 산책하기 좋도록 이어져 있다. 어린 학생들이 공부 삼아 자주 찾는 데라서 그런지 전통놀이 같은 것도 즐길 수 있게 돼 있는데 관심을 끌기 위한 애씀이 곳곳에 스며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신문 구독을 하지 않고도
경남도민일보를 응원하는 방법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http://www.idomi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