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심 담은 내용 하늘 감동해 길 열어줘
조선 후기 박신윤 이야기 얽힌 조갈내
우곡각자·운암서원·우곡로 등 흔적 남아

코로나19 확산이 최근 들어 주춤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놓고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가거나 취재원을 만나 인터뷰 일정을 잡기 쉽지 않습니다. 경남의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와 전수조교 등을 만나 그들의 활동을 직접 들어보고자 기획했던 '얼쑤절쑤 경남 무형문화' 기획 기사도 코로나19 여파로 인터뷰 일정을 잡지 못해 당분간 연기되었습니다.

대신 경남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옛날이야기, 즉 전설을 들춰보고 그 전설이 얽힌 현장으로 찾아가 보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취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의외로 내가 사는 곳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나 싶은 전설이 많더군요. 솔직히 전설이란 게 처음부터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때에 누군가의 사연이 얽히면서 만들어진 거잖아요? 그렇게 본다면, 지금도 우리 동네 오래된 당산나무나 늪지, 뒷산 바위에 얽힌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 싶어요. 하여튼 호랑이가 사람 말을 다 하던 시절부터 우리 지역에 스며있는 이야기들을 만나러 가 봅니다.

▲ 전설 속에서 조갈내로 불린 하천. 현재 '하남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지금은 관개공사가 이루어져 이야기에서처럼 물이 갑자기 불어나거나 마르거나 하지 않는다. /정현수 기자
▲ 전설 속에서 조갈내로 불린 하천. 현재 '하남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지금은 관개공사가 이루어져 이야기에서처럼 물이 갑자기 불어나거나 마르거나 하지 않는다. /정현수 기자

◇박신윤과 명곡동 조갈내

<창원의 전설>(1987)이란 책에 현재 명곡동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남천인 '조갈내'라는 하천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사화동 박씨 문중에 우곡 선생이란 분이 있었다. 이 분은 어려서 집안이 가난한 중에서도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선생이 젊었을 때 명곡 마을의 서재 낙성연(落成宴)에 고을의 사우들과 초대되어 갔다. 모든 사람이 맛있게 음식을 먹고 있는데 홀로 우곡 선생만이 수저를 들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우곡 선생이 누구냐면 조선 후기 효행과 학문이 깊은 박신윤이란 선비랍니다. 창원에 사는 많은 밀양 박씨의 선조이지요. 이 선비를 기리는 서원이 의창구 사화동에 있답니다. '운암서원'입니다. 1702년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1844년 서원으로 승격되었지요. 하지만 187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허물어졌다가 2004년 창원시와 박씨 문중의 노력으로 현재 위치에 복원되었지요. 전설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볼까요.

▲ 명서동과 사화동 사이 등명산에 있는 10평 남짓한 바위. 가운데 음각으로 '愚谷(우곡)'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현수 기자
▲ 명서동과 사화동 사이 등명산에 있는 10평 남짓한 바위. 가운데 음각으로 '愚谷(우곡)'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현수 기자

"이를 이상히 여긴 훈장이 그 이유를 물으니 병석에 누워 있는 노모 걱정으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감동한 훈장이 그의 효성을 크게 칭찬하고 연회가 끝난 후 집에 가져갈 음식을 따로 마련해 두었음을 말하자 그제야 선생은 음식을 들었다고 한다."

착한 사람에겐 복이 있나니~ 그게 통했을까요. 우곡 선생은 어머니께 드릴 음식을 싸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비가 내립니다. 그 때문에 냇물이 넘쳐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선생은 이러한 상황을 애통해하면서 글을 쓰지요. '하늘이 나의 불효를 꾸짖어 벌을 주는구나!' 이렇게 써서 물에 띄웠는데 희한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갑자기 물이 빠지고 징검다리가 나타난 겁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하천을 '빨리 마른다' 해서 조갈내(早葛川)라고 했답니다.

박신윤 선비의 호인 '우곡(愚谷)'이란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명서동과 사화동 사이에 있는 등명산에 있습니다. 길이 없어 찾기 쉽진 않습니다. 이를 '우곡각자'라고 그러지요. 위성지도로 보면 수자원공사 팔룡동 취수장에서 동북쪽 20m 떨어진 곳에 있어요. 그리고 '우곡'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길도 있지요. 등명산 아래 명서동 안쪽 길이 '우곡로'입니다.

<창원향토문화백과>에 보면 이런 내용이 보입니다. "등명산 흰 바윗돌 아래/ 예부터 이름 없는 골짜기 있었네/ 홀연히 어리석은 사람 살게 되어/ 이로부터 우곡이라 부르게 되었네(登山白石下 古有無名谷 忽爲愚者居 是以名愚谷)".

▲ 사화동에 있는 밀양 박씨 문중의 운암서원(雲巖書院). 이 서원은 전설의 주인공 우곡 박신윤 선비의 효행과 학문을 기리고자 세워졌다.  /정현수 기자
▲ 사화동에 있는 밀양 박씨 문중의 운암서원(雲巖書院). 이 서원은 전설의 주인공 우곡 박신윤 선비의 효행과 학문을 기리고자 세워졌다. /정현수 기자

◇정렬부인과 진전면 시락마을 암굴

2011년에 나온 <마산시사> 제2권 190쪽에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이 책이 만들어지기 전 <우리 고장 마산>이나 <내 고장의 전통> 이런 책에도 실렸습니다. 이 전설은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습니다. 읽다 보면 장면이 영화 같기도 합니다.

"옛날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어떤 젊은 부부가 난을 피해 이 암굴에 와서 숨어 지냈다. 때는 마침, 해상의 도처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승전고가 한참 드높던 무렵이었다. 도망치던 왜적의 배 한 척이 때마침 이 근방을 지나가다가 문득 암굴 속의 인기척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대번에 암굴을 수색하여 젊은 부부를 끌어낸 다음, 남자는 그 자리에서 무참하게 베어 죽이고 기절한 부인을 배에 싣고 달아났다. 얼마 후에 부인이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자신은 적병들에 의해 사지가 결박되어 있었다."

▲ 전설 속 부부가 살았다는 창원시 진전면 시락마을 전경. /정현수 기자
▲ 전설 속 부부가 살았다는 창원시 진전면 시락마을 전경. /정현수 기자

이 암굴이라는 곳이 자료에 보면 '진전면 시락 낙동초등학교에서 동쪽으로 약 2㎞ 떨어진 해안의 절벽 밑에 암굴이 하나 있으니 이름하여 시락암굴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낙동초등학교는 현재 창원환경체험교육장입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2㎞. 회진로를 따라가면 소포마을이나 동진교쯤이 됩니다. 조금 더 멀리 가면 창포리 동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역까지 돌아볼 수 있겠습니다.

해안을 모두 둘러보았는데 암굴은 없었습니다. 암굴이 있었다는 전설을 믿는다 해도 해안도로를 내면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절벽 아래에 있다 했으니 말이죠. 대신 동진교에서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절벽 아래에서 자그마한 바위 동굴을 발견하고 전설 속의 상황을 다시 상상해 봅니다.

"그날 밤 부인은 힘에 지쳐서 쓰러진 채로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비몽사몽 간에 뱃전에서 남편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깨어보니 꿈이었다. 옆을 둘러보니 왜적들은 모두 곯아떨어져 자고 있었다. (…) 부인은 앉은자리의 배 밑바닥을 장도로 파기 시작하였다. (…) 멀리 수평선 위에서 먼동이 밝아오고 있었다. 부인은 이때 마지막 남은 구멍 하나를 뚫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였으니 (…) 드디어 그 구멍으로부터 줄기찬 바닷물이 펑펑 차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 시락마을엔 아직도 돌담과 흙벽으로 된 집들이 많이 있다. /정현수 기자
▲ 시락마을엔 아직도 돌담과 흙벽으로 된 집들이 많이 있다. /정현수 기자

전쟁으로 지쳤던 왜군들은 뒤늦게 깨어나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모두 배와 함께 수장되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은 많은 역사와 전설을 품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오랫동안의 고통을 통쾌하게 복수하는 이야기로 달랬던 것이지요. 진전면 시락마을은 평화롭게 보였습니다. 어쩌다 한 번 들르는 일이 있다면 정렬부인 이야기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 시락마을 언덕에서 바라본 시락마을 앞바다 전경./정현수 기자
▲ 시락마을 언덕에서 바라본 시락마을 앞바다 전경./정현수 기자
▲ 시락마을에서 동쪽으로 3㎞ 지점 해안에 있는 작은 암굴. 전설에 등장하는 암굴에 비하면규모가 아주 작은, 영화 같은 장면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장소다. <br /><br /> /정현수 기자
▲ 시락마을에서 동쪽으로 3㎞ 지점 해안에 있는 작은 암굴. 전설에 등장하는 암굴에 비하면규모가 아주 작은, 영화 같은 장면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장소다.
/정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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