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사람] 더 주고 또 주는 국숫집 주인 송미영 씨…"가난한 시절에 굳힌 신념"

개점 2개월 만에 페이스북 '창원시' 그룹 회원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는 음식점이 있다. 회원마다 음식 맛과 식당 주인이 베푸는 넉넉한 인심에 홀딱 반했다. 친구가 친구를 부르고 그 친구가 또 다른 친구를 부르며 소문이 널리 퍼졌다. 창원시 성산구 내동에 있는 '호호국수'. 사골 국밥과 수육, 국수를 파는 식당이다.

김밥 1000원, 국수 3500원, 돼지·순댓국밥 5000원, 수육백반 8000원, 수육 1만 5000~2만 원, 모둠 수육 3만 원. 예약을 해야 하는 수육 요리를 뺀 나머지 식사는 먹성만 받쳐주면 몇 곱빼기를 먹어도 돈은 더 받지 않는다. 공깃밥도 마찬가지다. 자리에 앉자마자 곱빼기를 시키겠느냐고 묻던 종업원은 먹는 중에도 수시로 모자람이 없는지 챙겼다. 괜찮다는 손님과 더 드시라는 주인집 실랑이는 계속 이어졌다.

손님과 더 드시라 실랑이할 만큼 넉넉한 인심으로 문 연 지 2개월 만에 유명해진 '호호국수' 송미영 씨. /이승환 기자

◇배고픈 서러움 누구보다 잘 알아 = 아버지가 폭발물 사고를 당했다. 사고는 순식간에 아버지의 두 눈과 두 팔을 앗아갔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4남매는 갑자기 아버지도 반쯤 잃게 됐다. 소녀가 7살이던 해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주저앉지 않았다. 동냥으로 4남매를 꿋꿋하게 키웠다. 소녀는 억척스러워야 했다. 17세가 된 소녀는 꿈을 접고 묵묵히 가족을 짊어졌다.

"아버지가 자장면을 사줄 때가 있었어요. 더 먹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지요. 먹성 좋은 남동생은 식당에서 항상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부터 내가 식당을 차리면 누구든 배고프게 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호호국수' 송미영(43·창원시 의창구 봉곡동) 사장이 손님이 손사래를 칠 때까지 음식을 눌러담는 이유다.

송미영 씨는 17살 때부터 안 해 본 일이 없다. 신문 배달부터 음식 배달, 주방일 등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동생들을 키웠다. 그리고 느지막이 차린 첫 식당. 송 씨는 그것만으로 행복했다.

"남는 게 별로 없어도 행복해요. 재료 속이지 않고 손님 대접하고, 손님들은 만족하고, 그런 게 좋지요."

◇마음에서 나와 발품으로 짓는 인심 = 송미영 씨는 넉넉한 인심 때문에 더 부지런해야 했다.

"새벽부터 싸고 좋은 재료를 찾아다녀요. 따로 사람 안 쓰고요. 24시간 끓이는 사골 국물 솥은 연탄에 얹어요. 가스를 쓰면 감당 못하지요. 내가 더 움직여서 비용을 아낀 만큼 손님께 더 드릴 수 있어요."

평생 다른 식당에서 일하던 품은 '호호국수' 맛을 만들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식당을 열기 전 2개월 동안 육수 개발에 공을 들였다. 송 씨는 그렇게 만든 100% 멸치 육수에 대한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마음과 발품이 넉넉한 인심을 만들었다 해도 김밥 1000원은 또 어떤가. 덤덤했던 송 씨 목소리가 흔들렸다. "제가 일만 한다고 자식들에게 밥을 제대로 못 먹였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아들이 많이 아파요. 얼마 남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1000원만 있으면 배 곯지 말라는 것이에요."

◇아버지, 그리고 '호호국수' = '호호국수'라는 상호는 아버지 생각이다. "제가 아버지께 국수를 맵게 드리는데 너무 매워서 '호~호~' 하면서 먹는다고 '호호국수'가 됐어요."

눈과 팔을 잃고도 4남매를 놓지 않았던 아버지. 그러면서도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 줄 알았던 사람. 송미영 씨는 어느새 닮아버린 아버지와 함께 산다. 그리고 새로 짝을 맺어드린 어머니도 함께 모신다.

이야기 내내 더는 바랄 게 없다던 송미영 씨. 하지만, 더 큰 꿈 얘기를 조르자 조심스럽게 풀어놓았다.

"가게가 커지면 1층에는 식당, 2층에는 미용실, 3층에는 불쌍한 아이들 데려와서 공부시키고, 일도 함께 하고 월급도 주고…. 이제 기초공사를 했으니 나중에 그런 날이 오지 않겠어요?"

미용실이라니? "언니 미용사 자격증도 있어요." 식당에 들어왔을 때부터 더 드시라고, 더 드시라고 했던 종업원은 바로 송미영 씨 여동생이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