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땅 기름지게 만든 농민들, 일본 공출로 가난 지속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아마도 이 시를 가락으로 흥얼거리는 사람이라면 중년일 듯싶다. '소학교'까지는 아니어도 '국민학교' 시절의 사람일 터이니 말이다. '국민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려 국민학교 출신들에게는 노래로 더 유명한 이 시는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이다. 화자가 엄마와 누나와 살고 싶은 곳은 '강변'이다. 집 앞에는, 멀리 뵈는 산 너머의 너머너머 골짜기로부터 내린 물에 실려 온 모래가 너르게 펼치어 밭이 되어 있고, 집 뒤에는, 갈잎이 바람을 따라 이랑을 내며 누웠다 일어서며 서로 부딪어 갈잎의 소리 내는 그런 강변이다. 노래를 흥얼거릴 때면 머릿속 풍경을 펜이나 붓으로 그려낼 재주가 없는 것이 매양 아쉽다.

금빛 모래와 갈밭 사이의 마을 풍경은 머릿속에서는 좋은데 실제로 살기는 어땠을까? 모래밭이 있으려면 강의 중·하류이거나 강이 굽이도는 곳일 터이다. 갈대는 늪이나 강가와 같이 물이 흥건한 데 널리 자생한다. 물이 굽이도는 곳과 물이 흥건한 강의 중·하류에서 엄마, 누나는 정말 살고 싶었을까?

◇모래밭이었던 황산공원

700리 낙동강이 바다 쪽으로 마지막 굽이를 돌며 모래를 많이 쌓았다. 지금의 황산공원에 있던 옛 마을 이름의 하나가 '모랫등'이었다. '등'은 땅 모양이 물길 따라 수시로 변하여 획정하기 힘든 곳에 지번(地番)을 대신해 붙인 접미사이다. 비가 올 때마다 땅 모양이 달라지는 곳에 사는 이들의 생활이란 게 고단하리라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 곳에서도 동심은 해맑았다. 물금의 50~60대 이상의 토박이들은 종종 얘기한다. 당신들 어린 시절엔 물금에서 김해 대동까지 헤엄쳐 강을 건넜다고. 수영을 잘하거나 체력이 아주 좋아야 할 듯하여 놀라 반문하면 토박이들은 대단치 않은 양 얘기한다.

"강 중간까지 모래가 쌓여 발에 닿았다 아이가. 절반 걸어가고 절반 헤엄쳤지."

물금역 뒤편의 낙동강 둔치에 조성된 황산공원은 그 예전엔 모래밭이었다. 모래밭에서는 주로 감자를 키웠다. 감자는 어디에서도 잘 자랐고 특히 모래밭에서는 더 잘 자랐다.

강만 달랐던 게 아니었다. 들녘도 달랐다. 지금은, 뵈는 끝과 끝이 모두 아파트이지만 그전에는 논밭이었고, 또 그 이전에는 갈밭이었다. 물금 땅의 이력을, 양산이 외가이고 처가인 요산 김정한 소설 <수라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위 합방 이후 낙동강 연안 일대의 그 질펀한 갈밭들이 모조리 동척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이내 그들의 논밭이 되어가는……."-김정한, <수라도> 중에서

<수라도>에서 말한 '낙동강 연안'이 물금이고, '그 질펀한 갈밭'이 메깃들로 불리는 곳이다. 메기가 비 냄새만 맡아도 홍수가 진다 하여 메깃들이라 했으니 '질펀한 갈밭'이란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을 듯하다.

어쩌면, 감자로 연명해야 하고 수시로 물이 드는 강변은, 김소월의 바람과 다르게 엄마와 누나는 살고 싶은 곳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 양산 낙동강 둔치 갈대. /이헌수 시민기자
▲ 양산 낙동강 둔치 갈대. /이헌수 시민기자

◇갈밭인 메깃들에서 물금평야로

1922년 3월 31일 양산수리조합을 창설하고 양산천 개수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1926년에 지금의 양산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공사로 1225정보(1정보=3000평)의 농지가 새로 생긴다. 그중 물금에만 724정보의 농지가 새로 생겼다. 724정보는 축구장 987개에 이르는 넓이이다. 갈밭이었던 메깃들이 번듯한 물금평야가 된 것이다.

모든 농사가 그렇지만 특히 쌀농사는 물이 중요하다. 메깃들로 퍼져 흘러버리는 물로는 논농사를 지을 수 없다. 이 물이 물금평야 전역에 고르게 소용될 수 있게 흘려보내려고 새로 배수로를 만들었다. 물금평야 북서측 배수로도 그중의 하나이고, 이 배수로가 지금의 새들천이다. 물꼬와 둠벙으로 농사짓던 땅에 근대적 관개수로 새들천이 만들어지면서 메깃들은 쌀을 생산하는 농지인 물금평야가 될 수 있었다. 굳이 단계적으로 말하자면, 중세적인 들녘 메깃들이 근대적인 들녘 물금평야로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새로 만들어진 농지로 양산은 부유해졌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근대적 변화는 수탈을 전제한 것이지 민중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항구에는 일본으로 공출되는 '일흑삼백'이 가득했다. 김, 소금, 목화, 쌀 네 가지를 이렇게 불렀다. 일제는 자기네들의 필요에 맞게 조선의 농작물을 단일화했다. 양산에서는 주로 목화와 쌀이 공출 대상이었다. 자갈밭에서도 잘 자라는 목화는 오봉산 자락에 심겼고, 새로 생긴 들녘, 물금평야에서는 뼈를 재배했다. 목화와 쌀은 물금역을 통해 실려 나갔다.

뭉쳐야 산다! 양산 농민들은 살고자 양산농민조합으로 뭉쳤다. 1932년 농민들의 결사를 일제의 경찰은 불법으로 몰았고, 농민조합 간부를 검속하면서 결국 와해시켰다(양산농민조합 양산경찰서 습격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농민의 생활은 물꼬와 둠벙으로 짓던 농사보다 나아지지 못했다.

◇시간과 서사의 길 새들천을 걷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은 해였다. 오랜 장마 끝에 불어닥친 두 개의 태풍은 곳곳에 생채기를 남겼다. 여름 끝자락에 심었던 열무는 물에 녹아 한 포기도 수확하지 못했다. 물론 나의 게으름이 첫 번째 까닭이지만 핑계 삼는 게 유난히 오래도록 내린 비다. 아무튼 지나고 보면 안다. 절기를 이기는 게 없다는 것을. 처서를 지나면서 밤 공기가 선선해지기 시작하더니 추분이 되어서는 하늘이 높고 파랗다.

오랜만에 길을 나섰다. 워터파크에서 새들천을 따라 걷기로 한다. 민첩함과 상당히 먼 나의 걸음으로도 두어 시간이면 충분하다. 내가 사는 곳을 바퀴가 아닌 발을 직접 디뎌 보면 종종 감회가 다르다.

양산역에서 워터파크로 가기 위해 새들교를 건넌다. 새들교, 새들천. 참 정직한 이름들이다. 새로 생긴 들녘으로 가는 다리이니 새들교이고, 새로 생긴 들녘에 생긴 하천이니 새들천이다. 새들교 위에서 교리보와 수문을 눈여겨본다. 오봉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도시의 외곽순환도로처럼 들녘을 돌아 교동에까지 와서야 양산천으로 합수한다. 멀리 돌고 더디게 흘러야 소용이 많다. 물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교리보(洑)에는 항상 왜가리가 주인인 듯 서 있다. 보(洑)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수리 시설이다. 교리보는 수리 시설의 역할뿐만 아니라 바닷물이 더 거슬러 오르는 것을 막는 보(堡)이기도 했다.

1987년 낙동강하구언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바닷물은 양산천 갯목을 지나 새들교 아래에까지 올라왔다 하니, 교리보는 '보(堡)'이기도 해야겠구나 싶다. 왜가리를 보며 문득, 새가 있는 들녘이어서 '새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들교를 넘어서면 워터파크이다. 양산천과 새들천이 만나는 삼각지이니 '워터(water)'가 많을 터이고, 시민의 쉼터이니 '공원(park)'은 분명한데, 이 둘을 합쳐서 '워터파크', 틀린 데는 하나도 없는데 나는 자꾸 생뚱맞다 싶다. 영어 표현 때문일 수도 있을 터이고, 상업적인 놀이공원 이름 같다는 편견, 공간의 이름엔 역사성이 있어야 한다는 취향 때문일 수도 있을 터이다. 이름에 서사성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 공원 이름이 '새들공원'이 돼야 하나 등의 꼬리 잡는 생각들을 달고 워터파크에서 새들천으로 내려섰다.

양산에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농업배수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새들천을 어찌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복개하는 방안에서부터 2층 구조의 하천 아이디어까지 분분하다가 지금과 같은 자연하천으로 재정비됐다. 종종 깨끗하지 않은 물 때문에 민원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양산의 근대 농업을 가로질렀던 하천임을 생각하면 복개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다.

시간을 걷는 마음으로 새들천을 따라 걷는다. 양산에 잔존하는 몇 안 되는 근대 공간이란 것도 시간을 생각하게 하고, 메깃들이 물금평야로 변하는 서사의 장면에서도 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게다가 새들천 둑 위의 길이 조선의 옛길인 황산길이었던 것까지 생각하면 새들천을 따라 걷는 길을 시간의 길, 서사의 길이라 명명해도 괜찮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오늘은 유난히 하늘이 파랗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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