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전당포 상인에 자만하고 뽐내다 당한 치욕, 신분 구별짓지 않는 계기로

◇걷는다는 것은 곧 장애물을 만난다는 것

요하를 건넜다. 심양에서 신민시로 가는 길목의 흥릉보진에서다. 동서로 나뉘어서 하강하다가 랴오닝성에 들어와서 비로소 하나로 합쳐진다. 더 내려와 강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혼하와 합쳐져서 발해만으로 접어든다. 이 강이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기점이 된다. 흥릉보진은 요동의 끝자락이 되고 신민시는 요서의 시작이 된다.

건넌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연암이 돼 보지 않고서 건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을까? 나는 오늘도 강이 있었는지, 건넜었는지조차 모르게 초겨울의 성근 요하를 그냥 지나칠 뻔하였다.

연행 내내 연암을 괴롭힌 것은 강이다. 굳이 강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실개천조차 물이 불으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통원보진에서 만난 초하는 사실 현재의 규모로 보면 하나의 시냇물 남짓하다. 그러나 범람할 때는 다르다. 오히려 좁은 협곡에서 노도처럼 밀려드는 물살은 더 거세서 쉽게 보다가는 휩쓸려 내려갈 수 있다. 사행단은 통원보진에서 범람한 초하를 건너기 위해 엿새나 할 일 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연암은 요하를 어떻게 건넜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다. 아마도 시종들이 멘 가마를 타고 건넜을 것이다. 목숨을 건 시종들에 대해서는 연암도 세밀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마상수면(馬上睡眠)으로 낙타행렬 장관을 놓치고

▲ 연암이 마상수면 상태로 건넜을 심양 외곽 영안촌의 영안교. 청태종 홍타이지 재위 시절인 숭득 6년 1641년 건립된 석교다. /조문환 시민기자
▲ 연암이 마상수면 상태로 건넜을 심양 외곽 영안촌의 영안교. 청태종 홍타이지 재위 시절인 숭득 6년 1641년 건립된 석교다. /조문환 시민기자

심양에서 일자무식꾼이 포함된 상인들과 꼬박 이틀 밤 동안 필담을 나눈 연암은 야반도주로 친구가 된 심양 사람들의 배웅 소리가 채 가시기 전에 졸음이 밀려왔다. 아예 마부 창대에게 말고삐를 맡기고 시종 장복이와 창대더러 부축하게 하고서는 잠에 곯아떨어졌다.

말 위에서 고개를 숙이고 잠자는 연암을 상상해 보시라. 아마도 창대와 장복은 말안장에 앉아 춤추듯 머리를 출렁이는 그들의 상전을 보면서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을까.

연암이 잠든 사이에 몽골 상인들이 낙타를 몰고 지나갔지만, 시종들은 연암이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낙타를 보여주지 않았다. 깨우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들은 천둥 치듯 하는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 연암을 큰 소리로 불러도 깨어나지 않았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말고삐조차 잡을 수 없을 만큼 잠에 빠진 상전의 모습이 애처롭기도 했겠지만, 그들이 고생하는 만큼 상전도 손해를 감수해 봐야 한다는 시종들의 장난기 섞인 행동이 눈에 선하다. 그 상전에 그 시종들이라니.

◇흙 한 점 묻지 않고 걸었던 200리 진흙탕 길

심양의 외곽에 있는 영안촌(永安村)은 고즈넉한 시골 동네다. 어제 내린 늦가을 비로 길은 젖어 동네 골목길은 진흙탕 길이 됐다. 골목길을 들어서면 내 발은 마치 얼음 위에 있는 것처럼 중심을 잃게 했다. 자칫 이 낯선 타국에서 몰골이 말이 아닌 모습으로 길거리를 헤매고 다닐 수 있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요동과 요서를 잇는 흥릉보진 국도 304호, 미루나무 가로수길 끝이 하나의 점으로 자리 잡는다. /조문환 시민기자
▲ 요동과 요서를 잇는 흥릉보진 국도 304호, 미루나무 가로수길 끝이 하나의 점으로 자리 잡는다. /조문환 시민기자

고대로부터 영안교에서 고가포까지 200리 길은 진흙탕 구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안교에서부터는 아예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 다녔다는 기록도 있다. 연암은 200리나 펼쳐져 있는 이 나무다리가 고가포까지 먹줄로 튕긴 듯 정교함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홍대용이나 먼저 중국을 다녀왔던 친구들로부터 청나라의 선진문물에 대해 익히 듣긴 했으나 이 정도일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연암이었다. 청나라의 관문인 책문에서부터 한 수 기가 죽었던 연암은 진흙탕을 흙 한 점 묻지 않고 건널 수 있는 이 탁월한 문물에 할 말을 잃는다.

◇미루나무 그림자는 요동과 요서를 잇고

요하를 건너면 지금의 신민시다. 당시는 신민둔이었다. 신민시로 가는 노정의 도로 좌우에는 벌판이 끝도 없다. 사방팔방이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다. 그 끝도 없는 벌판에 자작나무 계통의 미루나무 길이 끝도 없이 뻗어 있다. 이들 가로수 덕분에 도로가 한 폭의 수채화 바탕으로 빨려 들어가 있는 듯했다.

신민역에 내려 중국의 소도시에서 볼 수 있는 붉은 색 계통의 삼륜 자동차에 몸을 싣고 다시 흥릉보진으로 가는 이 거리를 돌아보았다. 연암이 지날 때도 이 거리는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길은 국도 304호선이다. 단풍이 물들어 노란 물결이 하늘 한가운데 넘실거린다. 하늘과 땅이 맞닿듯 길이 맞닿아 보이는 곳은 하나의 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다시 요서 벌판에서 지는 해를 바라본다. 태양은 요서와 요하 사이에 걸쳐 있다. 요서 끄트머리에 늘어서 있는 미루나무에 비친 태양은 길게 늘어져 요동의 끝자락 흥릉보진에 드리워져 있다. 요동과 요서가 그림자로 이어져 늘어선 이날 나는 두 벌판을 저녁이 될 때 까지 헤매고 다녔다.

◇조선 일류천재 청나라 상인들에게 한 방 먹다

신민시에 도착하고서는 나도 모르게 내 눈이 전당포를 찾아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연암은 전당포 구경을 하러 갔다가 주련을 써주게 되는데 그 글씨를 알아본 주인장은 아예 전당포 현판에 붙일 글귀를 써 달라고 조른다. 한껏 기분이 '업'된 연암은 사행길에 눈에 자주 익었던 '期霜賽雪(기상새설)'이라는 글자를 정성을 모아 일필휘지로 쓴다. '심지가 깨끗하기는 가는 서릿발 같고 밝기로는 흰 눈보다 더하다'는 뜻인데 이왕 칭찬을 받은 참에 이들의 마음을 한껏 고양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이내 싸늘해졌다. '의미 있는 글귀를 이처럼 멋 떨어지게 써 줄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들의 표정은 무엇이냐!' 연암은 상인들이 무식해서 글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이튿날 소흑산에서 또다시 붓을 쥘 기회를 잡은 연암은 어제의 그 치욕스러운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장소는 부인들의 장식용품을 파는 점포인 만취당(晩翠堂)이다. 내친김에 '期霜賽雪'을 다시 휘갈겼다. 그러나 분위기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연암이 무식꾼으로 생각했던 상인들의 표정에서였다.

'우리 가게는 부인들의 장식품을 파는 가게지 국숫집이 아닙니다'라는 말에 연암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이 어색하고 몸 둘 바 모를 분위기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러나 위기일발의 순간을 무사히 넘긴 것은 연암의 탁월한 기지 때문이었다. "나야 잘 아는 바지만 그냥 시험 삼아 한 번 써 본 것이라오"하면서. 결국, 요양에서 본 간판에 착안하여 '부가당(富堂)'을 써 주어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시켜 버렸다. 천하의 연암이 자칫 청나라 상인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상황에 빠질 뻔했다. 부가당은 '닭이 울자 장식을 갖춘다'는 뜻의 계명부가(鷄鳴富)라는 말에서 연암이 민첩하게 차용해 온 문구였다.

▲ 신민둔 서민아파트 거리, 저기 어디쯤 연암은 기상새설(期霜賽雪)을 써 놓고 목에 힘 좀 주었을 것이다. /조문환 시민기자<br>
▲ 신민둔 서민아파트 거리, 저기 어디쯤 연암은 기상새설(期霜賽雪)을 써 놓고 목에 힘 좀 주었을 것이다. /조문환 시민기자

◇전당포는 전당포에 어울리게 국숫집은 국숫집에 어울리게

좋은 글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다 좋은 글은 아닐 수 있다. 기상새설이라는 말은 모두에게 득이 될 수 있는 경구이기는 하지만 전당포라는 이 특이한 상황에서는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가지게 만드는 말일 수 있다. 매일 바라봐야만 하는 현판의 글귀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지는 않아야 하는 것쯤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연암조차 기상새설이라는 말을 연행길에서 눈여겨봤던 것일 뿐 어느 상황에 써야 할지를 몰랐다. 연암이 이 글귀를 본 곳은 바로 국숫집이었다. 국수 가락이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뜻이었다.

정작 신민둔 전당포 상인들은 그런 겉으로 드러난 미사여구에 손뼉 치지 않았다. 떳떳하게 그것은 국숫집에나 쓸 문구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그러기에 연암은 심양에서 장사패들과 이틀 밤을 꼬박 필담을 나눌 수 있었고 한양에서도 그는 저잣거리에서 세상에서 존대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놀았다. 신분의 차이가 사람의 양심이나 가치나 판단력까지 구별 짓지는 않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 가슴에서 손과 발까지의 거리는 천 리도 더 되는 멀고 먼 거리다. 기상새설에서 부가당까지의 거리는 연암의 3000리 여정보다 더 먼 거리였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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