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참여 정책 수립 당부
활동보조인 제공 시간 연장도

김기수(43·지체장애) 서각작가를 처음 본 건 이달 중순. 장애예술인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에서 그는 마이크를 들었다. 김 작가는 10분도 채 안 되는 발언 시간을 위해 비를 뚫고 2시간여 동안 직접 운전을 해 창원에 왔다. 장애예술인이 이야기를 할 기회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도 없는 현실에서 김 작가는 용기를 냈다.

지난 27일 거창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김 작가는 지난 2017년부터 ㈔경상남도척수장애인협회 거창군지회장을 맡고 있다. "회장직을 맡은 지 5년 차인데도 남들 앞에 서는 게 적응이 안 된다. (웃음) 참석을 안 하려다가 중증장애인으로서 발언을 하면 아무래도 효과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마이크를 든 건 총 세 번. 보통 협회장 하면 남들 앞에서 말할 기회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아무에게나 오는 기회가 아닌가 보다.

김 작가는 후천적 장애인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오토바이 사고로 등뼈를 다쳤다. 2년간을 꼬박 집에만 있었다. 평범한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자괴감과 좌절감이 그를 억눌렸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게 아닌데 집 밖을 나서면 휠체어를 탄 자신만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이는 친동생이다. "형님, 그렇게 있지 말고 면허증을 따. 밖에 나가서 친구도 만나고." 김 작가는 친동생의 말에 액셀과 브레이크를 손으로 조작하는 수동제어 차량을 운전했다. 자동차는 그의 친구가 됐고 지리산, 덕유산, 사천, 통영 등을 수없이 오갔다. 일도 시작했다. 사무직과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 경상남도척수장애인협회 거창군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기수 서각작가.  /김민지 기자
▲ 경상남도척수장애인협회 거창군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기수 서각작가. /김민지 기자

평소 나무에 관심이 많던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바로 서각. 인터넷 검색으로 송문영(65) 서각 작가를 알게 됐고 무작정 함양 작업실에 찾아갔다. "선생님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었고 별다른 말 없이 '다음에 와서 배워라'라고 말씀하셨다."

송 작가는 한국서각협회 고문이며 한국미술협회 서각분과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서각을 배우고 싶다'는 김 씨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휠체어를 탄 김 씨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경사로를 설치하고 문턱을 없앴다. 또 무료로 지식과 경험을 나누었다.

송 작가는 "처음엔 말도 잘 안 하고 그렇더니 점점 더 쾌활해지고 (작품에 대한) 집중력이 대단하더라"며 "살다 보니까 제가 더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왼손으로 단단히 작업대를 지탱하고 오른손으로 칼을 밀고 당겼다. 8~10시간 작업을 했다. 경련이 오면 줄로 두 다리를 단단히 묶고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던 그는 꾸준히 작업하면서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중증장애인 나름대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가 있는데 정신적으로 치유가 많이 됐다. 작업 의뢰가 들어오면 돈도 벌고."

김 작가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좋은 스승을 만났기에 무료로 서각을 배웠고 적게는 몇십만 원, 많게는 몇백만 원 드는 나무도 공짜로 얻었다. 장애인 수급비를 절약해서 재료와 도구를 사고 무언가를 배우는 데 한계가 있다. 미술협회에 가입하려면 몇 년 동안 활동을 한 경력이 있어야 하고 경력을 쌓고자 미술대회에 한 번 출품하면 최소 30만 원이 든다. 실제 장애인 가운데 예술 활동을 하고 싶지만, 경제적 부담감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육체적 부분보다 금전적인 부분이 힘들다. 장애예술인이 재료나 도구를 살 수 있게 일정 금액을 지원하고 소득이 보장될 때까지 기초생활수급권 박탈과 수급비 삭감을 미루면 좋겠다. 또 중증장애인은 무거운 나무나 나무를 다듬는 기계를 옮길 수 없으니 활동보조인 제공 시간을 늘리면 예술 활동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다."

1시간여가량 김 작가와의 대화는 장애예술인을 넉넉히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김 씨는 "건물 준공검사를 받기 전에 당사자들이 확인하는 것처럼 장애예술인 정책도 만들기 전에 당사자의 의견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야 실효성 있는 정책이 나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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