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너리댁의 밥상] 훈민정쑥 - 윤지 사람 만들기
2월부터 같이 사는 손녀 윤지
애릴 땐 발 잘 묵고 말 잘 듣고
내 따라댕기면서 놀아줬는데
이제는 잠만 자고 술만 묵고
도시 나가 살더만 아가 변했다
이참에 아를 인간 맹글어야지
제철인 쑥을 캐서 국을 끼리고
다른 반찬 틈에 먹어보라니까
입에 잘 맞는지 계속 떠먹네
내일은 또다른 숙 요리해야지
2월 보름부터 윤지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산다. 그러니까 내 황혼 육아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사실 말만 황혼 육아지, 2월 내내 윤지가 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윤지는 애릴 때(어릴 때)부터 밥도 잘 먹고 말도 잘 들었으니 키우는 게 수월했다. 게다가 어딜 가나 내를 졸졸 따라다니니 얼마나 예뻤는지. 그러니 이번에도 윤지랑 사는 게 얼마나 재밌을지 신이 나 잠도 설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웬걸. 윤지가 변했다. 내가 키울 때는 아가 참 부지런했는데 도시로 나가서 살드만 즈그 엄마가 아를 망쳐놨다. 내 기대와 달리 다 큰 윤지는 게으르고 느릿느릿하고 씻는 것도 싫어하고 무엇보다 내랑 안 놀아 준다! 물론 운전도 설고(서툴고) 일도 처음 시작하는 거라 집에 오면 피곤하다고 저녁도 안 먹고 바로 자는 게 짠하긴 하다. 우리 윤지가 밥을 마다하다니! 아기 때부터 내가 키워온 우리 윤지가 밥을 거르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오죽했으면 내가 윤지가 아픈 줄 알고 한약도 지어주려고 했을까.
하지만 내는 온종일 우리 윤지 오면 밥도 같이 묵고 과일도 같이 무면서 드라마 <결혼하자 맹꽁아>를 볼라고 했는데 8시면 불 끄고 자는 게 영 마음에 안 든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윤지는 술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회식 날에도 술을 왕창 먹고 오더니 집에서 혼자서 막걸리, 맥주 가리지 않고 홀짝홀짝 하니 참 큰일이다. 내 한 꼬푸(컵) 먹을 때 지는 세 꼬푸를 먹으니 정말 걱정이 된다. 저래서 시집은 갈런지…
그래도 지 나름 직장에 적응하려고 용쓰는 게 기특해서 고전 막걸리에 가서 막걸리도 받아오고 술 먹은 다음 날엔 북엇국도 낋여줬지만(끓여줬지만) 더는 이래서는 안 된다. 즈그 엄마가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우찌 키웠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이라도 윤지를 사람 만들어야 한다.
"내 윤지 ㄹㆍㄹ 爲 윙 ㅎㆍ 야 : 어엿 비 너 겨 새 로 쑥 국 ㄹㆍㄹ ㅁㆎㅇ ㄱㆍ 노 니 윤지 ㄱㆍ 이 ㄹㆍㄹ 머거 사ㄹㆍㅁ이 될 ㅼㆍㄹㆍ 미니 ㄹㆍ" (내가 윤지를 위하여 어여삐 여겨 새로 쑥국을 만드니 윤지가 이를 먹고 사람이 될 따름이니라.)
윤지를 사람 만들기 위해서는 마늘과 쑥이 필요한데 마침 쑥이 제철이니 참 잘됐다. 마늘이야 윤지가 삼겹살 먹을 때 잘 먹으니 차치하고 쑥이나 많이 먹이면 되겠다. 호기롭게 과도 하나와 파란 소쿠리 하나를 들고 마을 들판을 돌아댕기는데…. 아이고! 쑥이 없다. 3월 아흐레쯤이면 쑥이 쏘독하게 올라와야 하는데 올해는 날이 추워서 그런가 아무리 찾아도 쑥이 없다.
우리 윤지 사람 만들어야 하는데…. 전도장에 가서 사 와야하는 찰나에 양지에 자잘하게 쑥이 올라와 있었다. 사람 만들기에는 이걸론 택도 없다 싶어 양지를 찾아 사방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옆 동네 논까지 왔다. 그래도 소쿠리를 보니 애법 쑥이 쌓여 있다.
이 정도면 쑥국 끓이고 쑥떡 하고 쑥버무리까지 해서 멕일 수 있겠다 싶어 온종일 돌아다녀 무뎌진 칼을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씩 소분하니 생각보다 양이 꽤 되어 즈그 엄마랑 아빠도 멕일 수 있겠다. 윤지만큼이나 고것들도 사람이 되어야 한께네 한 봉다리는 남겨두어야겠다.
이제 윤지 사람 만들기도 얼추 다 되었다. 다라이에 찬물을 받고 캐온 쑥을 담근다. 자잘한 티끌이 둥둥 뜨면 그것만 걷어내고 쑥을 으깨듯 주물러준다. 사실 쑥국을 끓일 때 이것만 잘해도 절반은 성공이다. 쑥물이 덜 빠지면 국물이 써지지만 쑥물을 너무 빼면 쑥내가 안 나 말짱 도루묵이니 말이다. 그다음엔 냄비에 된장을 평소보다 절반만큼만 풀어서 넣는다.
다시 말하지만 쑥내가 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니까 말이다. 된장물이 끓어 오르면 씻어둔 쑥과 개발(조개)을 넣으면 된다. 나는 요번에 전도장에서 윤지 생알상(생일상) 차린다고 사둔 우럭이랑 반지락(바지락)이 있어 그걸 넣었다. 된장을 조금만 풀었으니 국간장으로 간을 하고 팔팔 한소끔 끓이면 쑥국은 끝이다.
이제 관건은 윤지를 멕이는 것이다. 애릴 때는 내가 주는 건 다 잘 묵었는데 즈그 어매가 버릇을 잘 못 들인 건지 아가 다 커서 편식을 한다. 그러니 윤지가 좋아하는 꼬막무침이랑 생선도 한 마리 굽고 갈비찜도 식탁에 올려둔 다음 쑥국을 은근슬쩍 내밀어야 한다.
고기를 우물우물 먹고 있는 윤지에게 목 맥히니 국도 떠먹으라고 하며 눈치를 보면 국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는다. 그래도 더 안 먹는다 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안 하고 한 입 더 떠먹는 걸 보니 나름 입에 맞았나 보다. 그럼 내도 이제 한 시름 놓고 밥을 편히 먹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건 황혼 육아도 아니고 시집살이를 다시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윤지 사람 만들겠다고 온 지천을 돌아다녀서 쑥 캐고 그것도 입에 안 맞을까 봐 마음 졸이면서 밥상 차리고…. 내 나이 88살에 29살 손녀 비우(비위) 맞춘다 하루가 다 간다. 게다가 윤지 요것은 입도 짧아서 오늘 먹은 거 내일 주면 분명 안 먹을 거다. 그러니까 내일은 또 다른 쑥 요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일상이 이러니 오전에는 윤지 뒤치다꺼리하다가 화가 나서 윤지보고 방을 얻어 줄 테니 나가 살라고 할까 싶다가도 윤지가 퇴근하고 돌아와서 "할머니 다녀왔습니다" 하면 또 어디 이렇게 이삔(예쁜) 손녀가 있나 싶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마음이 바뀐다.
어제 쑥국을 멕였으니 오늘은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아직 쑥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라 해도 일어나지도 않고 출근하기 싫다고 입이 댓발이나 나와서 느적느적 준비를 하는 걸 보니 내 속이 터질라 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는 쑥버무리를 윤지 입맛대로 달달하게 해서 계속 멕여야겠다. 하긴 곰도 쑥이랑 마늘을 100일이나 먹었는데 하루아침에 윤지가 변할 리가.
내 올봄 내도록 쑥을 캐서 꼭 윤지를 사람 만들겠다고 다짐하며 오늘도 윤지 출근길을 배웅하고 서둘러 파란 소쿠리랑 과도를 챙겨서 밖으로 나온다. 고전면에 있는 쑥을 다 캐서라도 다시 부지런하고 잘 씻고 그리고 '나랑 잘 놀아주는' 윤지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 내가 이번 여름부터는 시집살이 아니 황혼 육아를 좀 편히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제발 우리 윤지 쑥 많이 먹고 사람 되게 해주세요.
/김윤지 시민기자
관련기사
잠깐! 7초만 투자해주세요.
경남도민일보가 뉴스레터 '보이소'를 발행합니다. 매일 아침 7시 30분 찾아뵙습니다.
이름과 이메일만 입력해주세요. 중요한 뉴스를 엄선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