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결혼 등 '삶'에 뛰어들기 두렵지만
열정·실패 없다면 자기실현 어려울지도

요즈음은 필자가 젊었을 때인 1970년대와 비교하면 성인(?)이 되는 연령이 매우 늦어지는 듯싶다. 필자는 27세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이 나이 때가 당시에는 평균적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서른 후반에도 망설이고 있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그 당시와는 다른 사회적 변화가 결혼을 망설이게 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여성들 사회진출이 더 많아진 긍정적인 측면인데, 그것이 역으로 가정을 꾸리는 것을 늦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변화를 제쳐두고라도 결혼을 선택하고 가정을 꾸리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어려운 문제다. 키에르케고르는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면서 결혼을 결국 하지 않았다.

융 심리학에서는 우리네 인생을 전반과 후반으로 대비시킨다. 청년 노이로제는 대개 삶에 뛰어들지 않으려는 데서 생기며, 중년 이후 노년에서는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고 완성 과정으로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젊어서 삶의 과제는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다. 직업을 두고 돈을 벌어 가정을 꾸리며 아이를 출산하는 것 등이다. 이것을 실현한 이후에나 내면 세계에 적응하는 후반 과제가 이행될 수 있다고 한다.

사회적응이 되면서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적응에 실패하게 되면 그 결과로 퇴행이 일어난다. 그리고 여러 가지 노이로제 증상이 함께 나타날 수 있다. 거꾸로 사회적응을 위한 에너지가 이러한 증상에 묶여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시 적응 어려움이 반복된다. 이에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에서 그렇게도 선명하게 부각되는 생활사의 한 장면이 되는 것 같이 다가온다.

그리하여 실패라고 하는, 어쩌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인, 인생의 한 부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게 되고 만다. 항상 무난히 성공만 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인생 경험이 전체적으로 결핍되는 것이고 깊이 없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실패를 피하고 성공만을 기대하며 젊은 날 그 삶에로 뛰어드는 시작에서 머뭇거린다. 불확실한 미래 가능성 대신 확실할 것 같은 현실의 길만 쫓으려 하고, 그에 따라 비전이 희미해지는 것이다.

젊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가 주로 외부 세계에서 현실적인 사회적응을 하는 것이다. 취업전선에서 경쟁해야 한다.

더욱이 내향적인 성격 같은 경우, 자신의 열등 영역인 사회적 역할 관계에서 소진될 수밖에 없는 숙제를 안게 된다.

하지만 사실 젊은이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황무지의 시인 엘리엇은 25세 전에 시를 쓰지 않으면 이후에는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는 말을 했다. 아마도 우리에겐 경험하기도 전에 인생을 알아보는 직관 능력이 있고, 이것은 순수한 젊은이에게만 또렷한 것인지 모른다.

이런 순수한 젊음의 시절엔 시와 열정이 있었고 단지 열정이 허무맹랑한 꿈을 견딜 수 있게 했었다. 예컨대 내향형 젊은이에게는 자신의 열등한 외향을 개발해야 하는 '황무지'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

젊어서 시나 열정, 그리고 실패가 없었다면 후반기 내면 작업에서 검토하게 되는 인생에 사로잡혔던 내용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 자기실현도 어려울지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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