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절적 사고 탓 '하찮은 놀이'로만 인식
다른 학문과 융합해 세계만방에 한류로

국내의 바둑인사 중 최초로 바둑평론가로 불린 이는 고 양동환 선생이 아닐까 한다. 양동환 선생은 한때 명지대 바둑학과에서 '바둑문학'이란 과목을 강의한 적이 있었다. 양동환 선생은 논문 <바둑과 문화>에서 "예술이 '정신활동'의 표현이라면 바둑은 예술이고, '바둑 글'은 문학이다"라고 말했다. 필자 역시 이에 크게 동의하는 바이다. 김성동 소설가의 <국수>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명인>은 바둑을 소재로 한 글이다. 이들은 바둑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바둑 두는 이의 내면을 내밀히 고찰해 그 현상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 또한 우리 옛 선비들의 바둑 시와 고승들의 바둑 시는 시의 품격을 더해주었다. 그러한데도 '바둑 글'이 문학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양동환 선생은 "바둑 시를 바둑문학으로 규정할 수 없다면 전기문학, 기독교문학, 불교문학, 외설문학이니 하는 말도 어불성설이 돼야 한다"고 말하며 "문제는 바둑에 대한 인식에 있다. 하찮은 놀이라는 한국적 고정관념이다"라고 진단했다. 한국적 고정관념이란 무엇일까. 바로 분절적 사고의 개념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어느 한 분야에만 정통하면 전문가로 대우하는 문화를 가졌다. 그러나 한 분야에만 정통하면 되고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정통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운동신경이 좋으면 태권도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도 잘하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데 현대사를 전공했다고 해서 고대사에 대해 깜깜한 사람일까. 우리 사회는 그동안 분절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바둑만 잘 두면 돼"로 사고의 영역을 한정 지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융합과 복합의 시대이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역량이 된다면 컴퓨터도 잘 다룰 수 있고 글도 잘 쓸 수 있어야 한다. 바둑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바둑을 '하찮은 놀이'라 하는 사람들은 바둑에 대한 몰이해로 말미암은 표현인 것이다.

필자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혹시 바둑을 둘 줄 아느냐"고 물으면 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은 "아, 저는 잡기는 모릅니다"였다. 필자가 십수 년간 업으로 삼고 있는 바둑을 '하찮은 놀이'나 '잡기'로 취급당하다니.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필자를 '잡기'나 하는 '잡놈'으로 본다는 뜻으로 해석해 그 사람에 대해 빗장을 걸게 된다. 필자는 바둑을 잡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필시 '잡놈의 사고'로 말미암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기회가 되지 못해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대답 자체가 사고의 문을 열어둔 것이다.

예전에 들은 어느 한일고대사 전공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어느 대중강연에서 그에게 "독도가 어느 나라 영토냐"라는 질문을 하였는데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저는 독도가 전공이 아니어서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장내에 소란이 일어 강연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가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전공 때문이 아니라 역사관의 문제임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 바둑계도 기술(棋術) 외적으로 문학, 역사, 철학, 우주학 등을 융합해 한류의 한 부분으로 세계만방에 알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뜬금없지만 "독도는 우리 땅이다" 총총.

/조용성 경남바둑협회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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