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정말이지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유독 일복이 많아서 그랬을까. 역대 최대 규모의 행사 기획과 운영, 9개월간의 청소 알바, 일주일간의 식당 알바, 행사 단기 알바, 각종 기고와 워크숍, 출강 등…. 책방 살림을 이어가기 위해, 지인의 부탁으로,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그때그때 일의 성격도 난이도도 다 달랐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거절하지 않고 다 했다. 돈이 필요해서기도 했거니와 나의 능력치와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그중에서도 가장 품을 들였던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단연 행사 기획이 아닐까. 9월
박기영(가명·30) 씨는 조선소 사람은 아니지만 조선소가 그를 키웠다. IMF 외환 위기기 때 고비를 넘기지 못한 아버지는 빈털터리로 거제에 들어와 조선소 쇳밥으로 그를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켰다. 섬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조선소였다. 언제 어디서건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 길거리에 나서서 두리번거리면 조선소의 상징인 크레인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버스를 타면 늘 용접 그을음의 탄내가 났다. 철판을 때리는 망치 소리와 크레인 경보음으로 동이 트고 하루가 저물었다. 가사는 잘 모르겠지만 박진감 넘치는 투쟁가요가 귀에 익어 무
나의 하루 일과는 마을 위쪽 수련원에 사는 고양이 밥을 주면서 시작된다. 날이 밝으면 주섬주섬 옷을 입고 수련원으로 간다. 거기엔 일고여덟 마리의 길고양이가 산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수련원인데 지금은 비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수련 활동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이 들끓으니, 길고양이가 모여들어 붙어살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창궐하자 수련원은 문을 닫았고 관리자와 자원봉사자도 떠나버렸다.이후 고양이는 내 차지가 되었다. 그때부터 아침이면 수련원을 찾았다. 밥자리에 올망졸망 모여 앉았다가 마당에 들어서는 내 발끝까지 달려오며 온몸을
사람들은 각자의 개성을 나타내는 방식 중 하나로 패션(fashion)을 선택한다. 그렇기에 본인의 개성과 취향에 맞게 다양한 의류를 구매하게 된다. 청년층은 특히 매일 어떠한 옷을 입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올해 F/W(가을·겨울) 트렌드 아이템'을 다루는 콘텐츠를 소비한 뒤 직접 해당 의류를 구매하거나 유사한 옷을 찾는 등으로 유행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거다. 더불어 처한 상황이나 만나게 되는 이에 따라서 분위기를 달리할 때도 있는데, 청년 세대가 주로 사용하는 패션 신조어인 '꾸꾸', '꾸안꾸', '안
유난히 무더웠던 올해의 여름은 절기상 가을이 시작된 지점이 지나서도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얇은 천과 반소매의 옷을 걸치고 햇빛을 피해 다니기 바빴다. 그러나 며칠 사이에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건 물론, 일교차가 큰 탓에 긴소매 외투를 챙겨 다니곤 한다. 다양한 변화가 우리를 찾아왔지만, 그중에서도 코끝에 닿는 차가워진 공기로 비로소 가을이 찾아왔음을 느끼게 된다. 보통 가을은 선선한 날씨와 따스한 햇볕 덕에 독서의 계절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그렇기에 가을이 왔다는 이유만으로 독서해야 할 것
"베트남 애들 10명 중 한명은 뽕을 한다." "용접할 자리는 안 하고 엉뚱한 데 지지고 이런다. 한 반에 15명 일하면 일하는 사람은 두세 명 밖에 안돼요." "자기들끼리 노조를 만들어서 일 안 할 수도 있어요.”조선소 현장 노동자들이나 업체 사장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거제시의회에 상정된 외국인 노동자 지원 조례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한 시의원이 내뱉은 말이다. 조선소는 경기가 되살아나면서 떠난 이들을 돌아오게 하는 고민보다 손쉽고 값싼 대책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대거 받아들였다. 거제시 거주 외국인은 2023년 7월 기준 9
우리 민박집은 마을 한복판에 있다. 지리산이 앞산처럼 드리워있어 경관은 빼어나지만 주변 환경은 볼품이 없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집이 다 비었다. 노인네 홀로 살다 죽고 도시로 나가 사는 자녀들이 휴가철 한 번쯤 다녀가는 집으로 변했다. 마당은 잡초가 무성하고 폐가처럼 버려져 보기에 흉하다.그럼에도 우리 집은 민박 손님이 꽤 많다. 벌써 시월까지 주말은 예약이 다 찼다. 숙박플랫폼에 가입하지도 않았는데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면 우리 민박집 이야기가 심심찮게 떠돈다고 했다. 특히 아내가 차리는 밥상이 인기를 끈다는 것이다.“아이고,
◇대학생 몸 방치는 나쁜 식습관무더웠던 여름을 각자의 방식대로 지내고 일교차가 큰 가을과 함께 9월을 맞았다. 특히 9월이 됨으로써 대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학업에 집중하는 개강 시즌 또한 다가왔다. 이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보내던 방학과 다르게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 과제를 하고, 여러 강의를 수강하기 위해 강의실을 옮겨 다니는 등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낸다. 바쁜 일상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대학생에게 자연스럽게 생기는 여러 고민이 존재하는데, 좋은 학점을 따내는 것이나 동기들과 완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등이 이에 속한다. 그
◇꿈은 없고요, 생존이 목표입니다때는 바야흐로 2021년 6월 24일. 의 초청을 받아 '남해에서 책방하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 사내교육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남해에 오게 된 이야기, 책방을 운영하고 책을 만들게 된 이야기들을 1시간가량 풀어놓고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당연히 질문하는 사람은 없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한 기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들고는 앞으로의 계획이 뭐냐고 물었다. 새삼 놀랐다. 서점인 셋, 아니 둘만 모여도 암담한 출판업계의 현실에 대해 하소연하기 바쁜 시대에
1987년은 깨어 있는 시민들이 폭압에 맞서 위대한 승리를 이루어 낸 해였다. 시민들이 끌어낸 성과가 정치 모리배들 농간으로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그해 6월은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었다. 쿠데타와 오월의 살육으로 집권한 전두환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자 후환이 두려웠다. 군사정권 유지만이 살길이라 민주 인사를 탄압하고 개헌 논의를 금지하였다. ◇6공화국 탄생과 노동자 대투쟁하지만 덮고 다져도 잉걸불은 꺼지지 않았다. '탁' 치니 '억!'이라 속인 박종철 고문 살인이 드러나고 이어 발표한 호헌 조치는 덮어 누른 불을 달구는 풀무질이 되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연예인 ㄱ 씨의 타인과 연락 시에 보이는 모습에 관하여 많은 이슈가 있었다. 화두가 된 이유로는 ㄱ 씨가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을때에 '안읽씹'(메신저 속 연락을 읽지 않고 무시하는 상태)을 자주 하는 것이다. 연락을 확인하지도 않고 상대를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없는 행동이란 주장에 ㄱ 씨는 "정신없을 때 답장하는 게 싫고, 상대에게 정성을 들여 대답하기 위해 비교적 여유로운 시간대에 보내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러다 보니 답장하는 걸 까먹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고 덧붙였다.해당 영상
2023년 7월 15일.평소와 같은 금요일이었다. (책방보다 바다에 먼저 출근했다는 뜻) 바람이 거세고 파도도 심상치 않아 입수한 지 30분 만에 나오려는데 힘이 센 파도를 만났다. 정신없이 파도에 말리다가 기어코 사고가 났다. 늘 하듯 머리부터 감쌌는데, 딱딱한 서핑 보드가 거센 물길과 함께 내 왼손을 강타했다.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강도의 타격. 순간적으로 망했다는 느낌이 왔다. 곧바로 올라오는 부기와 불타는 듯한 통증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한 손으로 보드를 질질 끌며 해변으로 나와보니 엄지손
소서 지나 대서로 가며 하늘 꼭대기를 지나는 태양은 염소 뿔이 물러빠지고 까막까치 대가리 벗겨지도록 달구어졌다. 춘하추동이 아니라 여름과 겨울 두 계절밖에 없다는 조선소의 여름나기가 깔딱고개를 넘어간다. 조선소에는 봄가을이 없다. 오로지 춥지 않으면 덥다. 그라인더를 잡은 손이 아직 곱아드는데 이마에선 땀 이슬이 송골송골 맺힌다. 햇살은 아직 따가운데 바닷가 된바람은 귀를 발갛게 얼린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대형 환풍기가 태풍급 바람을 비닐 닥트를 통해 쉴 새 없이 불어넣지만, 땡볕에 절절 끓는 철판으로 둘러싸인 유조선 탱커 속에
자유롭게 세상을 유영한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오후 들자마자 도착한 여인네들은 곱상한 외모를 가졌다. 옷은 화려했고 화장도 짙었다. 차에서 내리는데 마당까지 화장품 향기가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 커다란 기타를 등에 멘 여인도 있었다. 얼핏 봐도 세련되어 보이는 도시 여자들이었다. 며칠 전부터 전화를 해대며 오늘을 기다린다고 호들갑을 떨던 민박 손님이었다."아유, 사장님. 사장님이 쓴 책을 읽어보고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어쩜 그렇게 재미나게 사시는지 직접 만나보고 싶더라고요. 술도 좋아한다기에 몇 병 챙겼어요. 알고 보
"아침에 일어나서 잠에 들 때까지 휴대전화를 계속해서 사용하게 된다. 급한 일정이 없다면 잠에서 깬 상태 그대로 하루 종일 휴대전화를 붙잡고 있기도 한다."강민지(22·대학생) 씨의 하루는 휴대전화 알람을 끄는 것으로 시작된다. 알람을 끈 이후에는 전날 받은 메신저를 확인하고, 자연스레 SNS 서핑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휴대전화 속 세상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3~4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만다. 강 씨의 일상이 마치 극심한 휴대전화 중독자의 모습으로 보일 수는 있으나, 잠시 확인하려 켰던 휴대전화에
장애인, 이 말에는 수많은 함의가 있다. 그들은 평생 차별과 동정, 혹은 냉소의 시선을 받고 영혼이 불편한 몸에 갇히는 답답함을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는 불공평이 삶의 본질이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냉혹하고 가차 없이 다가온 장애를 삶의 본질로 수용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듯하다.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시각장애인은 대부분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점자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이것이 비장애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매
5시에 맞춘 알람이 베개로 막은 귀를 파고든다. 겨울이면 캄캄할 시각인데 창문이 희붐하다. 맞은편 아파트에도 불들이 하나둘씩 켜진다. 남편이 함께 출근하고 아이들 등교까지 챙기던 몇 년 전에 비하면 조금 여유로운 편이지만 아침은 여전히 분주하다. 피곤함에 지쳐 미룬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 종일 나만 기다리며 지낼 강아지들 챙겨 주고 집을 나선다. ◇14년차 베테랑 용접사가 되기까지골리앗 크레인이 빤히 보이는 거리지만 운동 삼아 일부러 20분 정도 둘러서 간다. 출입문으로 들어가는 난간 귀퉁이에 빛바랜 종이가 반쯤 찢어진 채 붙어 있다
"쟤는 왜 하루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있는 거야?"훈이 아빠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방문을 향했다. 곁에 선 훈이 엄마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남편의 옆구리를 끌어당겼다."아 좀 조용히 해줘. 그냥 쉬고 싶다잖아.""그래도 그렇지. 가족여행을 왔으면 함께 산책도 나가고 해야지."목소리는 죽였지만 여전히 불만 섞인 목소리였다.훈이는 초등학생일 때부터 우리 집 단골 민박손님이었다. 그때는 밖에서만 놀았다. 특히 고양이와 강아지를 좋아해 마당가 길고양이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여름이면 매미채를 휘두르며 놀았고, 겨울이면 비료포대 눈썰매
대학생의 스마트폰 속 필수 애플리케이션은 아무래도 '에브리타임(이하 에타)'일 것이다. 대학에 소속된 이에게만 이용이 허가된 덕에 막 대학을 입학한 신입생에게 에타를 설치하는 일은 비로소 대학생임을 인정받는 의식과도 같다. 대학생은 주로 이곳에서 대학 생활 정보나 실생활에 유용한 팁을 습득한다. 그리고 친구를 실제로 오프라인에서 사귀지 않아도, 혹은 직접 물어보기 힘들었던 질문을 많은 사람에게 내던질 수 있으니 유용하다. 그러나 최근 대학생 사이에서는 에타가 '필수' 앱이었지만 시험 기간 등의 특정 시기를 제외하고 애플리케이션 사용
지난 4월 30일 저녁 3.15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린 소프라노 조현지 귀국 독창회는 2부에 걸쳐 슈만과 드뷔시, 베르디, 모차르트 등 유수의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꾸며져서 오랜 시간 이탈리아에서 배운 기량을 마음껏 펼쳤다. 젊은 성악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른 맑은 고음의 아름다운 음악은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았다.모든 무대가 끝나고 관객의 앙코르 요청에 그가 답한 곡은 뜻밖에 우리에게 익숙한 팝송 'mother of mine'이었다. 맑고 청아한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하자 객석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무대를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