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다시 팀 꾸렸지만 성적 부진으로 와해 아픔

1947년 정식 출범해 '마산 고교야구 시대' 개막을 알린 마산고 야구부. 벅찬 꿈을 안고 출발했을 마산고 야구부였으나 태평양·한국 전쟁 등 소용돌이 속에 첫 창단 역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대 '쌍룡기 쟁탈 고교대회' 출전으로 어렵게나마 명맥을 이어가던 마산고 야구는 1960년 7월 경남야구협회 주최 '12회 쌍룡기 쟁탈 대회' 출전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

마산고 야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1971년이다. 정부의 학원스포츠 정책과 지역 동문 목소리에 힘입어 10여 년 만에 재창단한 것이다. 당시 마산고는 신입생 6명, 육상부 재학생 2명, 일반 재학생 1명으로 팀 구색을 근근이 맞췄다.

그래도 마산고 야구는 짧은 시간 고교·한국야구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감사용(전 삼미슈퍼스타즈 투수), 이석규(전 국가대표 내야수)를 배출한 게 한 예다. 여기에 1972년 8월 '2회 봉황기 쟁탈 전국고교대회'에서 강정일이라는 스타도 낳았다.

▲ 마산고 야구부는 신입생 6명 등을 보강해 1971년 재창단됐다. 당시 이 학교 출신으로 야구부 정신적 지주와 같았던 고상근(가운데 사복 차림) 씨, 포수를 맡았던 1학년 강정일(맨 오른쪽) 등이 찍은 기념 사진.  /강정일 소장
▲ 마산고 야구부는 신입생 6명 등을 보강해 1971년 재창단됐다. 당시 이 학교 출신으로 야구부 정신적 지주와 같았던 고상근(가운데 사복 차림) 씨, 포수를 맡았던 1학년 강정일(맨 오른쪽) 등이 찍은 기념 사진. /강정일 소장

단, 특출난 몇몇 활약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강정일의 노히트노런이 있었던 1972년 봉황기 대회만 해도 마산고는 2회전에서 대건고에 0-5로 패하며 짐을 쌌다. 팀은 이후에도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1974년 마산고 야구는 재창단 기쁨이 체 무르익기 전 다시 해체되는 아픔을 겪는다. 되풀이된 상황을 강정일(65) 씨는 이렇게 전했다.

"재창단이다 보니 당시 마산고 동문들이 야구부를 많이 도와줬어요. 몇몇 후원자도 있었고요. 학생들에게 쌀도 가져다주고 했습니다. 우리 때 이후 학교가 좋은 선수를 많이 영입했습니다. 멤버들이 좋다는 이야기가 많았죠. 하지만 상위권 진입 등 성적을 내진 못했습니다. 결국 '동문이 지원을 해줘도 성적이 못 미친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장 마산상고 벽을 넘기도 쉽지 않았죠."

성적·예산 부족 등으로 또 한 번 부침을 겪은 마산고 야구지만 야구를 향한 동문·재학생 열정은 어찌할 수 없었다. 1980년 '재재창단'으로 또 다시 일어선 마산고 야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성시대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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