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민주 성지' 마산에 묻다]
(중)민주화 세대가 본 마산
1960년 마산상고생 김익권 씨
이승만 정권 3.15 부정선거 항거
시민과 규탄 시위·재선거 요구
민주사회 기대 얼마 못가 꺽여
"시민들 YS 3당 합당 후 달라져"
지역 정치인 이젠 내란 동조까지
선거 때 기준·판단 필요성 강조
대한민국 민주화 대열 중심에는 늘 마산 시민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에 항거했고, 1979년 10월 18~19일 박정희 정권 유신 독재에 맞서 반대 시위를 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때도 뜨거운 마음을 표출했습니다. 이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외쳤습니다. 이처럼 마산은 격변기 과정에서 늘 불의에 맞서면서 ‘민주 성지’라 불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산은 어떤까요? 수구 토착화 세력이 마산 정신을 갉아 먹으며, 이젠 ‘민주 성지’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부끄러울 지경에 다다랐습니다. 막다른 길에 서 있는 마산의 정체성을 다시 묻고자 합니다.
마산에서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은 지극히 평범한 우리 주변 이웃이었다. 특별해서 거리에 나온 게 아니다. 그들은 그저 이전보다 더 나은 세상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그때 누구보다 저항적이고 개혁성 짙던 이들조차 지금은 극우화 됐다. 65년 전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친 소시민은 극우 온상이 된 마산을 안타깝다고 말한다.
마산 진동면에서 나고 자란 김익권(81) 씨는 어려서부터 독재라는 단어에 민감했다. 마산상업고등학교(현 마산용마고등학교) 재학 시절 이승만 자유당 정권 때 자행된 부정선거를 마주하면서다. 그날 후로 세상에 관심이 커졌고, 진짜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러나 연이은 독재 정권 집권에 몸서리쳐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점점 극우화 돼 가는 마산에 씁쓸함을 느꼈다.
◇예상 못한 비상시국 = 1960년 3월 15일, 마산상고 2학년 진학을 앞두고 있던 익권 씨는 등교 대신 학교 주변 자취방에 앉아 상과 책을 폈다. 그날은 이승만 4선이 걸린 정·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날이었다. 집과 2시간 거리 진동면 본가에 갈 생각은 없었다. 주말과 끼인 날이 아닌데다, 여객선을 타고 집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놀지 않고 책을 붙잡았다. 몇 시간쯤 지났을까. 글을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는데 집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읽혔다. 창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짜고 치는 게 무슨 선거가.”
들어보니 주제가 부정선거였다. 몇 마디 말로는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오후 3~4시쯤, 집 근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와 고등학교까지 같이 진학한 동네 친구와 둘이서 마산 시내로 향했다. 사방에서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하라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유권자를 3·5인조로 묶어 공개투표를 하게 하거나, 투표소 인근에 반공청년단 등 완장 부대를 배치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지 뭡니꺼.”
시민 사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쏟아졌다. 부정선거에 반발한 시민 무리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서 익권 씨는 친구와 함께 행진하며 힘주어 외쳤다.
“부정선거가 웬 말이냐, 선거 다시 하라.”
◇커질대로 커진 시민 반발 = 익권 씨는 저항심 가득한 시민 무리와 온몸으로 함께했다. 이들과 남성동파출소에 다다랐을 때는 현장에서 손에 총을 든 경찰과 마주했다. 그 경찰들은 익권 씨 쪽으로 총을 겨눴다. 설마 했던 사격이 이어졌고, 깜짝 놀라 골목으로 도망쳤다. 다행히 총에 맞지 않고 몸을 피했다.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친구와 돌고 돌아 다른 대열에 합류했다. 거기서도 똑같이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소리 내 재선거를 요구하며 마산시청까지 당도했다.
익권 씨는 선거 당일 행방불명됐던 같은 고등학교 후배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이 얼굴에 박혀 숨진 채 바다에서 발견된 4월 11일 다시 거리로 나섰다. 또래 학생이, 그것도 같은 학교 출신이 겪은 일에 분노가 커져 가만히 있기 어려웠다.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 행위를 막으려는 교사와 학부모들이 서 있었지만, 슬쩍 교문을 빠져나왔다. 같은 학교 학생들과 이승만 자유당 정권을 비판했다.
그는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이미 권위주의 통치 장기화로 반자유당 정서가 심한 와중에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밀어붙여 사상자까지 낸 정권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에 앞서서는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입후보해 당선한 허윤수 국회의원이 ‘차기 국회의원 공천권 보장’과 마산 지역 핵심 기업인 ‘동양주정’ 경영권 인수를 자유당에게서 제안받고 민주당을 떠나 자유당에 입당하지 않았던가. 익권 씨가 품고 있던 반발심은 3.15의거로 촉발된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서야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또다시 이어진 독재 = 익권 씨는 이승만 정권 몰락 후 이제 부정부패 없는 민주사회가 올 거라고 기대했다. 다른 시민들도 같은 마음으로 민주 정부를 바랐다. 하지만 그 기대가 꺾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로 장기 집권했다. 군부독재 체제에서 자유를 억압받았다. 고교 졸업 후 육군 장교로 복무한 그는 5년 정도 만에 일을 그만뒀다. 베트남 전쟁 참전 후 고엽제 환자가 되는 바람에 몸이 좋지도 않았다.
늘 민주화를 꿈꿨기에 전역 후인 1979년 10월 유신 독재가 막을 내렸을 때는 여느 마산 시민들과 같은 마음으로 기뻐했다. 부산에서 시작된 독재 반대 시위 불씨가 마산으로 옮겨붙은 시기,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독재에 반대하는 마음만은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반면 뒤이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가 다시 정권을 낚아챌 때는 여느 마산 시민처럼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단일화 실패로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연장을 야권이 막지 못했을 때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김영삼이 1990년 1월 22일 노태우·김종필과 함께 3당 합당을 발표하자 그에 따른 실망감도 컸다. 야합이라는 시민 반발에 김영삼이 “구국의 결단”이라 포장한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반면 부산과 마찬가지로 많은 마산 시민은 그간 지지를 보내던 김영삼이 군사독재 세력과 손을 맞잡아도 그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익권 씨는 그들과 같은 길을 가지 않았지만, 다른 개혁적 성향이 강하던 시민들은 급격하게 보수화 돼 갔다.
◇내란 정권 만든 마산의 민낯 = 65년 전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친 익권 씨는 한때 민주 성지로 불린 마산이 수구 토착화 온상이 된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마산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에 표를 몰아준 결과는 민주주의 훼손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12.3 내란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젊을 때 진보적 성향을 보이던 우리 세대, 그리고 김영삼을 추종하던 우리 지역 사람들이 3당 합당 후로 많이 달라졌어요. 지금 그들과 인간적으로는 잘 지내고 있지만,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마산지역 국민의힘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들은 12.3 불법 비상계엄에 대해 반성하기는 커녕 옹호를 넘어 동조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번 사태 만해도 지역 정치인들 어느 한 사람도 잘못을 표현하는 사람이 없잖아요. 아쉬울 수밖에 없죠. 보수와 진보, 모두 다 사회에 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런 식으로 가서는 안 돼요. 지역 사람들이 대선이나 총선이나 매 선거 때 정확하게 기준을 잡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해요. 그랬다면 이번 사태는 없었을 거예요.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세울 마인드를 가져야 할 때입니다.”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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