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로도 오랫동안 연극판을 지키는 돌장승이 되리

1년 전 연극분야를 맡게 됐다. 때마침 회사 선배 기자와 통영에 갈 일이 생겨 극단 벅수골 대표를 만나기로 했다. 차를 강구안 공영주차장에 대고, 선배의 발길을 따라 중앙시장으로 들어갔다. “이런 곳에 소극장이 있어요?” 왁자지껄한 시장 안에, 그것도 지하 깊숙한 곳에 극단이 있다니 상상이 잘 안 됐다. 중앙시장 입구에서 안쪽으로 쭉 걸었다. 세 번째 교차점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극단 벅수골’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갔다. 왁자지껄한 밖과 달리 안은 조용했다. “어서 오세요”라고 말을 건넨 이는 제상아 씨. 극단 안살림을 도맡고 있다.

몇몇 사람과 인사를 하고 맨 나중에 만난 사람은 장창석 씨. 바로 극단 벅수골 대표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매서운 눈, 짙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그는 올해 예순의 연출가다. 첫인상은 깐깐하고 무서워보였지만, 1년 동안 여러 차례 만나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만날 때마다 마치 기자를 딸 대하듯 했다. ‘연극 직속 후배가 아니라서 그런가?’ <피플파워> 인터뷰를 계기로 장창석 대표와 다시 만났다. 약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는데, ‘언젠가 이 사람의 인생을 극으로 한 번 써 봐도 재밌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창석 극단 '벅수골' 대표./김구연 기자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오전 10시 30분 장 대표를 만났다)

“저는 아침밥은 안 먹어요. 극단 식구들이랑 같이 점심 먹는 게 첫 끼입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먹고 자고 다했다고 하던데….

“지하생활을 좀 했죠.(웃음)”

-대표님 젊었을 때 사진을 보니, 잘 생기셨더라고요. 예전에 인기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장 대표는 현재 미혼이다)

“(손사래 치며)지하생활을 많이 해서….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장창석 극단 '벅수골' 대표./김구연 기자

-배우로 활동했으면 큰 인기를 끌었을 것 같은데, 연출가로 오랫동안 활동하셨네요. 연극에 발을 딛게 된 이유가 뭡니까?

“알다시피 형(장현, 1944~1986)이 극단 벅수골 창단 멤버이자 창단 대표였습니다. 형이 한 5년 동안 극단을 운영해오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됐어요. 갑작스런 일이었죠. 장현 형의 바로 아래 동생인 장영석 형이 대표로 추대되고 제가 상임연출자 겸 벅수골소극장 극장장으로 역할 부담을 하게 됩니다. 연극을 하게 된 이유는 형(장현)의 영향이 컸죠.”

-그전에는 무엇을 했나요?

“군대 제대를 하고 올바른 직장을 갖지 못했어요. 언제든지 도망갈 궁리를 하는. 그런 상태? 놀고 있는 저를 보고 형이 무대미술이나 배우 등 잡일을 많이 시켰어요. 이것저것 많이 도와줬죠. 곁눈질로도 많이 배웠고요. 형이 돌아가시면서 본격적으로 연출을 도맡아했습니다.”

-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집안에 예술적인 끼를 가진 형제가 많아요. 하나는 영화배우 하겠다며 방앗간 하는 아버지한테 돈 달라고 난리였고, 또 하나는 시나리오 쓴다고, 또 하나는 셰익스피어에 미쳐 ‘사느냐 죽느냐?’ 타령만 하고…. 나도 어렸을 때 그림을 곧잘 그려서 서라벌예고에 입학하려고 했었죠. 건축학과를 나왔지만 수학하고는 안 맞더라고. 그림 그리는 데 취미가 있어서 형(장현)이 무대장치 좀 만들라고 하면 나름 잘했어요. 형이 ‘이 새끼 좀 하네’라고 칭찬을 했었죠.”

장창석 극단 '벅수골' 대표./김구연 기자

극단 벅수골은 1981년 창단했다. 장현, 장영석, 김윤일, 김철균, 박연주, 허동진, 강지건, 지태호, 김정희 등 9명이 주축이 됐다. 극단 사무실은 현재 문화동 우체국 주차장 터에 있던 수천당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창단 2년 만에 작품 <알>(작 이강백‧연출 장현)이 1983년 제1회 경남연극제에서 대상을 받고 제1회 전국지방연극제 경남대표로 참가하는 등 쾌거를 이뤘다. 연극전용극장이 없어 영화관이나 예식장을 빌려 공연을 하는 등 어려움도 있었다. 1985년 통영 중앙동 상가아파트 지하로 옮기면서 벅수골소극장이 생겼고, 이는 전용 소극장이 없었던 통영연극계에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가 된다.

-벅수골소극장에서의 첫 공연이 대표님이 연출하신 <방황하는 별들>인데요. 실제 첫 연출작품은 무엇입니까?

“1985년 통영수대 극예술연구회의 <호모 세파라투스>(작 이강백)입니다. 분단을 고착화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담긴 작품이죠. 극단에서 첫 연출을 맡은 작품은 1987년 <스트립티스>(작 s.므로체크)입니다.”

장창석 극단 '벅수골' 대표./김구연 기자

-형의 영향으로 우연히 연극에 발을 딛게 됐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출을 맡게 됐는데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극단 안 장 대표의 방안을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틈틈이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특히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로 익숙한 사뮈엘 베케트( 1906~1989) 작품을 자주 봤죠. 부조리극이나 리얼리즘극과 관련된 서적, 인문, 문학 등 가리지 않고 봤습니다. 통영에서는 책을 구하기 어려워서 서울 한 번 올라가면 종로서적, 교보문고에서 책 여러 권을 사왔습니다.”

-장 대표님이 연출하신 작품만 해도 현재 100여 편이 넘는데, 살펴보니 연대별로 작품 스타일이 바뀌었네요.

“작품은 많이 했는데, ‘히트작’이 없습니다.(웃음) 1980년대 당시 참 어려웠습니다. 친구들이 연극을 하는 저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며 무심코 건넨 말도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자격지심이고 콤플렉스였죠. 라면은 정말 많이도 먹었고…. 그때는 인간미로 가득하거나 저항의식으로 가슴 한 편이 부글부글해지는 연극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부조리극이 가미된 반사실주의적인 작품이었죠. 1990년대는 어중간한 작품이 많아요.(웃음) 성격도 명확하지 않고…. 90년대 후반 극단 재정도 어려웠고 기획공연이나 대관 공연도 거의 없었습니다. 2000년대 문화예술정책으로 하는 지원사업의 주관단체로 선정되면서 숨통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은 주로 관객이 쉽게 즐길 수 있고, 감동과 재미가 함께하는 것이 많았죠.”

-혹자는 ‘경남 연극계가 지원금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평을 내놓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 극단에서 만드는 작품도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아요.

“장단점이 있죠. 예전에는 연극에 미쳐서 단지 좋아서, 그것만 믿고 매진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희생을 한다면 보상이 뒤따라야 하는 게 현실이죠. 보람도 있어야 하고…. 내가 에이(A)라는 길을 간다고 해서 모두에게 그런 길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가 살아온 삶, 철학, 성장과정 등도 다르니, 지원금에만 의존한다고 해서 무조건 비판만은 할 수 없습니다.”

장창석 극단 '벅수골' 대표./김구연 기자

-2005년 들어서 지난 1986년과 1989년 시도했다가 계속되지 못한 소극장 축제를 조용히 부활했습니다.

“네. 1986년 벅수골소극장 개관 기념 축제인 ‘10월 연극축제’가 그것이죠. 1989년에는 창원, 마산, 거창, 통영 극단들이 통영에 모여서 ‘시월연극제’를 기획하기도 했었고…. 이후 1990~1991년까지 시월연극제가 거창에서 열렸습니다. 그것이 거창국제연극제의 태동이 된 거죠. 2005년 제1회 통영소극장축제는 소극장 연극의 가치와 장점을 극대화한다는 목적 아래 시작됐고요.”

-2007년 제3회 통영소극장축제에서는 ‘한국 신극 100년사에 미친 동랑의 영향'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심포지엄은 “친일 연극인 유치진의 공과 과를 모두 드러내고, 한국 연극사에 유치진이 미친 영향을 객관적으로 조명하기 위함”이라는 애초 의도가 발현되지 못한 채, 일방적인 ‘유치진 미화’로 흘러가고 말았다는 의견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유치진은 통영이 고향으로 1948년 김구 선생의 지시로 만들어진 '친일파 263인' 명단에 포함된 대표적인 친일파다. 그는 일제 말기 <흑룡강> 등 친일희곡을 쓴 극작가로 조선총독부 지시로 연극공연을 주도하기도 했다.)

“유치진은 친일 연극인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통영 연극의 역사에서 유치진을 빼놓을 수는 없을 정도로 많은 연극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치진을 미화시키려는 생각은 추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비판을 받았었죠. 뭐 저라고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마음고생 많이 했습니다.”

장창석 극단 '벅수골' 대표./김구연 기자

-2008년부터는 ‘통영연극예술축제’로 확대 개편됐고, 행사의 하나로 제1회 동랑희곡상을 공모했습니다. 또 비판을 받았었죠?

“시민세금으로 친일파를 기념하려 한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동랑 희곡상’ 시상금 1000만 원은 통영시로부터 지원받는 보조금 2억 원과는 별도로 자체부담으로 했습니다. 한국 연극사를 펼치며 선생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고, 특히나 통영의 극예술을 정리하기 위해서 불가분의 관계라 생각합니다. 역사는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점도 있고 사회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포지엄을 연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습니다.”

-2011년은 ‘통영연극예술축제’가 열리지 않았는데요. 이유는 뭡니까?

“통영시가 통영에서 열린 제29회 경남연극제 예산과 축제 예산을 한데 묶어 집행한 탓에 예산 부족으로 열리지 못했습니다. 2012년 다시 열리게 됐죠. 그 해에는 예산도 많이 줄어든 편이라 ‘동랑희곡상’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작품 <구두코와 구두굽>(작 김지숙‧)이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신나는 예술여행’에 선정돼 섬마을을 순회하며 공연을 하게 됐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섬마을에 다니며 순회공연을 하고 있는데요.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왔나요?

“통영이라는 지역적인 특성을 최대한 고려했죠. 통영은 섬이 많으니, 섬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연극을 공연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에서 사는 주민들에게 좋은 공연도 보여주고…. 특히 <퓨전춘향전>(작 공통창작‧)이 인기가 좋았습니다.”

장창석 극단 '벅수골' 대표./김구연 기자

-30년 넘게 극단을 이끌고 있는데, 현재 어려운 점은 없습니까?

“배우 수급난이죠.(웃음) 연출가로서 배역에게 맞는 배우를 골라야 하는데, 배우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그렇질 못합니다. 배우와 배역이 딱 맞아떨어질 때 히트작이 나오는데 말이죠. 그런 점이 어렵죠.”

-하지만 정작 서울에서는 워낙 배우가 많아서 한 배역을 따내기가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역할 하나를 따기가 어려운 편이죠. 반대로 생각해보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은 무대 설 기회가 많은 편이니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역이든 소화할 가능성이 있죠.”

-아까도 스스로 ‘히트작’이 없다고 하셨는데, 앞으로 목표는 히트작을 만드는 건가요?

“통영시 문화동 세병관으로 오르는 길가에 돌장승인 벅수가 있습니다. 마을의 재앙을 막고 평안을 기원하려고 세워졌죠.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그저 그 자리에서 바보처럼 묵묵히 마을을 지켜보는 벅수가 서 있는 곳. 그 일대를 통영사람들은 벅수골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앞으로 ‘벅수’처럼 묵묵히 연극 연출가로서 걸어가고 싶습니다. 저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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