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경남,6월에서 9월까지 항쟁의 기록-(9) 87년 이전의 교육·여성운동유신투쟁 세대, 학교현장서 80년대초 변화의 바람 주도86년 교육민주화선언·경남대 교수들 시국선언 이어져

◇교육민주화운동 = 교육민주화운동으로 해직된 경남 최초의 교사는 누구였을까? 연원을 따져보면 4·19혁명 직후 교원노조운동을 벌이다 61년 5·16쿠데타와 함께 해직·구속됐던 마산고 이봉규 교사와 성호초교 황낙구 교사였다. 그로부터 80년대 초까지 약 20여년간 학교는 민주화운동의 무풍지대였다. 교사는 독재자의 충실한 하수인이었고, 학교는 정권에 철저히 순응하는 국민을 길러내는 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70년대 대학에서 유신독재의 실상을 깨닫고 졸업한 세대들이 학교현장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슬슬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78년 진주 삼현여고에 부임한 조창래 교사가 있었다. 영남대 사학과에서 반유신독재 투쟁의 경험을 가진 그는 80년대 초 진주 흥사단 모임에서 학생운동 인자였던 경상대 아카데미 서클의 정대성씨를 만난다. 그를 통해 권춘현, 정명환, 김현규, 박은영 등을 소개받은 조창래 교사는 이들과 진주 중앙시장 닭집골목의 다락방을 전전하며 이른바 '의식화 학습'을 진행한다. 권춘현씨 등은 80년대 초기 경상대 학생운동의 진원지 중 하나였던 '넝쿨' 서클의 핵심멤버가 된다.

조창래 교사는 83년부터 진주지역의 뜻있는 교사들을 모아 소모임활동을 시작하고, 84·85년으로 넘어오면서 통영여중의 권재명, 마산여상 고승하, 거창고 표정숙 교사 등과 연결돼 경남단위의 교육운동으로 확산된다. 이들 외에도 진주 대아고 문진헌, 통영 산양중 이영주, 창녕의 박종현, 마산 제일여중 이인식, 마산상고 안종복 교사 등도 서로 직·간접적 연결망을 갖고 교육운동을 하고 있었다.

86년에는 한국YMCA중등교육자협의회가 주도한 5·10 교육민주화선언으로 80년대 1차 해직교사들이 양산되는데, 경남(울산 포함)에서는 통영의 권재명, 울산 상북종고 정익화, 울산 현대공고 노옥희 등 3명의 교사가 학교에서 쫓겨났다. 이 일로 10월 20일 마산YMCA에서는 '이 땅의 교육민주화와 고난받는 교사들을 위한 기도회'가 열리는데, 당시 자료를 보면 정병권 이사장의 사회로 권재명 교사가 교육민주화선언과 해직에 이르기까지 경과보고를 하고, 최행진 이사가 '고난받는 교사들을 위한 기도', 허정도 이사가 '이 땅의 교육민주화를 위한 기도'를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들의 활동은 87년 5월 7일, 5·10 교육민주화선언 1주년을 맞아 '호헌 철폐와 민주 개헌을 촉구한다'는 전국해직교사 56명의 성명서로 이어지고, 6월항쟁에 교사들이 적극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해직교사들의 호헌철폐 성명에는 서형석(통영중), 노옥희(울산 현대공고), 정익화(울산 상북종고), 권재명(통영여중) 등 4명의 경남지역 교사들의 명단이 올라 있다. 6월항쟁 이후 경남지역 교사들은 87년 7월 27일 광주에서 열린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 건설을 결의하는 회의에 조창래 교사를 대표로 참석시키고, 그해 10월 진주 하대성당에서 '경남교사협의회'를 창립한다. 이는 89년 전교조 결성으로 이어진다.

80년대 교육민주화운동의 진원지가 된 82년 1월 의정부 다락원의 한국YMCA중등교육자협의회 창립총회 모습. 앞줄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김용택 전 마산여상 교사. /사진제공 김용택
이보다 앞서 81·82년에도 초기 형태의 교사운동이 있었다. 81년 12월 12일 마산여상 김용택 교사를 중심으로 마산YMCA 중등교육자회가 창립된 것이다. 기록에는 회원이 19명이었고, 회장은 김용택, 부회장은 송기학·이경희였으며, 당연직 총무로 황주석(작고) 마산YMCA 간사가 맡은 것으로 돼 있다. 이들 중 9명의 마산 교사들과 표정숙 교사 등 2명의 거창지역 교사들은 1월 5일부터 7일까지 한국YMCA 의정부 다락원 연수원에서 열린 한국YMCA중등교육자협의회 창립총회에 참석한다. 초대 전국회장은 오장은(서울 신일고) 교사가 선출됐고, 김용택 교사는 감사로 선임된다. 하지만 이들 중 마산지역 교사들의 활동은 86년 교육민주화선언과 87년 경남교사협의회와 결합되지 못하고 따로 이뤄지던 중 89년 전교조 결성을 앞두고 서로 만나게 된다.

◇대학교수의 시국선언 = 대학교수들도 독재정권의 충실한 하수인이었다는 점에서는 교사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이 집회나 시위를 벌이면 이들을 온몸으로 저지하는 역할을 교수들이 맡았다. 이런 교수사회에서 86년 충격적인 성명이 등장하게 된다. 그해 4월 21일 경남대 교수 30명이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시국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이들은 "대학의 자율성과 교권은 보호되어야 하며, 개헌에 대한 의견의 발표 토론 및 요구는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존중되어야 하고, 민주화의 촉진과 사회전체의 향상을 위해 전국의 균형있는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전두환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 교수의 이름은 감정기 강인순 김남석 김선광 김연희 김용기 김재현 김종덕 김학범 명형대 박종근 박창원 손진우 송갑준 신동순 심지연 안승욱 여성구 유장근 유창국 유희수 이강옥 이승현 이지우 이훈 정상윤 조인성 최덕철 최상안 최유진이었다.

이어 29일에는 경상대 교수 24명도 같은 요지의 시국선언을 발표한다. '오늘의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이 선언에는 강대성 강재대 고석남 곽상진 김명순 김완 김유철 김준형 김중섭 김해영 박재홍 백좌흠 송기호 송무 이심성 이영석 이창호 장봉규 정병훈 정성진 정진상 정진주 정헌철 최태룡 교수가 참여했다.

이들 교수들은 87년 6월항쟁 직전에도 개헌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 학생과 시민항쟁에 불길을 지폈다. 87년 경남대 교수들의 성명에는 김영주 김학수 민병위 박문정 송병주 옥원호 윤성진 이호열 임영일 조태남 최영규 현외성 등 교수들이 추가로 참여했다.

◇여성운동 = 경남지역 여성운동의 뿌리도 역시 가톨릭과 기독교 등 종교운동에서 나왔다. 81년 8월 천주교 마산교구 사목국, 본부 부녀부에서 작성한 '마산 공소 부녀 지도자 교육'이라는 문서를 보면 27명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가톨릭여성회관에서 농촌 현실과 농촌 여성의 역할 등에 대한 1박2일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으로 돼 있다. 27명은 마산과 거제, 하동, 창녕, 장승포, 진영, 함안 등에서 온 여성들이었는데, 김영선 진홍금 박호선 강영로 이소위 송복수 유송자 김순자 최명숙 문서원 김재연 이경순 김귀남 예숙이 안문애 조종순 박말순 오재영 이금선 박재순 장정순 이영선 정영순 배두선 박군자 유정순 전진자 등이다.

가톨릭여성운동의 이런 교육프로그램은 농촌여성 뿐 아니라 여성노동자와 일반 부녀자를 대상으로도 이뤄졌고, 교육을 수료한 여성들은 각각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여성운동을 개척해 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여성운동의 모태가 된 교육은 85년 12월 가톨릭여성회관에서 진행한 여성지도력 개발과정이었다. 이 교육에 참여했던 여성 중 9명이 '월요회'라는 후속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이 여성운동의 효시가 됐다는 것이다. 9명의 참가자들은 김도애, 박명희, 송향섭, 이경숙(작고), 이경희, 이영희, 임혜숙, 정혜란, 최경화, 하효선이었다.

이들 여성은 공간의 필요성을 느껴 86년 마산 서성동에 여성문화공간으로 북카페 '반'을 열었고, 회원이 늘어나자 기존 월요회를 1반으로 하고, 또하나의 모임인 2반(김인자, 김영옥, 문성윤, 유승희, 이연숙, 정미라, 진성화, 최갑순)과 미혼 직장여성을 중심으로 한 3반(이경옥, 허인정, 신혜자, 오정선, 황홍점, 박미덕, 박경희)을 만들어 조직을 확대해나갔다.(이경옥, 6월민주항쟁 20주년 기념학술토론회 자료집)

6월항쟁 직전인 87년 4월 17일에는 경남여성회의 전신인 '경남여성문화연구회'가 창립됐고, 이들 회원들 또한 6월항쟁의 주역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80년 광주가 날 불렀다…" 학생운동권 출신 조창래 선생

   
 
 
조창래 선생(진주여고 교사)은 삼현여고에서 전교조 사태로 해직됐다. 그는 7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자연스럽게 사회운동과 교육운동에 나서게 된 경우다. 해직 후에도 진주지역의 각종 민주화운동 단체에서 집행위원장을 도맡다시피 했다.

영남대 사학과 출신인 조 선생은 77년 졸업 후 경북 영천군에서 한 사립학교에 부임했으나, 거기서 온갖 사학비리를 목격하고 '다시는 교사직을 하지 않겠다'며 사표를 냈다. 그래서 다른 직업을 물색해보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아 진주 삼현여고에서 다시 교사생활을 시작하지만, 일찍이 사회의 모순을 깨닫고 있는 그는 교사직에만 만족하고 있을 수 없었다. 조 선생은 80년 '광주사태'가 났을 때 혈혈단신으로 광주에 잠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1930년대 에스파냐의 공화정을 사수하고, 프랑코 파시즘 체제와 싸우기 위해 전세계 사람들이 거기로 모였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직감적으로 광주에 집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등산복 차림으로 비상식량과 양초 등을 배낭에 넣고 무등산 등산을 간다며 광주에 접근했다. 그러나 화순에서부터 계엄군에 막혀 광주진입에 실패한 후, 다시 순천으로 나와 송광사에 들어갔다.

"송광사는 지눌스님이 한국불교의 개혁을 추구했던 곳이었죠. 거기서 밤을 지새면서 다시 때를 기다리자고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진주에서 흥사단을 통해 경상대 학생운동권과 연결망을 갖게 된 그는 개인적으로 각종 학생집회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83년 교사들의 소모임을 꾸린다. 이 소모임을 바탕으로 경남지역 교사들의 조직화에 나서 87년 경남교협과 89년 전교조 결성의 주역이 된다.

성서연구하다 투쟁 최일선에 …82년 Y중등교육자협 김용택 선생

   
 
 
김용택 선생(전 마산여고 교사)은 현존하는 기록상 80년대 경남에서 교육민주화운동에 가장 먼저 참여했던 교사다. 또한 '운동권 교사'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김 선생은 80년대초 북마산감리교회(현 성은감리교회)에 다니면서 비판적 사회의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교회 내에 '육속회'라는 성서연구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서 허정도·정미라 부부와 고승하 선생 등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서연구를 한다는 명목으로 만나 광주학살 비디오도 빌려보고, 광주YMCA 사람을 불러 간담회도 열었다고 한다. 또한 해방신학·민중신학 등도 거기서 공부했다.

그러던 중 한국YMCA중등교육자협의회에 참여하게 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자신을 해직한 마산여상 교장의 권유가 계기였다고 한다.

"의정부 다락원에서 열린 Y중등교육자협의회 창립총회에 참석할 때도 학교에서 공식 출장을 끊어서 갔어요. 아마 그때까지만 해도 교장은 그 단체가 운동권 조직이 될 거라는 걸 몰랐던 것 같아요."

당시 마산여상에서만 3명이 갔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다녀온 후 몇몇 교사들은 모임에서 이탈했다. 운동권인 줄 모르고 참석했다가 정체(?)를 알고 난 뒤 빠져나간 것.

그후 마산YMCA중등교육자회를 하면서 거창양민학살 현장답사를 다녀온 후 그 내용을 회보에 썼는데, 그때서야 학교에서 모임의 정체를 알고 김 선생을 야간으로 발령내는 소동을 빚었다고 한다.

김 선생은 이후 85~86년 즈음에는 교사운동보다 가톨릭여성회관이나 마산YMCA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역사강의에 힘을 쏟았는데, 89년 전교조 출범을 앞두고 다시 교육운동 일선에 합류하게 된다. 이에 전교조 초대 마산지회장과 2·3대 경남지부장을 맡으면서 교육운동의 최일선에 나서게 됐던 것이다.


※이 기획취재는 문화관광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 지원을 받아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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