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득표 이승만 40일 만에 물러난 까닭
부정선거 항거 민주주의 구한 마산시민

1960년 3월 19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신문>에 실린 선거에 관한 담화에서, 마산 3.15의거를 "지각없는 사람들이 철없는 어린아이들을 선동하여, 돌질을 하고, 경찰을 습격하고, 방화하여 가옥을 파괴한 난동"으로 규정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당시 나이는 만 84세, 일주일 뒤인 3월 26일이면 만 85세가 되는 해였다. 이때 지각없는 사람들이란 민주당을 가리키고, 철없는 어린아이들이란 시위에 참여한 고등학생을 포함한 청소년들을 의미한다. 경찰을 습격했다는 것은 아마도 잘못된 보고가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내무부 차관은 경찰관 총격은 시위대 공격을 받기 전에 사전 제압을 위해 공세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언론에서 진술했다. 방화하여 가옥을 파괴한 것은 주로 부정선거에 앞장서거나 방조한 경찰서와 파출소, 허윤수 의원과 이용범 의원 집, 서울신문사와 국민회 사옥 등의 조직이나 집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소요나 난동은 아니었던 것이다.

같은 날 경남도경은 3월 15일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경찰이 발사한 총탄은 458발(카빈·권총·기관단총 등)이며, 총기 발사에 관여한 경찰 인원수는 총 59명이라고 발표하였다. 내무부 치안국은 3월 19일 오후에 사망자는 7명이라 발표하였다. 따라서 경찰은 이승만 대통령이 규정한 난동 가담자에 총격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당시 사망자들은 모두 10대 후반 청소년들이었으므로 85세 이승만 대통령의 증손자뻘에 해당하는 나이 또래들이었다. 발사를 명령한 이는 손석래 마산 경찰서장이었고, 3월 16일 이기붕 당시 자유당 부통령 후보이자 당선자가 기자회견에서 언급했듯이 "총은 쏘라고 준 것"임이 틀림없다. 경찰에게 실탄을 지급한 것은 시위대에게 발사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이다. 당시 부정선거는 자유당이 기획하고, 경찰이 앞장서서 부정선거를 도왔고, 반공청년단이 초법적인 폭력으로 공포 분위기를 자아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였고, 장관들을 지휘·감독하는 자리에 있었고, 반공청년단 총재 자리에 있었다. 최인규 내무부 장관은 부정선거 주모자 재판과정에서 1961년 10월 25일 항소이유서를 통해 "한국의 현실적 환경은 3.15 부정선거가 필연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한국은 아직 민주주의를 할 정도로 성숙하지 않았기에 부정선거는 당연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외언론에서 말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찾는 것과 같다'는 평가와 맥을 같이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대표로 있는 조직들이 공개적으로 광범위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했음에도 수치심이나 죄의식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언론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실상 조장하고 방조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3월 16일 오전에 이승만 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951만 2793명의 표를 획득하여 4대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된다고 발표하였다. 즉 전체 유권자의 92%라는 압도적인 표로 당선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4월 26일 사임 성명에서는 국민이 원하다며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발표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92% 득표를 한 대통령이 40일 만에 사임한 상황은 국민의 뜻이 부정선거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40%를 사전 투표하게 하고, 공개투표와 강압투표는 물론 반대자들의 투표를 봉쇄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였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마산의 철없는 아이들이 구해낸 것이다.

/이은진 경남대 명예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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