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대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시인 병행 시집 〈칼을…〉 펴내
물감 찍은 후 벗겨내기를 반복 의도하지 않은 형상·질서 표현
"작업하며 몸 속 에너지 태워 사람들 그런 작품 꼭 알아봐"

김해동 작가의 블루진 작품을 처음 본 건 아주 오래전이다. 서양화 전공인 그는 현재 창원대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 작가는 1991년 당시 예인화랑 초대 개인전에서 청바지 이미지 작품을 전시했는데,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 독특한 이미지 때문에 그림 앞에서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청바지 작품을 종종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에서 만나게 됐다. 다시 보았을 때도 누구 작품인지 알아차렸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미술 작품으로만 알던 그를 최근 다시 접한 건 뜻밖에 문학상 수상 소식에서였다. 그는 시인으로서 26회 영랑문학상 작가대상을 받았다. 올해 시집 <칼을 갈아주는 남자>를 펴냈다.

화가이면서 시인인 그가 궁금했다. 화가로서 사상이 시에 얼마나 반영되며, 반대로 시인으로서 시상이 그림에 또 얼마나 녹아들지.

김 작가를 만나 작품 이야기를 듣고자 연락하니 마침 부산에서 전시 중이라고 했다. 작품 설명을 직접 들을 기회라는 생각에 그와 함께 부산으로 향했다. 지난달 '블루진으로부터-불꽃의 이마쥬' 전시를 시작한 지 10일 정도 지났을 때였다.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갤러리 하이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얼핏 다른 사람 작품이 걸렸나 생각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김 작가의 청바지 그림이 아니었다. 어렴풋하지만 추사체 글씨가 가로세로 나란히 적혀 있고, 글씨와 배경이 뒤섞여 군데군데 묘한 이미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 (왼쪽부터)김해동 작가의 작품 '블루진으로부터-03', '블루진으로부터-05', '블루진으로부터-04'.  /김은주 인턴기자 kej@idomin.com
▲ (왼쪽부터)김해동 작가의 작품 '블루진으로부터-03', '블루진으로부터-05', '블루진으로부터-04'. /김은주 인턴기자 kej@idomin.com

작품에 가까이 가니 청바지 이미지가 드러났다. 김 작가는 이렇게 작업한 지 3년 정도 되었다고 설명했다. 전시 팸플릿에는 이렇게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블루진으로부터 시리즈는 블루진이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서체 이미지의 괴이한 요소들을 제스처 드로잉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어디서 본 듯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표상하고자 하는 조형성은 추사 김정희 서체 이미지를 블루진 이미지로 재구성해 새로운 공간 조형과 질서를 표상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추사체의 어떤 매력이 김 작가를 이렇게 빠져들게 했을까. 역시 팸플릿을 통해 계기를 읽을 수 있다.

"추사체는 마음을 격동시키고 눈을 놀라게 하여 이치를 따져본다는 것이 불가하다. 마치 머리를 산발하고 의복을 함부로 걸쳐서 예법으로는 구속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불가와 도가에서 세속을 바로잡고 훌쩍 세속을 벗어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림에는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읽을 수 없는 것은 찍어내고 벗겨 내고 하는 작업 과정에서 많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캔버스에는 의외의 상이 맺힌다. 딱히 그 형상을 의도한 건 아니지만 종일 걸리는 반복 작업을 하다 보면 서서히 인체 이미지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럴 때 작가로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고.

"작업을 하다 보면 밥 먹을 시간 없이 하루 꼬박 걸리는 경우가 예사인데, 작업 형태가 물감이 마르기 전에 벗겨 내고 또 그 위에 찍어내는 일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쉴 수가 없어요."

작업 모습이 상상된다. 그런 작업이면 몸에 살이 붙을 겨를도 없겠다. 그를 만나면 60대 같지 않은 젊은 모습에 놀라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 김 작가가 지난달 19일 부산 '갤러리 하이'에서 작품 '블루진으로부터-12'와 '블루진으로부터-13'을 설명하고 있다. /김은주 인턴기자 kej@
▲ 김 작가가 지난달 19일 부산 '갤러리 하이'에서 작품 '블루진으로부터-12'와 '블루진으로부터-13'을 설명하고 있다. /김은주 인턴기자 kej@

시집 <칼을 갈아주는 남자>에 있는 시를 읽다 보면 미술 작품과 연관성을 찾기 어려웠다. 그는 시와 그림은 별개라고 했다. 다만, 시를 쓰려고 적절한 시어를 찾아내듯 그림 역시 적절한 형상을 찾아내는 과정은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시집 표지 그림은 자신의 작품이다. 그림을 유심히 보면 까만색 문자 사이에 누군가 무엇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드러난다. 글을 쓰는 사람 같기도 하고 시집 제목처럼 칼을 가는 남자 같기도 하다.

그에게 본인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떤 점을 보아야 할지 물었다.

"물감을 매체로 쓸 때에는 유희가 바탕인데, 거기서 뉘앙스가 나와야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꽃 그림과 같은 구체적인 표현에 익숙하다 보니 추상을 어려워하죠. 이런 추상을 감상할 때는 작가의 유희에 빠져드는 게 중요합니다. 작품을 통해 색을 먼저 보고 자주 등장하는 패턴을 읽어내는 거죠. 공간과 여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면 제대로 감상한 게 아닐까 싶네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림 속에서 힘의 강약이 보인다. 한참 들여다보니 그 힘의 강약 속에서 모호했던 어떤 이미지가 점점 두드러지며 하나의 상을 이루게 되고 그런 형상과 함께 곳곳을 산책하게 된다.

그는 이번 전시회 제목에 '불꽃의 이마쥬'라는 표현을 덧붙였다. 작품 속에서는 불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대상에서 무언가를 찾아낸다면 그 또한 희열이겠다 싶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왜 '불꽃'인지 찾아내지 못했다.

"촛불 미학은 내면의 에너지를 태우는 거죠. 작업하면서 내 몸속에 있는 에너지를 태운다고 생각했어요. 관람하는 분이 작품에서 그런 에너지를 느끼기만 하더라도 성공했다고 봅니다.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에너지를 다 태운 작품은 사람들이 알아봅니다. 신기하게도. 팔리는 그림이나 미전 수상작들이 그랬으니까요."

단순히 그림만 대상화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서 작가의 땀을 읽어낼 생각을 왜 못했을까. 작품 감상에서 중요한 지점을 새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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