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재를 넘어 난동마을로

향기로 승부를 거는 흰 꽃들의 계절에 초록걸음 길동무들은 구례 탑동마을에서 그 걸음을 시작해 구리재를 넘어 난동마을까지 걸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 초록걸음은 느릿느릿 쉬엄쉬엄 걷는 까닭에 하루 걷는 거리는 10km 남짓이지만 이번엔 임도를 따라 구리재를 넘는지라 8km가량을 걸어 난동마을에서 걸음을 마무리했다.

산수유 축제로 유명한 산동 온천랜드 입구에 위치한 탑동마을에는 통일신라시대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는데, 이 탑 때문에 탑동마을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 삼층석탑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무너졌는데 마을 사람들이 다시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원래 오층석탑이었는지 삼층석탑이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탑동마을 입구 군 지정보호수인 430여 년 된 느티나무 아래에서 '걷는 이의 약속'을 함께 하고 복효근 시인의 시 '5월의 느티나무'를 길동무들에게 들려드린 후 지난 4월에 개장한 구례수목원을 향해 걸음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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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걷고 있는 초록걸음단. / 초록걸음단

어느 비밀한 세상의 소식을 누설하는 중인가

더듬더듬 이 세상 첫 소감을 발음하는

연초록 저 연초록 입술들

아마도 지상의 빛깔은 아니어서

저 빛깔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초록의 그늘 아래

그 빛깔에 취해선 순한 짐승처럼 설레는 것을

어떻게 다 설명한다냐

바람은 살랑 일어서

햇살에 부신 푸른 발음기호들을

그리움으로 읽지 않는다면

내 아득히 스물로 돌아가

옆에 앉은 여자의 손을 은근히 쥐어보고 싶은

이 푸르른 두근거림을 무엇이라고 한다냐

정녕 이승의 빛깔은 아니게 피어나는

5월의 느티나무 초록에 젖어

어느 먼 시절의 가갸거겨를 다시 배우느니

어느새

중년의 아내도 새로 새로워져서

오늘은 첫날이겠네 첫날밤이겠네

'5월의 느티나무' 복효근

구례수목원을 향하는 길가엔 흰 꽃들이 제 나름의 그 진한 향기들을 내뿜고 있었다. 맨 먼저 만난 다래나무는 그 향기로운 꽃과 함께 덩굴식물답게 마을 입구에 그늘을 만들어 동네 어르신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바람개비 같은 꽃으로 향기를 흩날리는 마삭줄이 우리 길동무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그리고 길섶에서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어야만 그 아름다움이 보이는 참꽃마리와 미나리아재비 또한 봄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하지만 흰 꽃의 종결자는 맑은 개울물에 떨어져 물 위에 무리 지어 떠 있는 때죽나무 꽃이었다. 나무에서 한 번 피고 물 위에 떨어져 또 한 번 그 아름다운 순백의 꽃을 피워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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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죽나무. / 초록걸음단

올 초에 새롭게 문을 연 구례수목원은 남부내륙권역의 식물유전자원 보전과 국가 식물종다양성 확보에 기여함과 동시에 연구, 교육, 전시, 수집, 휴양을 통해 대국민 산림복지서비스를 수행하고자 조성된 공립수목원이란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류생태원, 편백나무 숲을 거닐 수 있는 데크 길, 소나무 숲을 따라 조성된 숲속그늘마당은 지리산의 자연을 느낄 수 있고 다양한 식물들을 만날 수 있는 자연 속 식물전시관이라 이곳 둘레길을 지날 땐 꼭 들러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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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동마을 당산 소나무. / 초록걸음단

이번 초록걸음의 최대 난코스인 구리재는 해발 500m에 위치하고 있는데 구렁이가 움직이는 것처럼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고 그 이름이 붙여졌다. 구리재 주변은 1999년과 2000년 연이은 산불로 소실된 이후 산림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철쭉동산을 조성하게 되었다. 구리재를 오르는 임도는 조금 지루하기는 하지만 고갯마루에서 확 트인 구례 들판의 장관과 함께 철쭉 꽃동산을 마주하게 되면 탄성이 절로 나올 만하다.

구리재에서 맛난 초록 도시락을 먹고는 모내기 준비가 한창인 구례 들판을 바라보며 난동마을까지의 내리막길을 걸었다. 난동마을은 지리산 생태숲이 있는 지초봉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이 마을에는 수형이 아름답고 기품이 있는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군 보호수로 지정된 이 소나무는 수령이 400년 정도 되었는데 마을에서 해마다 이 나무 앞에서 당산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을 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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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 도시락을 먹는 시간. / 초록걸음단

이번 초록걸음은 길동무 중 한 명이 이런 후기를 남겼다.

'자연 속을 걷는 것은 언제나 좋다, 대기는 투명하고 바람은 청량했다. 하지만 포장된 임도의 눈부심이 너무 심한 편이었다. 임도를 무조건 포장하지 말고 황토를 섞는 등 환경친화적 공법을 사용하면 어떨까.'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조금은 팍팍한 길이었지만, 봄 햇살과 함께 온 산을 뒤덮던 흰 꽃들의 그 향기가 돌아오는 차 안까지 계속 이어져 더더욱 행복했던 초록걸음이었다. 마음은 벌써 다음 달의 초록걸음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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