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카스트라토는 교회의 성차별
현대 한국 금지곡 목적은 권력 유지

18세기 나폴리의 한 광장에서 카스트라토 오페라가수가 트럼펫 연주자와 대결을 벌인다. 아름답고 높은 목소리로 트럼펫 연주를 이겨 버린다. 영화 <파리넬리>의 한 장면이다.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에 나오는 아리아 '울게하소서'를 너무도 멋지게 소화한 영화로 유명하다. 물론 여자 2명과 남자 1명의 목소리를 컴퓨터로 합성한 소리였지만. 변성기 전 남자아이를 거세시켜 힘 있는 여자 목소리를 내게 했던 카스트라토 이야기 <파리넬리>다.

"자넨 목소리가 있어야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있어. 신이 자네에게 내려준 유일한 선물이니까." 영화는 파리넬리 형과의 음악적 갈등을 주로 다룬다. 목소리로만 존재가치를 드러내야 하는 주인공의 처지가 감성을 자극한다. 궁금증이 생겼다. 아무리, 아름다운 목소리를 위해 인간의 정체성까지 훼손하는 거세를 꼭 해야 했을까? 다른 이유는 없을까? 물론 있었다. 최근 들은 강의에서 파리넬리의 비극(?)적인 현상 뒤에 숨은 본질을 새삼 확인했다. 바로 '금지'이다. 파리넬리가 활동할 당시 로마 바티칸교회에서는 여자가 교회에서 노래하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 성경 고린도전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더 희한하다. '남자의 몸으로 여자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장 신의 모습에 가깝다'. 맙소사!

성경 시편에는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란 구절도 있다. 결국 모든 악기와 소리, 마음을 다해 신을 찬송하라는 뜻인데, 당시 권력자들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구절을 선택해 하찮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노래할 수 없도록 '금지'했다. 동시에 여자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가진 소년은 거세당해야 했다. 잔인하고 아픈 금지의 역사 한 장면인 동시에 오래 지속된 성차별이고 인권 훼손이며 예술모독이다. 예술을 하는 주체는 사람이다. 사람이 차별받고 훼손되는 것도 예술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정상이 아니거나 권력을 이용하려는 자들일까.

훌쩍 뛰어서 현대 한국노래로 오면 금지곡이 수두룩 뻑뻑하다. 70년대만 해도 그렇다. 대마초 파동으로 신중현을 비롯 수많은 가수의 노래가 금지되었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국가정책이 거짓말이라는 거냐'며 금지했다. 송창식의 <왜 불러>는 반말로 노래한다고 금지했다. 조영남의 <불꺼진 창>은 '왜 밤에 불을 꺼놓았냐'고 금지되었다. 양희은의 <아침이슬>은 작가 김민기의 불량한(?) 이데올로기와 가사를 빌미로 '다른 곳 놔두고 하필 묘지 위로 태양이 떠오르냐'며 금지했다. 수없이 많다. 70년대를 넘어 80년대 이후로 노동현장, 시위현장에서 불리던 노래들, 민노래, 민중가요들은 노찾사 이전에는 아예 금지조차 되지 못했다. 음반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반으로 만들진 후 벌건 줄이 박박 그이고 방송으로 듣기 힘들었다.

그 서슬 퍼런 금지의 본질은 또 무엇이었을까? 권력의 속성이다. 권력 유지에 거슬리는 것을 대부분 금지했다. 우리 금지곡은 소리 자체나 성차별보다 노랫말로 인한 금지가 많다. 노랫말은 크게 보면 국민의 마음이다. <시경>을 낳은 중국의 권력자들은 굳이 수백 년 동안 노래를 채집해서 백성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지 않았던가.

자유로운 예술활동이 가능한 시대라고 한다. 문화예술활동가들도 넘쳐난다. 누가 대놓고 뭔가 금지하는 일 따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애써 얻은 지금의 자유나 권력 언저리의 편안함을 놓칠까 봐 표현하고 싶은 예술혼을, 넘쳐나는 목소리를, 스스로 제한하고 금지하는 음악가나 예술인은 없을까. 조심스럽게 돌아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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