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학춤을 추니 남편이 화폭에 담더라

“2003년 마산 공설운동장 체육관에서 경남민속경연대회가 열렸는데, 연등바라춤을 추는 한 여인에게 첫눈에 반했죠. 원래 제가 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데, 그전부터 춤 사진을 찍으러 여러 군데 돌아다녔습니다. 그 여인은 지금 두 딸의 엄마이자 제 아내인 서남주 씨입니다.”

김완수 씨는 탈춤·승무·학춤·살풀이 등 전통춤의 가락과 움직임을 화려한 오방색으로 표현하는 작가다.

그의 아버지는 고(故) 김영진 선생으로 서울대 미대를 나와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경남도지회장을 맡았다. 그의 삼촌은 미술평론가인 김영재 씨며 고모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역시 그 부모에 그 자식이고 피는 못 속이는 법일까. “그림쟁의 삶은 고달프다”며 화가의 길을 반대한 아버지의 말을 쿨(?)하게 무시하고 김완수 씨도 작가의 길을 걸게 됐다.

그는 1983년 창원대학교 미술학과 재학시절 중앙미술대전에서 특선을 받을 정도로 젊었을 때는 잘 나갔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그의 작업에 브레이크가 걸리기 시작했다.

부부 예술인 김완수 서남주 / 사진 김구연 부장

“열심히 살려고 해도 뭔가 안 되는 거예요. 집세는 몇 년 씩 밀리고, 작품은 뜻대로 되지도 않고…. 한번은 죽으려고 술을 엄청나게 먹고 책상에 올라갔는데 그만 넘어지고 말았어요. 죽으려고 했는데 죽지는 못하고 떨어져 다치기만 했죠.”

마음을 고쳐 잡았다. 대학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탈춤과 같은 전통춤을 ‘한’이 아닌 ‘신명’으로 풀어보고자 했다. 책방에 가서 춤과 관련된 서적은 죄다 모았고, 전국을 다니면서 전통춤과 농악을 봤다. 사진의 구도도 모른 채 수동 카메라와 수십 개의 필름을 들고 공연장에서 연거푸 셔터를 눌러댔다. 현장에 직접 가 그때의 분위기를 몸소 느끼는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지금의 아내도 경남민속경연대회가 열렸던 마산 공설운동장에서 만나 2005년 결혼에 골인했다.

-어떻게 인연이 시작된 거예요?

서남주 “공연을 끝내고 쉬고 있는데 한 남자가 ‘여기 있네’라며 저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러더니 갑자기 ‘이름이 뭐냐’, ‘사진을 찍었는데 그림을 그려도 되느냐’며 묻는 거예요. 어안이 벙벙하고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당시 인솔자였던 김덕명 선생님한테 물어보라고 했죠. 선생님이 허락을 했고, 공연이 있을 때면 그이가 와 사진을 찍어줬죠. 좋았어요.”

김완수 “여러 사람이 나와서 춤을 추는데 한 여인만 제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 사람만 줄기차게 찍었죠. (웃음) 김덕명 선생님이 허락도 했고, 사진을 핑계로 그 뒤에 계속 만났죠.”

-김덕명 선생은 경상남도 지방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원시보유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서남주 “네. 맞습니다. 양산학춤을 사사하였습니다.”

부부 예술인 김완수 서남주 / 사진 김구연 부장

-정확하게 양산학춤이 뭔가요?

서남주 “양산학춤은 신라 선덕여왕15년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한 이래 의식무로 대대로 전해져왔어요. 현재는 민간에서만 그 맥을 잇고 있죠. 양산학춤은 학의 24가지 동태를 춤으로 표현한 것으로 학의 날갯짓, 다리놀림, 고갯짓 하나하나 섬세하고 고고하게 표현하죠.”

김완수 씨는 예전엔 무작정 필름카메라를 들고 공연장을 찾았다. 수천 장을 찍었는데 막상 인화해보면 사진이 별로였다고. 그는 현장에서는 ‘바로 이거야’하면서 찍었는데 집에 오면 ‘에이 아니잖아’라고 실망하기 일쑤였다. 춤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과 춤에 대한 특징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만나면서 춤에 대한 지식도 높아졌고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김완수 “예전 제 그림을 보면 표정과 동작이 강렬해서 무서운 편이에요. 근데 부인을 만나면서 부드럽고 온화하게 바뀌었어요. 구도가 안정되고 색감도 차분해지고, 여백의 미도 살아났죠.”

-춤 축제나, 춤 경연대회가 열리면 같이 가겠네요?

김완수 “네. 그렇죠.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로 찍지만, 예전에는 수동 카메라로 찍었어요. 필름을 가방에 잔뜩 들고 아내하고 공연장을 쫓아다녔죠. 한 번은 필름 현상 공장에 제 필름을 맡겼는데 현상비가 공장도가로 100여만 원이 나온 적이 있었어요. 아내도 찍고 저도 찍고…. 춤에 서로 빠져있었던 터라, 돈 생각 안 하고 막 찍었습니다.(웃음)”

서남주 “남편은 저보다는 카메라를 잘 다뤄요. 하지만, 춤 동작에서 키포인트는 제가 잘 알고 있죠. ‘이 동작 다음에는 어떤 동작이 나온다’는 등 춤에 대한 맥락은 잘 짚지만, 사진의 구도는 엉망이에요.(웃음)”

-양산학춤을 추는 서남주 씨를 모델로 한 작품도 있나요?

서남주 “많죠. 에피소드 하나 말해줄까요? (집 앞에서 췄던 양산학춤 사진을 보여주며) 올해 7월 불볕더위가 한창일 때, 갓과 도포 차림의 선비 복장을 하고 남편과 사진을 찍으러 나갔어요. 학춤은 버선발로 잦게 내딛는 발동작이 포인트인데 그때 당시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땅바닥이 뜨거운 거예요. 할 수 없이 전각에 올라가서 뺑뺑이 돌면서 춤을 췄죠. 정확한 동작을 카메라로 잡아내고자 같은 동작을 수도 없이 반복했는데, 죽을 맛이었죠.”

한 명은 춤을 추고 한 명은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고…. 부부라서 행복하고 예술가라서 더 행복한 그들을 만나니, ‘비슷한 사람을 만나야 행복하게 산다’는 말이 일리가 있어 보였다.

-부부 예술가니, 참 좋겠어요.

부부 예술인 김완수 서남주 / 사진 김구연 부장

서남주 “좋은 점이야 앞서 말한 것처럼 비슷한 일을 하다 보니 남편과는 ‘척하면 탁’ 호흡이 잘 맞죠. 서로 행동반경이 부처님 손바닥 안 일정도로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다툴 때도 물론 있습니다. 개성이 강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다 보니 심하게 싸울 때도 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죠.”

김완수 “아옹다옹살고 있죠. 요즘 가을을 타는지, 작업도 바쁘고 자꾸 짜증을 내는 제 자신이 미워집니다. 가을 우울증 조심하세요.(웃음) 지금은 결혼한 지 10년이 넘어서 웬만한 싸움은 피할 수 있습니다.”

김완수 작가는 올해 초 경남도립미술관 현역작가초대전에서 ‘아버지의 고향’이란 주제로 전시를 열었다. 총 19점이 전시됐는데,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면서도 토속적인 정감을 제대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밑그림을 분청사기의 목단문, 수운칠보문양, 떡살문 등을 응용해 10여 차례 덧칠한다. 밑그림에 춤사위가 잘 포개지도록 최대 몇 년 동안 그리고 마르기를 반복하고 마지막은 절제된 명암처리로 작업을 한다. 캔버스와 유화, 아크릴은 서양재료인데, 완성된 작품을 보면 한국적인 맛이 물씬 느껴진다.

김완수 “전통춤이 무시되고 무거운 감이 있잖아요. 이것을 아름답게, 예쁘게 표현하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의 작품을 통해 우리나라의 것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그의 삼촌이기도 한 김영재 미술평론가는 “익명성을 앞세운 가면은 감정처리를 완화하고 중화시켜주는 작용을 하지만, 김완수 씨의 회화에서는 가면 속의 감정이 가면을 뛰어넘어 보는 사람의 가슴 속까지 파고들어간다”고 평할 만큼 그는 인간 내면의 깊은 울림을 화려한 오방색으로 생생하게 표현하는 게 특징이다. ‘한국적인 서양화’의 맛이 난다고나 할까.

-앞으로도 아내인 서남주 씨와 함께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겠네요.

 왼쪽부터 서남주무용가, 김민지기자,김완수화가 / 사진 김구연 부장

김완수 “네. 전시회를 통해서도 그렇지만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서도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할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아내가 추는 ‘양산학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고, 제 작업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과정도 공개하고 싶습니다.”

서남주 “다음에 전시가 열린다면, 오픈식 때 제가 직접 양산학춤을 추는 모습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평면적인 회화와 입체적인 춤이 만나면 어떤 모습일까 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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