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경남, 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⑥85년 총학생회 부활과 학생운동의 특징

경남대 총학생회 출범식을 보도한 85년 <경남대학보>.

-85년 4월 11일 경상대 총학생회장 하경보(사회 3) 당선.

-85년 4월 18일 창원대 총학생회장 조영래(회계 3) 당선.

-85년 5월 2일 경남대 총학생회장 김성진(경제 3) 당선.

이들 세 명의 공통점은 75년 이래 10년 만에 부활된 민주적 총학생회의 대표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세 학교는 84년부터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학자추)', '학원자율화와 지역사회 민주화를 위한 추진위원회(학지민추)' 등의 이름으로 학교당국은 물론 기존 학도호국단과도 끊임없는 투쟁을 벌인 끝에 쟁취한 것이었다. 특히 2학기에 선출돼 이듬해 1학기까지 임기가 계속되는 경남대의 경우, 85년 3월 200여명의 학생들이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공청회'를 연 뒤 기존 학도호국단 해체를 요구하며 학도호국단 사무실을 점거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총학생회였지만, 경남대를 제외하고는 학생회 중심의 민주화 시위가 즉각 불붙지는 않는다. 경남대 김성진 회장의 경우 이미 1학년 때부터 부마항쟁 세대의 영향을 받아 의식적인 단련이 돼 있었고 84년부터 각종 시위를 주도하다 연행돼 25일간 구류를 살았던 경험까지 더해 총학생회장에 당선됐을 때는 이미 도내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투사'가 돼 있었다.

경상대의 경우, 그해 여름을 지내면서 '넝쿨'이라는 공개적인 운동권 서클이 모습을 드러낸다. 70년대 영남대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78년부터 진주 삼현여고에 교사로 있던 조창래(현 진주여고 교사)씨와 83년 무렵부터 의식화 학습을 해온 권춘현(사회 3·현 진주신문 사장), 정대성(농경제 4), 김현규(경영 2)씨 등이 중심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풀무회'와 같은 이념서클이 있었지만 공개투쟁에 나서지는 않은 때였다. '넝쿨'은 대자보를 통해 공개적으로 회원을 모집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이미 가두투쟁(가투)에 대한 훈련까지 했다고 한다.

학원자율 투쟁 끝 10년만에 민주적 총학생회 구성

'노조 탄압 규탄' 유인물 배포하던 경남대생 연행

이들을 중심으로 총학생회와 별도의 투쟁조직인 '투위'를 구성, 동아리연합회와 함께 시위를 주도하게 되는데, 4월 17일 경상대 민주광장에서 200여명의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4·19혁명 기념식이 열렸다. 총학생회장의 추모사와 제문 낭독, 인문대 학생회장의 4·19 경과보고에 이어 김주열 열사에 대한 위령제와 구호제창과 학도호국단기 화형식을 마친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시내 진출을 시작했으나 교문에서 경찰의 저지로 무산됐다.

사흘 후인 19일에는 80년 '남강 도하작전' 이후 처음으로 교문 밖으로 진출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권춘현씨는 "우리도 나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개양 사거리까지 진출하게 돼버렸다"고 회고했다.

경상대생은 5월 8일에도 300여명이 모여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5월 17일에는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사태 위령제'를 지낸 후 교문 앞 시위를 벌이는 등 본격적인 경상대 학생운동이 개화하게 된다.

창원대의 경우도 직선 총학생회가 부활하긴 했지만, 학생회보다는 이전부터 지하에서 의식화 학습을 통해 단련된 운동인자들이 실질적인 시위를 주도하게 된다. 김경영(영문 4·이후 웨스트전기 노조위원장), 박유호(국문 3·현 금속노조 사무차장)씨 등이 그들이다. 창원대는 4월 19일 50여명의 학생들이 '민주·민중·민족의 새 깃발을!'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 앞 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5월 15일과 17일 '광주사태 위령제' 시위로 이어진다.

경남대는 4월 22일 1000여명이 '학교측의 총학생회 방해 중지'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데 이어 24일에도 3000여명이 모여 같은 요구를 내걸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총학생회 선거 이후인 5월 16일에는 1000여명이 저녁 8시부터 횃불을 들고 '광주사태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으며, 이들 중 60여명은 마산 오동동 불종거리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려다 하대출(전자계산 2), 정창기(경영 3)씨 등 3명이 경찰에 연행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6월 30일에는 시내 중심가에서 '(주)통일 노동조합 탄압'을 규탄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하던 김성진 총학생회장과 박철민(심리 2), 김우용(심리3)씨 등 3명이 경찰에 의해 각각 연행돼 7일간 구류처분을 받았다. 경남대에서는 10월 18일 부마항쟁 기념시위, 11월 1일 학생의 날 기념시위가 각각 열리는 등 2학기말까지 가장 활발한 시위양상을 보였다.

85년 학생운동의 특징은 경남대 학생들이 '(주)통일 노동조합 탄압'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뿌려 검거되는 사건에서 보듯 서서히 학교 바깥의 다른 부문운동과 결합하고 연대하는 초보적인 모습들이 갖춰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경상대 '넝쿨' 그룹이 조창래 교사와 연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85년말 경상대 '풀무회' 그룹의 진홍근(의과대 본과 1)씨가 고려대 출신으로 마창지역 노동운동권과 맥이 닿아 있던 문진헌(현 내일신문 기자)씨를 만나게 되는 것도 그런 연대의 시발로 볼 수 있다.

다음회에는 학생운동과 별도로 성장하고 있던 노동운동과 각종 사회운동의 86년 이전 모습들을 알아볼 예정이다.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