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나처럼 불행한 사람 없어야"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토해냈다.' 60년 맺힌 한을 기자는 감히 짐작키도 어려웠다. 머릿속으로 억지로 그려 보려고 해도 그려지지 않았다. 이런 절망적인 장면은 영화나 TV 속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를 모두 잃고

강진상(74) 씨는 1940년 합천군 삼가면 상금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강덕수는 당시 마을 구장(이장)을 하였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비단장사를 했다. 집안에는 아직 할아버지가 생존해 계셨고 그를 포함해 남자만 5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엔 그도 행복했노라 기억한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 삼가면에서 강진상의 아버지에게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그 권유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보도연맹에 등록하면 몇몇 혜택이 있었지만 강진상의 아버지는 동네 이장 업무에다 사방 사업, 저수지 건설 등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더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낮에는 면사무소 직원이 와서 가입을 권유하고 어머니에게도 등록을 안 하면 불이익이 온다는 식으로 압력이 이어졌다. 마지못해 강진상의 아버지는 보도연맹에 가입할 수 밖에 없었다.

보도연맹 가입한 지 얼마 있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7월 18일 아버지는 경찰 형사들에게 붙들려갔다. 그러나 집을 나설 때 까지만 하더라도 이게 마지막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붙들려 간 사람들은 그냥 지 발로 들어간 겁니다. 아무 죄 없으니 설마 어쩌기야 하겠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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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상 씨./임종금 기자

그러나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7월 21일 낮 12시 무렵, 강진상의 아버지 강덕수는 다른 보도연맹원 47명과 함께 합천군 삼가면 방아재에서 경찰들의 손에 학살당했다. 이날 학살 현장을 석동정 씨가 모두 목격했다. 석 씨는 보도연맹으로 끌려간 사촌 형의 소식을 듣기 위해 방아재를 지나다가 학살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석동정 씨에게서 학살 소식을 들은 강진상의 어머니는 임신 중이었다. 그는 일단 방아재에서 남편의 시신을 수습했다. 10살 소년이었던 강진상은 아직도 학살장소에서 흙 위로 빠져 나온 희생자들의 팔·다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날 가족들이 모여 시신을 매장하고 있던 중 합천경찰서 삼가지서 급사(말단 직원)가 어머니에게 '지서로 오라'고 통보했다. 그날 오후 어머니는 지서장과 크게 실랑이를 하다 초죽음이 되도록 구타를 당한 후 어딘가 실려갔다. 증언에 따르면 합천경찰서 쪽으로 가다가 어느 다리 밑에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의 부모는 국가권력에 의해 살해당했다.

다음날 10살 소년이었던 강진상이 홀로 삼가지서로 어머니를 찾으러 갔다. 어린 아이의 등장에 지서는 술렁거렸다. 그때 조점도라는 이가 경찰 지서 주임이었던 이남원에게 "얘도 그 집 식구인데 없애뿌리지요"라고 하는 걸 그는 들었다. 이남원은 그를 보호소(유치장)에 넣어 두라고 했다. 보호소에 갇히자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진상은 살기 위해 미친 듯이 울었다. 경찰관이 와서 '왜 우냐'고 묻자 강진상은 똥이 마렵다고 둘러댔다. 경찰관은 '똥 누고 오라'며 보호소 문을 열어줬고 그는 용변을 보러 가는 척 하다가 미친 듯이 집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강진상은 살아남았다.

흙과 똥을 먹으며 자랐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니 5형제는 이제 어째야 합니까?

"오형제도 아닙니다. 집에 와 보니 둘째 형이 사라졌어요. 집에 어른이라고는 팔순 되신 할아버지 뿐이죠. 다행히 옆집에 고모가 계셨습니다. 고모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신데 귀국 후에 혼자 살고 계셨죠. 이때부터 고모가 가장이 되신 겁니다. 고모 생각에는 경찰도 우릴 죽일 것 같고, 북한군도 죽일 것 같았습니다. 여기 있다가는 죽겠다 싶어서 합천군 삼가면 동리라는 산골 깊은 마을로 피난을 갔습니다. 피난 도중에 친인척 집에 하소연을 했지만 아무도 저희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빨갱이 자식이 집에 살면 자기도 총살 당한다고 하더군요. 산에 굴을 파고 땅굴 생활을 했습니다."

-산에 먹을 게 있었나요? 한두 사람도 아니고 6명인데.

"처음에는 고모가 집에 있는 양식을 가져와서 먹였는데 그것 가지고는 안 되니까 산에 있는 모든 걸 다 먹는 겁니다. 뱀, 개구리, 메뚜기, 나물, 풀 그리고 나중에는 없어서 흙도 주워 먹었습니다. 그리고 피신을 하기 위해 땅굴을 여러 곳에 파놓았습니다."

-언제 피란을 마치고 집으로 오셨나요?

"10월에 서울이 수복되고 북한군이 밀려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때 저희는 전쟁이 끝난 줄 알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도 먹을 게 없으니 남의 집 머슴살이 하면서 바가지에 밥을 받아서 살았습니다. 그래도 모자라니 방앗간 근처에 개가 똥을 누면 하얀 똥이 있습니다. 쌀이 소화가 안 된 건데, 새벽에 고모가 그걸 주워가지고 씻어서 밥을 하시는 걸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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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상 씨./임종금 기자

-전쟁이 완전히 끝난 이후로 어떻게 살았습니까? 

"형제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먹고 살려면 남의 집 머슴 밖에는 할 일이 없었거든요. 저도 15살 때부터 머슴살이 하다가 17살 무렵에는 나무를 해서 시장에 팔고 그랬습니다. 형제들이 너무 일찍 흩어졌기 때문에 지금도 서로 서먹합니다. 그리고 어딜 가면 보도연맹 자식이라고 항상 경찰이 조사를 나옵니다. 그래서 아예 멀리 부산으로 갔는데 또 경찰이 찾아오는 겁니다. 그러다 21살에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빨갱이 자식' 특전사 대위를 달다

-당시 군대는 어땠습니까? 

"제가 군대를 갔을 때는 1961년입니다. 군대에 가면 제대로 배운 사람이 없으니 공부를 가르쳐줬어요.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가 죽고 나서 학교에 안 갔어요. 또 그 때는 군대에서 장교나 직업군인이 한창 필요할 땝니다. 그래서 들어가자 바로 장기복무를 신청했습니다. 장기복무를 신청하니 진급도 빨리 돼요. 1966년에 중사를 달았습니다. 그때 정부에서 초급장교 임관할 사람이 있으면 신청을 하라고 하더군요."

-그게 미스테리인데요. 연좌제가 있는데 장교를 달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죠. 한데 당시 서류라는 게 주먹구구식이에요. 나는 속으로 이리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가 내 부모를 죽였으니 나도 너희를 좀 속여야겠다. 옛날에 머슴살던 집 아들이 고등학교 체육선생으로 있었습니다. 학교 가서 졸업증명서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니 안 만들어 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양식을 담은 빈 증명서라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건 주더라구요. 그걸 받아 가지고 관인 소인을 내가 다 만들어서 찍었어요. 명백한 공문서 위조죠. 논문도 가짜로 만들어 올렸습니다. 지금이야 안 되지만 그 때는 됐습니다."

그렇게 그는 빨갱이 자식에서 1967년 12월 9일 소위가 됐다.

-장교가 되고 나서 부임지는 어디였습니까?

"가평 옆에 청평이라고 거기 1사단이 있습니다. 거기서 부임을 했고 중위를 달았을 때 베트남 전쟁 파병을 갔습니다. 월남에서 귀국하니까 공수 특전사 중대장을 하게 된 겁니다. 대위를 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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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상 씨가 자신의 사연을 토대로 쓴 책 '양천강아 말해다오(하용웅 저. 학이사)'를 소개하고 있다./임종금 기자

그의 인생에서 그 시절이 전성기였다. 

-베트남에서는 무슨 일을 했을까?

"매복부대를 지휘했습니다. 미군이 '이리로 베트콩이 지나간다'고 알려주면 미리 매복하고 있다가 사격을 하는 겁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민간인도 쏘셨습니까?

"움직이는 건 다 쐈으니 민간인도 희생됐을 겁니다. 하루는 다 쏘고 나서 보니까 아녀자인데 엉덩이에 총알을 맞아서 병원에 실어준 적도 있습니다."

-대위 다음에는 소령 아닙니까? 또 특전사는 당시 최고 엘리트 부대이고. 그런데 소령을 달지 않고 군에서 나왔던데 어떻게 된 겁니까?

"대위에서 소령을 달려고 하는데 보안사에서 뒷 조사를 심하게 하는 겁니다. 보도연맹 희생자 아들이라는 게 들통났겠죠. 보안과에서 부르더라구요. 강 대위는 진급하기 힘들겠더라. 지장이 있겠다.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럼 난 그만 할란다고 제대를 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생각난 듯 얘기를 이어나갔다.

"대위 달고 있을 때 전라도 남원 산례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이때 아니면 내가 언제 복수를 하겠냐 싶어서 복수를 하러 고향에 왔습니다."

-누구에게 복수를 한다는 겁니까?

"날 보고 '얘도 없애뿌리지요'라고 한 조점도 씨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자가 경찰 앞잡이였을 겁니다. 내 지프를 타고 권총에 실탄을 넣어서 조점도 씨를 만나서 '내가 할 얘기가 있다. 밥이나 한끼 합시다'고 해서 지프차에 태워서 산 골짝 어디 가서 쏴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딱 가보니까 사람이 없어요. 어찌됐나 물어보니 제가 오기 바로 몇달 전에 아지재라고 하는 골짝이 있는데 거기서 피살된 채로 발견이 됐다는 겁니다. 아차, 누가 나 보다 선수를 쳤구나 싶었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 사람이 죽어도 곱게 못 죽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 나서는 안 돼

군을 전역한 후 그는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아야 했다. 호적상으로 3번이나 결혼을 하고 예비군 중대장을 하다 그만두고 정처없이 떠돌다가 트럭을 몰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생활이 엉망이었다. 지금은 국가유공자 지원금과 군인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런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 지난 9월에 나왔다. 제목은 '양천강아 말해다오(하용웅 저)'다. 양천강은 합천을 가로지르는 강이다. 마치 '내 한을 양천강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고 하소연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부모님이 피살된 사실 외에도 그의 잘못과 사랑했던 이들에게 입힌 상처 등을 아주 상세하게 싣고 있다. 보통 이런 책들은 자신의 과오를 숨기거나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는데 말이다.

"제가 이제 얼마 살겠습니까? 제 삶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제가 살기 위해서 4명의 여성을 거쳐갔고, 큰 상처를 줬습니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 말하고 가야죠."

한편 1999년 경남 합천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유족회가 발족했고, 그는 유족회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유족회장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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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 있는 강진상 씨의 둘째 형 강진창 씨(사진 가운데)와 그의 그족들./강진상 씨 제공

-유족회에 등록된 분들이 몇 분이나 됩니까?

"150여 명이 되는데 실제 활동하시는 분은 30명 정도 됩니다."

-유족들의 생활 수준은 어떤가요?

"형편없습니다. 빨갱이 식구라고 학교를 갈 수 없으니 대기업이나 공직에 갈 수 없고, 농사를 짓거나 생활이 바닥입니다. 저처럼 국가공무원 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지원금이 옵니까? 

"유족회마다 다르지만 합천유족회에는 매년 추모제 할 때 몇백만 원 지원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집단 소송을 냈습니다. 2심까지는 유족들이 승소했습니다."

-실종되셨던 둘째 형님이 북한에 생존해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2000년 적십자사가 신문에 이산가족 보도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때 작은 형님이 북한에 생존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막내 동생이 당시 중국에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중국에 거처를 마련하고 거기서 북한 형님 주소로 편지를 보내보라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북한까지 서신이 자유롭게 오가니 말입니다. 그래서 작은 형님과 서신을 여러 차례 주고 받았습니다. 작은 형님은 부모가 경찰에 죽자 복수를 하기 위해 북한 인민군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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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 있는 강진상 씨의 둘째 형 강진창 씨(사진 가운데)와 주고 받은 편지 중 일부./강진상 씨 제공

-남북관계가 얼어붙어 있는데, 어르신들은 이러다 전쟁 나는 거 아니냐고 걱정을 많이 하시는데….

"전쟁을 겪지 못한 사람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모릅니다. 전쟁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내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겪어 봤지만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좀 손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전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는 마치 자식에게 당부하듯 전쟁은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끝으로 그는 기자에게 부탁할 말이 있다고 했다. 

"정말 내 삶이 힘들었고, 할 말이 많습니다. 이 한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제 얘기가 영화가 되거나 드라마가 돼서 다시는 저 같은 불행한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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