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구간 남원 주천에서 인월까지

몇 해 전부터 ‘걷는 여행’이 새로운 여행 테마로 자리 잡았다. 그 열풍의 시작은 제주 올레길이었다. ‘평화의 섬’ 제주를 상징하는 올레길을 다녀간 연간 100만 명 이상의 육지 손님은 적지 않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 뱃길, 하늘길을 건넜다. 그 많은 수고로움에도 많은 올레꾼은 그곳에서 ‘걷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자신의 존재 이유와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깨닫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걷는 것은 느림이다. 느림은 생각하게 하는 여유로움을 준다.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것이 아니라 앞뒤 모두를 바라보며 살피는 ‘관찰’이 바로 걷는 즐거움이자 여유인 셈이다. 우리가 사는 인근에 이런 길이 있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넉넉함으로 사시사철 모두를 품는 지리산이다. 그곳에 길(道)이 있다.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 지나는 ‘지리산 둘레길’이다. 제주 올레길 425㎞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긴 274㎞의 이 길은 모두 22개 구간으로 자연과 생명의 메시지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난 2007년부터 전 구간이 완성된 2012년 5월까지 한 땀 한 땀 수놓듯 마을과 마을을 잇고 그 길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허허로움을 달랠 수 있도록 보듬고 다듬었다. 이 길을 제안한 지리산 순례자는 모든 생명체가 공존과 화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나눔과 되돌아봄의 길이기를 염원했다. 그렇기에 지리산 둘레길은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피플파워>는 독자와 함께 나누는 ‘걷는 즐거움’, ‘느림의 미학’을 제대로 체험하고자 대중교통 이용, 마을 민박집 묵어가기 등을 통해 지리산 둘레길의 속살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3월호부터 지리산 둘레길 22개 구간을 매회 2구간으로 나눠 모두 11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사진 임용일 부장

지리산 서북 능선 달빛에 물들다
1구간 남원 주천~운봉까지(14.3㎞)

기자는 창원시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남원행 첫차인 오전 7시 37분 발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진주와 산청, 생초, 함양을 거쳐 전북 남원 인월, 운봉을 지나 남원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진주에서 버스 사정으로 30분 이상 지체한 탓에 예정시간보다 다소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터미널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터미널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주촌행 버스를 50분 남짓 기다려 첫 구간 출발점인 외평마을에서 내렸다.

/사진 임용일 부장

전북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 외평마을과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를 잇는 14.3㎞의 이 구간은 만복대~정령치~고리봉~세걸산~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 능선 조망이 압권이다. 지리산 둘레길 1구간 시작점을 알리는 표지판에서 인증 샷 한 컷을 남긴 후 오른쪽으로 뻗은 지리산 서부 능선을 조망하면서 돌다리가 놓인 작은 냇가를 건넜다. 눈꽃을 피워 눈이 시리도록 하얀 만복대와 정령치가 손에 잡힐 듯 한눈에 들어왔다. 지난 계절의 풍요로움을 모두 떨어뜨려 낸 들녘은 황량함, 쓸쓸함, 외로움이 연상되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함께 한 길동무가 있어 기자는 외롭지 않았다. 30분 남짓 여유롭게 지리산을

/사진 임용일 부장

 조망하면서 옮긴 발걸음은 어느새 소나무 숲에 다다랐다. 비교적 넓은 공터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나무 몇 그루, 앉아서 쉬어 가기 좋을 듯한 바위가 있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이곳은 개미정지(개미정자)로 그 옛날 회덕에서 남원장으로 가던 장꾼의 휴식처이자 임진왜란 당시 활동했던 의병장의 얼이 서린 곳이다. 해발 500m가 넘는 구룡치까지 2㎞의 소나무 길은 적지 않은 경사가 있어 한두 번 쉬어야 오를 수 있다. 첫 번째 쉼터는 솔정지(솔정자)로 발아래 주천 들녘과 아름드리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잠시 사색에 잠기는 장소로 손색이 없다.

동료와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걷는 길은 어느새 이번 구간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구룡치를 가리켰다. 솔향 그윽한 둘레길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으며 걷는 기분이 묘했다. 그 옛날 머리에 이고 등짐을 지고 이곳을 거쳐 멀리 남원장까지 장보러 갔던 선조의 고단한 삶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남은 거리에 대한 부담이 없는 둘레길은 생각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어 편안했다.

잠시 길을 내려서는 데 특이한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용 소나무로 이름이 붙여진 소나무로 연리지(連理枝)였다. 용(龍) 소나무는 비상하려는 용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용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거나 소원을 빌면 행운과 건강이 오래오래 이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신령스러운 나무이다. 용 소나무 아래 팻말에는 소설가 윤영근이 쓴 ‘사랑은 하나이어라’는 시(詩)가 적혀 있다. ‘백두대간 천 세월 묻어둔 이야기로/ 아낌없이 몸 비벼 싹 튀운 정/ 산 속에 잠재운 그 사랑노래/ 늘 아름답구나’.

길은 장꾼의 무사함을 빌었다는 사무락 다무락을 지나 회덕마을 초입으로 이어졌다. 길옆 비닐하우스로 지어진 회덕 제일 쉼터라는 주막에 들러 인심 후한 할머니가 손수 만들어주신 김치전과 막걸리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회덕마을에 사시는 이 할머니는 우리 일행에게 난생처음 맛보는 무전을 만들어 주셨다. 무를 얇게 잘라 삶은 후 파전처럼 구워 내놓았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했다.

/사진 임용일 부장

이곳에서 백두대간 종주대장을 지낸 길동무를 만나 함께 길을 나섰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노치마을이 새로웠다. 백두대간 종주 때 이곳을 거쳤기에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노치샘과 수령 500년이 넘는 소나무 당산까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농로길을 따라 곧장 걸음을 옮겼다.

덕산 저수지를 끼고 도는 농로길은 추운 날씨 탓에 우리 일행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깨끗한 동복 오씨 묘역 아래 마음을 닦는다는 뜻의 심수정(心修亭)에 올라 덕산 저수지를 바라보면 진짜 마음을 닦는다는 기분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거침없이 내달렸던 백두대간 능선, 남들보다 앞서가고 싶었던 일상 등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사진 임용일 부장

묘역 바로 앞에 있는 쉼터를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드는데 저 멀리 바래봉 위로 섣달 보름달이 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눈꽃이 활짝 핀 바래봉 정상의 월출(月出)은 장관이었다. 람천을 따라 이어진 둑길은 차디찬 겨울바람에 몸을 맡긴 무성한 갈대의 군무(群舞)가 계속됐다.

1구간 목적지인 운봉까지 4㎞ 이상 남은 터라 일행은 하룻밤 이곳에서 묵기로 하고 행정마을 앞 다리를 건너 삼산마을 민박집을 찾아 들어갔다. 둘레길을 찾는 이들로부터 인기가 좋은 ‘장수 민박’이다. 고풍스러운 돌담을 지나 집으로 들어서자 넓은 마당과 행랑채, 안채가 나왔다. 주인아주머니의 안내로 묵을 방을 잡았다. 미리 연락하지 않은 탓에 저녁밥 준비가 안 돼 일행이 미리 준비한 요깃거리와 주인아저씨에게 부탁해 산 흑돼지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인 푸짐한 저녁이 금방 마련됐다.

주인아주머니는 마당 한쪽에 심어둔 배추와 김장김치를 내어주시면서 먼 길 온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장작불에 올려 구워진 삼겹살과 김치, 소주가 곁들어진 저녁은 그 어느 산해진미도 부러울 것 없는 진수성찬 그 자체였다. 도란도란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며 입가에 새까만 숯검정이 묻는 줄도 모르고 먹었던 군고구마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깨끗하게 지어진 시설 좋은 숙박시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낭만이 묻어난 지리산 아래 마을에서의 하룻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사진 임용일 부장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든 탓인지 새벽 일찍 잠에서 깬 일행은 민박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 주인 내외분이 정성껏 차린 아침 밥상 앞에 모였다. 화려하지 않은 밥상이었지만 푸짐한 ‘건강 밥상’이었다. 도시에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각종 산나물에 집에서 기른 닭이 낳은 란, 깊은 맛이 배인 김치, 장아찌 등에 홀려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아침밥을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 경험이 언제였던가 할 정도로 훌륭한 밥상이었다.

숙박비(1인 1만 원)와 밥값(1인 한 끼 5000원)을 치르고 다시 길을 나섰다. 1구간의 끝이자 2구간 시작점까지 2㎞ 남짓 걸어야 한다.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은 탓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양묘장을 지나 마치 70년대 도회지를 연상케 하는 운봉읍에 들어섰다. 운봉읍 시가지를 가로질러 운봉초교 앞 조그만 가게에서 커피를 마시고 다시 2구간 시작점인 서림공원 입구에 다다랐다.

둑길 따라 눈보라를 헤치고 가다
2구간 남원 운봉~인월까지(9.4㎞)

일행 중에는 퇴직 후 트레킹 여행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 그 계획을 잠시 옮기면 먼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 옛날 순례자는 스페인 북부에서 시작해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성지까지 걸으면서 구원을 얻고자 걸었다. 그 길은 이제 전 세계인이 찾은 세계 3대 트레일로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일으켰던 제주 올레길도 여기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다음은 ‘걷는 자의 꿈, 존 뮤어 트레일’로 이 길은 요세미티 계곡에서 미국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휘트니 봉에 이르는 358㎞의 대장정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외로운 길이다. 이 두 길 모두 욕심을 버려야만 성공할 수 있다.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이번 둘레길에서 마치 그곳을 걷는 심정으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뚜벅뚜벅 걷고 있다.

/사진 임용일 부장

운봉~인월 구간은 해발 500m의 운봉고원 평지가 계속 이어지다가 지리산 초입을 경험하게 하는 코스다. 운봉고원 들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모내기를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곳이다. 오른쪽으로 바래봉과 고리봉을 잇는 지리산 서북 능선, 왼쪽으로 수정봉~고남산이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좌청룡 우백호처럼 둘레길을 찾은 순례자를 감싸준다. 람천을 따라 이어지는 둘레길은 지루할 만큼 평지로 한가로운 풍경이다. 둘레길을 끼고 도는 람천은 차가운 얼음장 밑으로 봄을 재촉하는 물이 유유히 흐르고 마을 수호신인 당산나무 숲은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오가는 길손의 안녕을 비는 모습이다.

2㎞ 조금 넘게 걸으면 이성계·이두란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해 세운 황산대첩비와 국악의 성지가 나온다. 이 구간이 역사와 문화가 흐르는 길이라는 안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특히 이곳 비전마을은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인 가왕(歌王) 송흥록 선생의 생가와 이를 무대로 조성한 소리 정원이 있다. 박초월 명창도 이곳 출신이다. 따라서 비전마을은 ‘국악의 성지’로 전국에서 수많은 소리꾼이 다녀가는 곳이다. 매서운 눈보라를 잠시라도 피할 요량으로 비전마을 노인회관을 찾았다.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안내해주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사진 임용일 부장

소리 정원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판소리를 뒤로하고 둑방을 따라가면 왼쪽으로 군화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지난 1961년 대홍수 때 소멸된 화수리 이재민의 가옥을 군인이 주둔하면서 건립하였다고 해서 군화마을로 이름 지어졌다. 큰길이 나면서 지금은 농로 역할을 하는 마을 앞 도로를 따라 난 둘레길은 길을 건너 지금은 문을 닫은 대덕리조트를 가로질러 옥계호로 이어진다. 옥계호를 지나 지그재그로 계속되는 임도를 따라 오르다 보면 연방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지난 2002년에 개장한 흥부골 자연휴양림이 나온다. 이곳에서 덕두산 정상까지는 대략 1시간 30분 정도 걸리고 울창한 잣나무 숲이 삼림욕에 그만인 곳이다.

점심때가 되어 일행은 진해에서 살다가 몇 해 전 이곳으로 왔다는 한선자 씨 부부가 운영하는 둘레길 쉼터에서 라면으로 속을 채웠다. 지난밤 묵었던 민박집에서 만난 삼부자와 만나 인사를 나누고 막걸리도 한잔 건넸다. 아버지는 아들 둘을 데리고 왜 이곳 둘레길에 왔을까. 공부에 지치고 게임과 오락에 빠져든 도시의 아이들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일러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바쁜 일상에 쫓겨 나누지 못했던 부자간의 정을 돋우고자 찾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정겨운 모습이었다.

서두르지 않았는데도 일행은 2구간 마지막인 월평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담벼락 벽화가 푸근했다. 3구간 출발지가 어디인지를 확인한 일행은 버스터미널 초입에 있는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서 장작난로의 온기를 느끼면서 커피 한잔으로 두 구간 걷기 여행을 마쳤다.

/사진 임용일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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