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를 해결하는 하나의 우주
권력·재력 상징 아닌 삶의 공간

지난여름의 일이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날이었다. 한 해의 더위가 가운데에 이르렀다는 날이었다. 동네 뒷산에 올라가 대나무 두 그루를 쪄왔다. 긴 대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어서 지붕 아래 거미줄을 걷어내고 청소를 할 요량이었다. 대나무 끝에 잔가지를 모아서 빗자루를 만들어서 지붕 아래에 해묵은 거미줄을 걷어냈다. 그 일을 하다가 다락방 창문 근처에 말벌이 집을 지은 것을 발견했다. 그동안 마당과 텃밭을 관리하느라 다락방 쪽을 소홀히 했던 탓이기도 했지만, 말벌이 그 큰 집을 지을 동안에 나의 관심과 시선이 그곳에 닿지 못했던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락의 창문 쪽에 매달린 말벌 집을 떼어내느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말벌 집을 없애고 나니 지붕의 기와 바깥으로 비쭉하게 나와 있는 참새집도 눈에 거슬려서 처마 밑 참새 집을 통째로 들어내었다. 말벌 집과 참새 집을 정리하고 나니 참새는 지붕의 끝에서 망연자실한 채 제 집을 쳐다보고 있고, 말벌들은 다락방 창문에 분주하게 날아들면서 잃어버린 제 집을 찾고 있다. 졸지에 집을 잃어버린 그들의 황망한 심정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락방 창문에 집을 지은 말벌은 집터를 잘못 잡은 탓이고, 처마 아래로 참새집의 흔적이 삐져나온 것은 참새가 집을 제대로 짓지 않은 탓이다. 보기 싫은 참새 집과 말벌 집을 정리하고 나니 막혔던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개운했지만 집을 잃어버린 축들의 입장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내 집을 관리하고자 어쩔 수 없이 참새와 말벌 집을 없앨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의 노고만큼이나 내 집을 관리하는 일도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새 집과 말벌 집은 집터를 잘못 잡았기 때문에 망가지고 말았지만 어떻든 제 스스로 집을 지키지 못한 것은 나와 마찬가지 처지가 된 셈이다.

집은 제 몸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하나의 우주이다. 집은 하늘과 땅과 같은 사람살이의 근원이다. 이 때문에 집은 그 사람의 전부를 드러내는 공간이다. 제 몸에 맞는 옷이 활동을 편하게 하고, 제 규모에 맞는 집이 그 사람의 인품을 돋보이게 한다. 정약용 선생이 살았던 다산초당은 말 그대로 한다면 초가집이었다. 초가집은 다산 선생의 인품에 빗대어 볼 때 가장 잘 어울리는 집이다. 그러나 지금의 다산초당은 그의 인품을 상징하는 초가집이 아니라, 그의 권력을 상징하는 기와집으로 바뀌어 있다. 현대인 관점으로 다산 선생을 상징하는 집을 지었지만 지금의 다산초당은 그의 인품과 어울리지 않는 집이 되고 말았다.

이곳에 내려오면서 내 몸에 맞는 집을 지으려고 했음에도 집을 혼자서 관리하지를 못하고 말벌들이 집을 짓고 참새가 아무렇게 집을 지어서 흉물처럼 만들어놓을 때까지 손길이 닿지 않았다. 이규보는 <이옥설(理屋說)>에서 집을 고치는 일은 몸이 상한 부분을 치료하는 일과 정치가 부패한 것을 다스리는 일과 같은 원리라고 말하고 있다.

집에 제대로 손길이 닿지 않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제 몸에 맞지 않는 집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집은 권력과 재력을 상징하는 공간이 아니라, 제 스스로 손길이 닿아서 쓸고 닦고 관리할 수 있는 삶의 공간이어야 한다. 너나없이 큰 집을 원하고 아방궁을 꿈꾸지만 달팽이가 제 집을 스스로 이고 길을 나서듯이 제 몸에 맞는 집이야말로 참된 와가(蝸家)가 아니겠는가?

/황선열 인문학연구소 문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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