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 경남여성회 결성 선구적 역할…일상 속 차별 없애는 데 중점
이경옥, 직장 내 성차별 철폐 노력…페미니즘 교육·여성의당 창당도

창원시가 2단계 여성 친화 도시로 지정됐다. 세상의 절반이면서도 존재의 가치를 부정당하며 살아온 여성들이 좀 더 존중받는다면 마땅히 사회 전체의 행복지수도 상승할 것이다. 이 즈음에 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목소리를 대변해온 창원지역의 여성운동, 예술, 정치, 교육, 노동 등 분야별로 그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윤은주(수필가·꿈꾸는산호작은도서관장), 김경년(창원도시재생센터 해설사) 두 사람은 구술을 채록하며 11월까지 8회에 걸쳐 연재한다. 기사에 다루지 못하지만 여성의 도시 창원을 만들고자 헌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지역여성계의 대모 이경희 =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의 이경희(74) 대표는 1948년 인천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황해도 출신이었던 부모님은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분들이었다. 평등하게 존중받으며 자라 자의식이 강했는데 결혼은 그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결혼 후 오빠가 떼어준 호적 등본에서부터 내적 갈등이 시작됐다. 자신이 가족의 일원에서 남편의 부속품이 돼 근본을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이 고약했다. 게다가 보수적인 경상도 분위기의 전형이었던 시댁에는 밥상의 서열화가 철저해서 자신이 괄호 밖의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었다. 영어 교사로 근무하며 집안일을 하는데도 이런 사정을 가족들은 헤아려 주지 않았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불평등의 질문을 돌덩이처럼 마음에 매달고 1976년에 엔지니어인 남편을 따라 공단이 막 조성되기 시작한 창원으로 왔다.

암흑기를 보내던 1983년,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전두환 정권 당시 마산에서 고 강원용 목사가 주최하는 크리스찬 아카데미가 열렸다. 지인의 강권에 못 이겨 '하루만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참석한 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게 됐다며 웃는다. 워크숍을 수료하고 자연스럽게 후속 모임이 만들어졌다. 정혜란, 이경숙, 임혜숙, 최경화, 김도애, 이화자, 송향섭 등이 함께한 구성원들이다. 이후 2기 활동가로 이연숙, 최갑순, 김영옥 등이 합류했고 경남여성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 1987년에 만들어졌는데 2년 전에 경남여성회의 전신인 지역여성모임이 시작됐으니 이들이 여성운동계에 얼마나 선구적인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수도권 중심의 노동운동 단체 성격이 강했다면 경남여성회는 여성의 일상생활 속 차별을 없애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고 활동했다.

▲ 이경희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대표.  /윤은주
▲ 이경희 '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함께하는마창진시민모임' 대표. /윤은주
▲ 1997년 창원여성의전화 개소 1주년 기념식에서 이경희(뒷줄 맨 오른쪽) 대표.  /이경희
▲ 1997년 창원여성의전화 개소 1주년 기념식에서 이경희(뒷줄 맨 오른쪽) 대표. /이경희

둥우리 공부방을 만들어 해방촌 아동들을 돌봤고 비료와 농약으로 찌들어가는 농촌을 지키고자 도농공동체 운동을 벌여 오늘의 경남한살림 중추를 놓았다.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한 정혜란이 가정법률상담소를 열었고 고 이경숙이 여성노동자회를 설립하는 등 각자의 관심과 사회의 필요에 따라 단체를 설립해 역할을 했다.

이후 잠시 활동을 쉬며 계명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학습과정에서 주부들이 진입의 어려움이나 심리적 장벽 없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오랜 준비 끝에 창원여성의전화를 출범시켰다. 이후 성폭력 피해 여성을 위해 법률적 지원을 해줄 여성평화를위한변호사모임을 만들고 성폭력상담소도 열었다.

그가 이처럼 창원지역 여성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함께해 준 많은 사람이 있었다. 미국 출신의 버니 수녀는 언제나 실천과 행동에 신의 뜻이 있다고 일깨워 주었다. 창원대 정영애 교수는 기꺼이 창원여성의전화 초대 회장을 수락했고, 부족한 재원으로 전화기 놓을 돈 28만 원이 없을 때 간호사 일을 하던 회원 김연숙이 야간 당직수당을 망설임 없이 기부했다. 이들과 함께했기에 어려우나 외롭지 않은 길이었다.

2004년부터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지원을 위한 요청이 왔는데 여러 단체가 난색을 보여 이마저 맡았다. 2007년 시작해서 법적 대표의 임기는 한참을 지났으나 아직도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어서 여전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40여 년, 여성운동 과정에서 하루도 힘들지 않은 날은 없었지만 지치지 않고 버텨온 힘은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자 하는 열망이었고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몸부림'이었다고 말한다. 그간 여성계의 노력으로 제도적 장치는 어느 정도 마련했지만 일상 깊숙한 곳의 문화적 변화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기에 앞으로는 기층 여성들 중심의 생활 문화 변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고 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마산여성운동사의 산 증인이자 일흔네 살의 현역인 이경희 대표의 전화기는 오늘도 여전히 통화 중이다.

◇이경옥 창원여성살림공동체 대표 = 죽임의 반대인 살림, 소멸이 아니라 생성이요, 새로운 약동의 살아남이다. '창원여성살림공동체'를 이끄는 이경옥(60) 대표는 86세대로 경남여성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경남여성회의 오랜 핵심 구성원으로 창립부터 30여 년을 함께해 왔다. 경남여성단체연합 3대, 6대 상임대표를 역임했고 기존 남성중심 정치판의 지형을 흔들었던 '여성의당' 창당 당시 경남도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아 비례대표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중2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남 3녀 중 언니 둘은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엄마를 도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 역시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남은행에 입사했다. 당시의 직장은 성희롱과 성차별이 만연했고 남녀 임금차별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여자직원은 남자직원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 청소를 했다. 직장 내의 끈질긴 성차별은 그에겐 견딜 수 없는 올가미처럼 답답했다.

고교 졸업 후 3년째 되던 해 경남대학교 야간 법학과에 입학해 법과 현실의 괴리에 관심을 두고 논문을 썼다. 논문에서 가부장적 억압과 차별의 부당, 현실적 법과 헌법의 모순을 논하는 그를 보고 친구가 힘이 될 만한 사람이라며 소개해준 이가 당시 마산MBC의 임나혜숙 프로듀서였다.

▲ 이경옥 창원여성살림공동체 대표.  /윤은주
▲ 이경옥 창원여성살림공동체 대표. /윤은주
▲ 2004년 경남여성정치발전소 개소식에서 발언하는 이경옥(가운데) 대표.  /이경옥
▲ 2004년 경남여성정치발전소 개소식에서 발언하는 이경옥(가운데) 대표. /이경옥

1986년은 경남여성운동의 태동기였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경남여성회 결성 중에 만나서 십시일반으로 북 카페를 설립하고 여성학을 공부했다. 정혜란, 임나혜숙, 최갑순, 최경화 등 선배들과 교류하고 공부하며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사회적 차별, 억압의 부당성과 불합리의 원인을 찾고 당당히 맞섰다. 노동조합 활동도 시작해서 기획부장으로 상근하면서 직장 내 임금차별, 승진문제 등을 제기했고 여직원의 청소 문제도 해결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은행을 퇴직하고 경남여성회 장정임 회장의 제안을 받아서 경남여성회 부설 성폭력상담소장으로 1년간 일하게 됐다. 이후 창원대 대학원 법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경남여성정치발전소를 만들고 2004년부터 2010년까지 경남여성회장을 맡으며, 경남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활동을 했다.

이후 활동은 '밥맛나는부뚜막', '창원여성살림공동체' 등으로 이어졌다. 창원에 여성 인권 단체는 많으나 여성정책을 살펴보고 평가·연구하는 곳이 없다는 생각에 성주류화 정책 모니터링, 페미니즘 공부 소모임, 페미니즘 교육 등으로 여성운동의 지평을 넓혔다. 이런 활동을 거쳐 여성 의제 정당 창당으로 새판 짜기를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경남도당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1주일 만에 회원 1200여 명을 모집하는 저력을 보였다. 기존 여성단체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가 젊은 세대의 참여가 저조하다는 것인데 '여성의당'은 40대 이상 세대와 젊은 세대가 짝을 이뤄 움직이는 구조적인 특징과 뚜렷한 신념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특성이 맞물려 20대 회원이 압도적으로 많이 참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앞으로의 여성운동이 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는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 남성과 차별받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온전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앞으로 여성들의 일자리를 만들고 여성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만드는 데 매진하고 싶은 그는 성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서는 사회구조의 변화가 필수적이라 본다. 이런 변화를 위해 오늘도 여성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일에 애쓰는 이경옥 대표. 그의 꿈이 우리의 꿈이 되고, 성평등한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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