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도 슬픔도 항상 있는 게 아니므로
내 행복을 나누면 더욱 크게 돌아올 터

해가 뜨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밝아지고 비가 오니 산천에는 신록이 무성하구나. 잠시 고개 돌려 들어보니 망운산 꾀꼬리 노래하고 법당에 부처는 빙그레 함소하고 갖가지 꽃은 피어 참 좋은 시절이로다. 지난 세월을 탓하면서 삶의 질을 논하기에 앞서 생과 사를 호흡 하나 사이에 두고서 아침저녁 보존하기도 힘들다는 옛 조사들의 명구가 돌연 생각난다.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여 쥔 화두, 신심불이(信心不二) 불이신심(不二信心)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이로다.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언어의 말이 끊어져서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니로다. 즉 이 뜻은 자기 마음 이외에 불법이 없고 자기 마음 이외에 부처가 따로 없으니 참으로 허공보다 더 깨끗한 선과 악이 다 떨어진 청정한 자기를 바로 보아 깨치라는 말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나 실상 삶이라는 것 자체가 복잡하고 고난의 연속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지금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우리가 살면서 변고를 덜 겪고 재앙을 피하면서 살 방법은 없는 걸까? 화근이나 복덕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다. 존귀하고 번영하는 위치에 있는 자라도 무정의 이치를 버리고 은혜를 베풀면 화근을 면할 수 있으나 만일 귀한 것을 뽐내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사도를 행하면 머지않아서 벌을 받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뒷날을 생각지 않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뒷날 고통을 받으면 한탄의 눈물을 흘린다. 살다 보면 행복한 날도 있고 고통스러운 날도 있는데 행복한 날의 기쁨을 다른 이와 나누고 베풀면 계속 행복을 유지하고 더 큰 기쁨을 얻게 되지만 자신의 행복만 생각하고 인색한 마음을 쓰면 곧 행복은 깨어지고 만다.

행복이 깨지는 것, 그것이 바로 화근을 만나는 것이다. 화근을 면하는 복행(福行)은 뭐니뭐니해도 보시행이다. 시주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나니, 좋은 이름이 널리 퍼지고 누구를 만나도 두렵지 않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기쁨을 누리고 죽어서는 천상에 태어나느니라. 보시(布施)는 중생을 위한 복의 그릇이요, 진리에 이르는 길이니 누구라도 보시의 공덕을 생각하거든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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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보시하면 뭇사람의 사랑과 칭찬이 따르고 가는 곳마다 두려움이 없다. 그러므로 진실한 보시를 하는 사람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고 옳다 그르다 시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보시에는 재시(財施)와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무외시는 사람이 갖는 공포와 근심을 없애준다. 특히 보시를 통해 얻는 공덕은, 비유하자면 하나의 횃불과 같다. 수많은 사람이 각각 횃불을 가지고 와서 그 불로 음식을 끓여 먹고 어둠을 밝혀도 본래의 횃불은 변하지 않으니 복도 또한 그와 같다. 특히 보시는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 하나는 주는 자(施者)가 청정해야 하고 둘은 받는 자(受者)가 청정해야 하고 셋은 주는 물건(施物)이 청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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