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꾼 후원 외조부 영향 12살 때 광대 따라 가출 후 전국 유랑하며 가무 익혀
'예인 푸대접' 세태 맞서 권리 찾기 투쟁…"조선 마술 '얼른' 복원과 농악 세계유산화에 보람"

김선옥(70) 선생은 여섯 살 때 풍물과 인연을 맺었다. 진주에서 여관을 운영하며 이름난 쇠꾼들을 후원하던 외할아버지(강두금) 영향이 컸다. 외할아버지는 솟대쟁이패에게 공간을 제공했고 돈을 들여 공연이나 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자연스레 농악판에서 무동을 탔고 농악기를 보관해놓은 여관방에서 혼자 상모와 놀았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인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풍물을 배웠다. 진주농악 황일백 선생에게 쇠가락을, 조판조 선생에게 소고놀이를, 윤판옥 선생에게 열두발 상모를 배웠다. 삼천포농악 문백윤 선생에게 꽹과리와 소고놀이를 사사했다. 외할아버지 덕에 일찍이 예능교육을 받은 셈이다.

-10대에 가출해 호남여성농악단에 가입했다고 들었습니다.

"12살이 될 무렵 농악공연을 반대하는 외삼촌을 피해 광대 따라 나섰지요. 메구 치는 게 너무 좋아서 뒤도 안 돌아보고 갔죠. 집에 얘기하면 당연히 못가게 할 거고. 돈은 못 벌었지만 어린 나이에 여기저기 다니며 공연하는 게 좋았지요."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요.

"결혼해 살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30대 초중반쯤 됐나? 당시 스승들도 돌아가시고 살길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상모, 악기, 의상을 다 불태워 버렸지요. 농악과 예술가라는 직업을 내려놓고 집사람이 하는 의상실로 출퇴근했죠. 셔터맨 할 때 문화재위원 2명이 서울에서 직접 와 '김선옥 선생이 지금 진주농악을 그만두면 진주농악 12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다'고 설득했지요. 결국엔 농악을 하게 됐지만 사실 만나서 대판 싸웠어요. 아니 인간문화재 되려면 젊을 때 고생해야 되고 명인 되려면 참는 게 맞지 않느냐고 하길래 삿대질하며 쏘아붙였죠. '생일날 잘 먹으려고 나중에 나중에 하다가 굶어 뒈진다'고요."

▲ 김선옥 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 회장이자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 김선옥 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 회장이자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김 선생은 농악과 '운명'이라 생각하며 진주농악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스승들 빈자리를 대신해 진주삼천포농악의 상쇠가 됐다. 그는 1982년 전수조교, 1991년 보유자 후보, 2000년 보유자 인정을 받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전통예술 공연을 지원하는 정부사업이 많지 않았어요. 정부 지원 거의 못 받고 무형문화재 지정 전과 여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모아서 공연을 나가면 공연비를 나누고 대회 나가서 상을 타면 상금 나누고 이런 식으로 공연을 했지요. 그런데 맨날 적자라."

그는 일찍이 농악을 지키고 후배들에게 전수하기 위해선 보존회와 전수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농악12차 농악꾼을 설득해 초등학생, 대학생 전수교육, 동네 주민 예술교육을 시작했다. 공연을 가도 후배들을 먼저 챙겼다. 어른들 술타령보다 후배들이 배곯는 일에 더 마음 상했던 그다.

인터뷰하면서 눈치챘지만 그는 자존심이 강하고, 하려는 일은 끝까지 해내는 성격의 소유자다. 공무원들과 싸움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진주에서 설움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왜요?

"1986년 아시안게임이 열릴 당시 진주시에서 축하공연을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출연비가 책정되어있습니까' 물으니 담당자 하는 말이 '예산이 없다'며 결국 20만 원으로 어떻게 안되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 당시 진주농악 회원들 상당수가 서울에서 사물놀이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공연을 위해선 놀이꾼 30여 명의 차비와 일당, 식사를 책임져야 하는데 20만 원으론 턱도 없었죠. 그래서 담당 과장에게 진주농악(86년 당시 명칭) 사무실조차 없어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 한편에 악기, 옷들이 즐비하다며 전수관을 하나 마련해달라고 요청했죠. 공연을 무사히 끝내고 감사패를 받으러 오라는 시에 가서 '시장님 제가 이게(감사패) 왜 필요합니까? 공연 마치고 악기 보관할 데가 없으니 사무실이나 창고라도 하나 만들어 주이소'라고 했죠. 88올림픽 때도 시에서 공연 요청이 와서 전수관 이야기 들먹이며 사무실 하나 마련해달라고 했지만 공연 후 나 몰라라 하더군요."

▲ 김선옥 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 회장이자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의 쇠놀음 모습.<br /><br /> /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
▲ 김선옥 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 회장이자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의 쇠놀음 모습./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

-반면에 기억에 남거나 보람된 일을 꼽는다면요.

"솟대쟁이패의 '얼른'이라는 예능을 재현할 때가 기억에 남네요. 2003년 제자들이 솟대쟁이패 연희를 복원하겠다며 도와달라고 했거든요. 얼른은 조선 마술로 솟대쟁이패가 1936년도 마지막 공연을 한 후 단절이 됐었죠. 60여 년이 지나 대부분 기예를 복원하는 게 어려웠지만 비교적 쉬운 부분부터 찾아 만들어가는 것이 옳다고 여겨 자문과 지도를 했죠. 학자들이나 교수들도 깜짝 놀랐어요.(학계에서는 이름으로만 알려졌던 조선마술 얼른이 살아 움직이게 된 사실에 기뻐했다) 그리고 2014년 농악이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돼 프랑스 현지에서 공연할 때 보람이 컸죠. 우리 농악이 유네스코 등재될 때 5분 공연 시간을 줬는데 130여 개국 유네스코 회원들이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고 프랑스, 브라질, 이탈리아 측에서 직접 초대를 하고 싶다고도 했죠."

-지금도 농악을 할 만큼 건강하신가요?

"그럼요. 재미있어. 아무리 컨디션 안 좋고 몸이 아파도 나도 모르게 신나게 공연하니까. 마약 같은 거야. 지금은 괜찮지만 예전에 허리디스크 때문에 100미터 거리를 세 번 쉬어갔는데 아내가 그래도 상모 돌리고 꽹과리 치니까 꾀병이라며.(웃음) 50대가 되면 농악을 따라가기 힘들어요. 젊은 친구들이 해야될 텐데. 갈수록 기피하고 나도 평생을 했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니까. 일본의 경우는 국가무형문화재가 되면 정말 대우 좋아요. 장관이 와도 당일 면회가 어렵고 한 비행기에 인간문화재 2명이 탈 수 없어요. 사고가 나면 보물이 동시에 없어진다고 보고 만약의 사고를 대비하는 거죠. 전통예술을 좋아하고 광대 생활하는 후배들이 정말 경제적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생활하면 좋겠어요. 지자체에서 관심을 많이 가져주고 정부에서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만 해놓고 푸대접하지 말고 제대로 뒷받침해줘야 됩니다."

 

진주삼천포농악은? 진주삼천포농악(국가무형문화재 제11-1호)은 지난 1966년 우리나라 농악 중 처음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연예 위주의 진주농악과 경연 위주의 삼천포농악이 만나 탄생한 진주삼천포농악은 다른 지역 농악과 달리 전원이 전립을 쓰고 상모를 돌린다. 그래서 씩씩하고 남성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가락 또한 매우 빠르다. 원래 진주·삼천포 농악단이 별도로 활동했으나 1960년대 농악경연대회에 참여하면서 교류했다. 명칭은 여러 번 바뀌었다. 1966년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농악 12차', 1985년 '진주농악12차', 1986년 '진주농악'으로 변경됐다. 그러다가 삼천포시(현재 사천시)에 전수교육관을 유치하면서 1993년 '진주삼천포농악'으로 명칭을 조정했다. 현재 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는 사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 있으며 보유자는 박염(79) 선생과 김선옥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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