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나도 않고 꺼지도 않고, 때 끼도 않고 깨끗도 않고, 늘도 않고 줄도 않고 :

한올 빔 보기는, 열반의 세계를 보자면 생멸(生滅), 구정(垢淨), 증감(增減)이 없고, 허공이나 근원의 자리에서는 시작과 끝이 없듯이 생멸이 없다는 것이다. 깨끗하고 더러움도 없고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도(中道)가 나온다. 큰 절을 들어가다 보면 일주문에 불이문(不二門)이라고 써 붙인 현판을 볼 수 있다.

바로 생멸, 증감 등 둘이 다 아니(不二)라는 데서 빌려온 것이다.

근세의 큰 스님인 퇴옹 성철은 그의 <백일법문>에서 중도사상(中道思想)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교종과 선종 모두 이 중도를 중요시하고 있다고 했다. 성철스님의 글을 보자.

"천태종 지자대사는 불교의 최고 원리란 중도이며 그 중도의 내용은 양변을 다 막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자대사는 '마음이 이미 맑고 깨끗해지면 양변을 다 막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면 두 법을 다 비춘다(心旣明淨 雙遮二邊 正入中道 雙照二諦)'고 했습니다. 양변을 다 막는다(雙遮二邊)는 것은 상대모순을 다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현실세계란 전체가 상대모순으로 되어있습니다. 물과 불, 선과 악, 옳음과 그름,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입니다. 이들은 서로 상극이며 모순과 대립은 투쟁의 세계입니다."

또 성철스님은 선종의 글도 인용한다.

"백장스님은 경·율·론 삼학에 해통하고 지식이 넓은 선지식인데 불법을 바로 보는 견해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있음과 없음을 보지 아니하면 곧 부처님의 참모습을 본다(不見 有無 卽時見佛眞身).' … 이런 큰 스님들도 불법의 근본을 말할 때는 양변을 떠난 중도(中道)를 밝히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중도는 비단 불교에만 국한된 생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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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설일지> 영인본 (전 4권).

불교의 중도와 유교의 중도가 어찌 다를까

유학(儒學)을 이학(理學)으로 집대성한 주자가 쓴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는 "<中庸>을 어찌하여 지었는가? … 經書에 나타나는 것으로는 '진실로 그 中(中道)을 잡으라'는 것은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전수해 주신 것이요, '人心은 위태롭고 道心은 은미하니, 精히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中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수해 주신 것…" 이라 하였다.

불교의 중도와 유교의 중도가 다를 듯해도 성인들이 본바, 그 경지가 어찌 다를 수가 있을까?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르므로 빔속엔 빛 없고 받·끎·가·알도 없고 눈·귀·코·혀·몸·뜻도 없고 빛·소리·내새·맛·맨지·올도 없고 눈계도 없고 뜻알계까지도 없고 :

여기에 대한 해설은 박영호 선생의 풀이를 옮긴다.

"오온(五蘊)에 대해서는 '오온의 제나는 빈 쭉정' 장(章)에서 말한 바 있다. 이번에 새로 나온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의 이른바 18계다.

육근은 눈·귀·코·혀·몸·뜻이다. 한자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고 한다. 여섯 뿌리(六根)의 감각 기관에서 감각 작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빛깔·소리·내새·맛·맨지·올이다. 한자로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고 한다.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합하여 십이처(十二處)라고 한다. 육근과 육경에서 육식(六識)이 일어난다. 이를 안식계(眼識界) 이식계(耳識界) 비식계(鼻識界) 설식계(舌識界) 신식계(身識界) 의식계(意識界)라고 한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인식론을 풀이한 것이다. 즉 빛깔은 눈으로, 소리는 귀로, 냄새는 코로, 맛은 혀로, 접촉은 몸으로, 이치를 알아채는 뜻이란 것이다. 여섯 감각기관과 여섯 대상(六境)이 만나 안식(眼識)에서 의식(意識)까지 육식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다석은 "몸의 나란 심부름꾼으로 부려먹으라고 준 육근(六根)을 가진 한 몸뚱이로 된 기계다. 육근의 몸은 심부름꾼이지 나가 아니다. 여기에 내가 팔려선 안된다"고 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 무노사진(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 無老死盡)- 어둠도 없고 또한 어둠 다함도 없고 늙어 죽음도 없고 또한 늙어 죽음 다함까지도 없다. :

인식의 과정, 즉 색·수·상·행·식의 오온을 통한 감각기관의 인식론을 설파하다가 갑자기 무명(無明)과 무노사(無老死)로 옮겨가면 불교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은 아주 당혹해 할 수밖에 없다. 이들 단어는 인간의 몸뚱아리에서 생겨나는 연기(緣起)를 말하고 있다.

죽음이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죽음의 노예가 되어있다

다시 박 선생의 풀이를 보자. "무명과 노사는 연기론의 핵심인 12인연의 첨과 끝이다. 12인연의 차례는 이러하다. 1. 어둠(無明) 2. 감(行) 3. 암(識) 4. 몸(名色) 5. 여섯곳(六處) 6. 닿음(觸) 7. 받음(受) 8. 사랑(愛) 9. 가짐(取) 10. 있음(有) 11. 남(生) 12. 늙어 죽음(老死)이다. 이것이 이 세상의 상대적 존재가 생멸하는 과정을 12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이다. 12인연 가운데 첫 시작이 무명(無明)이다. 이 무명을 바로 알아야 한다. 무명은 진리에 대한 거짓을 뜻한다. 진리는 참나이고 참나는 법신(法身)인 얼나이다. 거짓나는 색신(色身)인 제나(自我, Ego)이다. 탐·진·치의 삼독을 밑천 삼아 살아가는 제나가 어둠인 무명이다. 제나가 삼독의 삶을 펴서 끝마치는 것이 12인연이다.

개체의식을 지닌 제나가 없어지면 12인연이 벌어질 까닭이 없다. 부처는 개체의식을 초월하여 니르바나의 진리의식으로 산다. 그러나 무명의 제나는 개체의식으로 종족보존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하여 맘이 내 속으로 향하여 관자재(觀自在)를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간다. 행(行)이다. 밖으로 나가면 세상을 알게 된다. 식(識)이다. 그래 이성(異性)을 맞으니 명색(名色)의 임이다. 임을 맞으면 임의 눈·귀·코·입·몸·뜻을 보게 된다. 이른바 선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육처(六處)이다. 맘에 들면 손을 잡는다. 촉(觸)이다. 나아가서 선물을 주고받는다. 수(受)이다. 사랑에 빠진다. 애(愛)다. 상대방의 씨를 갖게 된다. 이것이 취(取)다. 차차 배가 불러진다. 이것이 유(有)다. 드디어 새 생명을 낳게 된다. 생(生)이다. 자식을 길러 놓고는 늙어 죽는다. 노사(老死)이다. 또 새 생명은 12인연을 되풀이한다. 이 인연의 수레바퀴를 끊는 것이 진리인 반야바라밀다이다."

다석은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란 없다. 하늘에도 땅에도 죽음이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다. 성경 불경은 죽음의 노예가 되지 말자는 것이다. 죽음이 죽음 아님을 알고 죽음을 무서워 않는 것이 성경 불경의 뜻이지 다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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