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또 가고 싶다

이번 구간이 시작되는 산청군 시천면 사리는 덕산(德山)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선비 정신’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으로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며 평생 경(敬)과 의(義)를 실천한 선생의 발자취가 남명기념관, 산천재, 덕천서원, 세심정 등 많은 유적에 담겨 있다. 또 이곳은 낙동강의 제2지류인 덕천강(德川江)은 지리산 중산리와 대원사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합류하는 곳으로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다.

◇산청 덕산~하동 위태(10.3㎞)

남명의 무릉도원 덕천강

산청군 시천면 덕산리와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를 잇는 지리산 둘레길 9구간은 군(郡) 경계를 넘는 코스다. 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 편으로 1시간 남짓이면 덕산에 도착한다. 버스 편은 대략 1시간 간격으로 있어 큰 불편함이 없다. 덕산은 다른 면(面) 소재지와는 달리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4일과 9일 열리는 오일장도 있지만 비교적 시가지가 크게 형성돼 상설 점포가 유난히 많다. 시가지를 따라 8구간 종점인 사리까지 걷는 길에는 조식 선생의 묘소와 남명기념관, 산천재를 차례로 만난다.

중태마을가는길./사진 황상태

둘레길은 덕천강을 끼고 원리교까지 둑길이 이어진다. 구름에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지는 천왕봉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덕산 오일장을 지나면 원리교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대원사 가는 길과 왼쪽으로 중산리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길 왼편으로 조식 선생의 시(詩)를 새긴 시비(詩碑)와 도화정(桃花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시비에는 ‘두류산(지리산의 다른 이름) 양단수(두 갈래 물이 만나는 곳, 즉 이곳 덕산을 말함)를 옛날에 듣고 있다가/ 이제 와서 보니/ 복숭아 꽃잎이 뜬 맑은 물에/ 산 그림자까지 잠겼구나/ 아이야 무릉도원이 어디냐/ 나는 여기인가 한다’는 뜻의 시가 새겨져 있다. 이 시 내용을 풀이하면 조식 선생은 이곳 덕산을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는 무릉도원이라고 여긴 것이다. 시비 바로 옆 도화정은 붕괴 위험 때문인지 출입이 금지된 상태다. 둘레길 코스인 천평교를 건너지 말고 중산리 방향으로 발걸음을 조금 옮기면 남명의 제자인 최영경·하향 등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고자 세운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덕천서원은 1576년(선조 9년)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3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중태마을가는길./사진 황상태

덕천서원에서 나와 천평교로 향했다. 곶감 경매장이 있는 천평마을을 끼고 도는 덕천강을 따라 중태마을까지 3㎞ 남짓 둘레길은 농사철을 제외하고는 사람과 차량의 통행이 비교적 적어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이따금 민물고기를 잡는 지역 주민의 모습이 보였다. 길을 걷다가 달콤한 냄새에 이끌려 비닐하우스를 기웃거리는 데 잘 익은 딸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주인이라도 있으면 딸기 몇 개라도 얻어먹고 싶었지만 침만 꿀꺽 삼키고 돌아서야만 했다. 옥수(玉水)라는 이름의 샘과 팬션을 지나자 곶감의 고장답게 마을 전체가 감나무로 둘러싸인 중태마을과 만난다.

중태마을은 여느 시골과 다름없이 한적했다. 느티나무 정자 아래에 배낭을 벗어두고 바로 곁에 있는 지리산 둘레길 중태 안내소에 들렸다. 자상한 표정의 박성덕(64) 숲길체험지도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박성덕_숲길체험지도사./사진 황상태

국립공원공단에서 30여 년 근무하다 정년퇴직 후 지난 2월부터 이곳에서 일하신다는 박 지도사는 중태마을에서 머지않은 삼장면 출신이다. 자연과 더불어 평온하게 살아가는 주민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둘레길에 많은 사람이 찾아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평생 자연과 더불어 살아오신 이력 때문인지 둘레길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다. 아직도 많은 구간이 시멘트 포장길이어서 불편한 점이 많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지역 주민의 협조와 행정기관의 지원 부족을 꼬집었다. 제주 올레길, 북한산 둘레길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트레킹 코스임에도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부족한 데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일부이기는 하지만 식사·민박 요금이 너무 비싸 걱정이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모자람이 있어 여유롭네

박 지도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안내소 건너편 쉼터에 들러 주인 할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는 파전에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이며 갈증을 달랬다. 쉼터를 나서는 데 담벼락에 걸린 ‘중태리 쉼터’라는 이름의 색다른 간판이 눈에 들어와 카메라에 담았다. 하얀 고무신과 검정 고무신에 <부산모해(父山母海)>라는 제목의 글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는 산과 같고
어머니의 은혜는 바다와 같다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
세상 어떤 큰바람도
흔들리지 못할 산입니다.
험한 내 인생길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다 언제고 뒤돌아보면
나를 지키고 계셨던
큰 산입니다
어머니!
당신은 바다입니다.
나를 낳아 젖 먹이며 키우셨던
생명의 바다입니다
험한 내 인생길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다 언제고 뒤돌아보면
나를 응원해주시던
큰 바다입니다

중태마을쉼터./사진 황상태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지내던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나는 글이었다. 중태마을을 벗어나도 길 양편엔 감나무가 지천이다. 계곡물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했다. 땀을 식힐 겸 냇물에 손을 담그자 머리끝까지 시원함이 전해졌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그때 까만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뽕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행여 주민의 밭에서 키우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냥 개울가에 자라는 야생 뽕나무라는 것을 확인하고 오디 몇 개를 입에 넣었는데 달콤함이 오랫동안 입안에서 맴돌았다.

완만하게 계속되는 산길을 따라 유점마을로 향했다. 유점마을은 예전에 놋그릇을 만들던 마을로 놋점골이라는 이름이 지금도 전해지는 곳이다.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아랫마을에서는 보기 어려운 호두나무가 드문드문 보였다. 호두 열매는 언뜻 보면 배를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배하고는 전혀 다르다. 커다란 정자나무 세 그루가 있는 쉼터를 지나자 길 가장자리에 ‘사랑의 길 잇기’라는 이름의 표지석이 있어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표지석에는 ‘우리가 놓은 이 길 위에서 다른 이들이 그리던 꿈이 한걸음 다가가길 바랍니다’는 문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이 길을 걷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꿈을 이루었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다. 포장된 길 끝 자락에 갈치재로 오르는 길이 나왔다. 완연한 숲길이다. 갈치재는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 상촌마을과 산청군 시천면 내공리를 잇는 고개로 주산(831m)과 깃대봉(오대주산 642m)을 연결하는 능선이다.

/사진 황상태

갈치재에 올라서자 반대편 하동 쪽은 숲에 가렸지만 힘들게 지나온 중태마을과 놋점골이 한 눈에 들어왔다. 고갯마루에서 쉬어가는 사람을 위해 조그마한 쉼터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갈치재에서 위태리 상촌마을까지 이어지는 길은 9구간 가운데 가장 편안한 길이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대나무 숲길과 작은 저수지가 어우러져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길이다.

◇하동 위태~하동호(11.8㎞)

사람이 그리운 길을 걷다

지리산 둘레길은 전북 남원시와 함양·산청군을 거쳐 10구간부터 하동군으로 접어든다. 전체 둘레길 22구간 가운데 8개 구간이 하동군에 걸쳐 있다. 구례군과 산청군으로 이어지는 구간까지 보태면 모두 10개 구간에 이른다. 이번 구간은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 상촌마을에서 청암면 하동호까지 이어지는 11.8㎞의 10구간으로 양쪽 모두 접근성이 좋지 않아 비교적 인적이 드문 길이다. 또 구간 3분의 2지점에 있는 양이터재는 지리산 영신봉에서 출발해 김해 분성산까지 이어지는 낙남정맥이 거치는 구간이라 정맥꾼에게는 낯설지 않은 코스다.

9구간을 예정시간보다 일찍 마친 덕분에 위태마을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곧장 상수리 당산나무가 있는 안마을 지나 지네재로 향했다. 모내기를 마친 들녘은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할 정도로 조용했다. 가끔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가 정겹다. 상수리 당산나무 아래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시던 동네 어르신이 쉬엄쉬엄 가라며 손짓을 하셨다. 동네 사람 말고는 거의 사람의 통행이 없는 곳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반갑게 맞아 주셨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어디까지 가는지 물으시는 말투가 예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닮은 듯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오늘 밤 묵을 민박집 위치를 이리저리 찾다가 이곳에서 4.7㎞가량 떨어진 궁항마을로 정하고 전화로 예약했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서 크게 무리하지 않고도 해지기 전에 도착할 것 같아 다소 여유롭게 휴식을 취했다.

/사진 황상태

지네재로 오르는 길은 생각 이상으로 가파르다. 등줄기까지 한바탕 땀을 쏟아내야만 지네재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우리나라 지명은 대부분 그곳의 특징에 따라 정해지는 데 아마 이곳도 지네가 많은 곳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지네처럼 구불구불하다는 뜻인가. 골짜기 이름도 지네골이다. 다른 코스였으면 주말을 맞아 둘레길을 걷는 사람을 더러 만날 수 있었지만 일행이 오율마을 입구에 이를 때까지 사람 구경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한가로움과 여유를 충분히 느끼면서 숲길을 걸었다. 백궁선원 입구를 지나자 마을 전체가 수목원 같은 느낌의 오율마을이 나왔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둘레길 이정표를 잘 살펴야 한다는 점이다. 그냥 길 따라 무심코 걷다 보면 한참을 내려간 후에야 둘레길이 아님을 알고 후회하게 된다. 둘레길은 오른편 산길로 급하게 꺾어 올라야 한다.

궁항마을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숲길임에도 숨이 차고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궁항마을로 이어지는 아늑하고 평탄한 숲길에서 그 수고로움을 보상받을 수 있다. 솔잎이 깔린 흙길은 스펀지 위를 걷는 듯 푹신하다. 작은 개울을 건너 마을이 가까워지면 길옆 밭에서 자라는 복숭아와 매실이 익어가는 모습 또한 싱그럽다. 9구간 시작점인 산청군 덕산에서 8시간 남짓 걸려 궁항마을에 도착했다. 위태마을에서 전화로 예약한 민박집으로 향했다.

한 상 가득 자연을 차린 밥상

궁항(弓項) 마을은 ‘활목’이라는 뜻으로 하동군에 모두 3곳이 있다. 궁항정은 폐교된 위태초교 옛 궁항분교를 개조한 민박집이다. 하동읍이 고향인 강정근 선생님이 7년 전 인수해 부인과 함께 정착해 텃밭을 일구고 새로운 집을 지었다. 김해고에서 한문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한 강 선생님은 옛 모습을 보존하고자 교실과 칠판, 풍금 등 옛날 물건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교실 외벽에 걸린 종은 그 옛날 수업시간을 알리는 벨을 대신한 것으로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지금은 이곳을 찾는 손님에게 식사시간을 알리는 벨이다.

궁항정 밥상./사진 황상태

이 집은 이미 낙남정맥 종주에 나선 정맥꾼과 지리산 둘레길 탐방객에게 널리 알려진 명소다. 인심 후한 강 선생님 내외분의 친절함과 한 상 가득 자연을 차린 밥상 때문이다. 이날 저녁 밥상에 올라온 반찬 가짓수가 무려 17가지로 거의 한정식 수준이었다. 여기에다 가공식품은 하나도 없고 모두 텃밭과 주변에 구한 신선한 재료로 만든 반찬이었다. 열무, 연근, 죽순, 머위 줄기, 곰취, 취나물, 쑥갓, 참죽나물, 호박, 고들빼기에 강 선생님은 직접 텃밭에서 신선초와 당귀, 상추 등을 따다가 밥상에 올렸다. 이보다 더 좋은 건강 밥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동 그 자체였다.

/사진 황상태

반주로 내놓은 막걸리는 인근 양조장에서 직접 가져온 것으로 시중에 파는 병 막걸리와는 다른 진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든든하게 챙겨 먹고 강 선생님의 배웅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계단식 논과 밭을 따라 이어진 둘레길을 따라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걷는 동안 내내 궁항정 밥상에 대한 잔영이 지워지지 않았다. 양씨와 이씨가 마을로 들어와 형성된 양이터마을을 지나면 호젓한 산길이 계속 이어지고 낙남정맥 구간인 양이터재에 올라서게 된다.

양이터재에서 하동호가 보이는 본촌마을까지는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양이터재에서 한참 내려가다 보면 임도를 벗어나 숲으로 향하는 둘레길이 나온다. 이 숲 구간은 지금껏 거쳐온 어느 둘레길보다 아름다운 곳이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하늘을 가린 울창한 나무는 연신 상쾌한 향을 품어낸다. 잠시 자리 잡고 앉아 발을 담그고 싶을 정도다. 한가롭게 풀을 뜯다가 인기척에 놀라 화들짝 달아나는 고라니와 멧돼지 가족 등 자연이 살아있는 곳이다. 대나무 숲과 어우러진 숲길이 정겹다. 본촌마을 거쳐 하동호를 끼고 도는 길은 포장도로라 다소 지루하지만 하동호의 풍광 또한 산 속에서 느낄 수 없는 정취가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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