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투력 가족끼리 서열이 있나? 그럴 리 없지.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는 평등할 수밖에 없잖아. 여기까지 이론이고 실제는? 딸이 엄마에게 묻더군. "엄마, 갱년기 엄마와 사춘기 딸이 싸우면 갱년기 엄마가 이긴다던데?" "당연하지." 정다운 분위기와 달리 내용은 살벌하지 않아? 터져 나온 웃음을 참지 못했더니 둘 다 나를 보더군. 마치 고래 싸우다가 새우 보는 눈이던데. 그러니까 내 전투력이 가장 낮다는 거 아니야? 그저 갱년기와 사춘기가 겹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2. 서열 회사 후배 덕에 아주 가성비 높은 태블릿...
1. 성숙 "내가 사는 집에는 인간이 세 명이야. 식탁 의자는 네 개고. 누가 봐도 나머지 한 자리가 내 것이라는 것쯤은 상식 아닌가? 그런데 이 아빠라는 인간은 밥 먹을 때마다 나보고 비켜야 한다고 우겨. 진짜 어이없지 않아? 자기 자리에서 내려오라며 심하면 분무기로 물을 뿌리기도 하지. 정말 몰상식해. 그나마 엄마가 한결 나은 게 자기 자리에 내가 앉으면 옆에 빈 의자와 내가 앉은 의자 위치를 바꿔서 앉아. 뭔 차이겠어? 엄마가 훨씬 성숙하다는 거지. 야옹." 2. 인문학 "가끔 인간들이 인문학, 인문학적 성찰, 인문학적 ...
1. 구해주세요 언젠가 딸이 안긴 채로 뒤로 슬슬 넘어가더군. 아빠가 당연히 잡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나 봐. 당연히 모른 척했지. 원래 자세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넘어가네. 어쩌라고? 아주 애절하게 아빠를 부르기 시작했어. "아빠, 아빠, 아빠!" "구해줘요 해야지." "아빠, 구해줘요." 아주 숨이 꺽꺽 넘어가더군. 빤히 쳐다보면서 손가락 아홉 개를 펴서 '구(9)' 해줬어. 물론 완전히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는 순간 등을 받쳐줬고. 2. 몇 시에요? "아빠, 몇 시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딸이 묻더라고. 살짝 ...
1. 버럭 "내가 아무 예고 없이 깨문다거나 발톱으로 할퀸다면 장담하건대 아빠 양반은 아주 난리를 칠 거야. 무슨 이유가 있든 말든 상관없이. 그러니까 갑자기 엄마와 딸 꼬맹이 앞에서 버럭하지마. 갑자기 깨물고 할퀴는 것보다 더 상처받거든. 그리고 그 버럭이라는 표현 방식 말이야, 너무 미성숙하잖아. 야옹." 2. 고민 "아빠 양반이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내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거 알아. 그런 재능이 절실할 때도 있지. 그런데, 아빠 양반. 더 중요한 것은 어려운 문제는 어렵다고 인정하는 거야. 정말 어려운 문제를 쉽게 ...
1. 타블렛 딸은 컴퓨터로 그림 그리기를 즐겨. 한동안 마우스로 끄적거리는데 종종 아쉬워하더라고. 세밀한 표현이 되지 않는다나. 펜이 들어 있는 노트북 광고에 푹 빠지더라고. 생일을 맞아 노트북에 연결하는 타블렛과 펜을 선물했지. 컴퓨터 도매상가에서 타블렛을 구입하니 어찌나 좋아하던지. 입꼬리가 치솟고 눈가마저 촉촉해지는데 당황스럽더라고. "필압이 느껴져서 너무 좋아요." 선을 더 세밀하게 그릴 수 있다는 거지. 최근 며칠 동안 엄마 대비 아빠 영향력이 부쩍 늘었다는 것을 체감해 선물은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을 위한 것...
1. 절박함 "절박하다는 게 뭘까. 그런 거 따로 없어. 아빠 양반은 뭔가 간절할 때 튀어나오는 무엇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살면서 그런 게 뭐 얼마나 되나? 뭔가 하지 않아도 되거나 피해도 되는 헤아릴 수 없이 차고 넘치는 이유 속에서 가까스로 해내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는 과정이 바로 절박한 거야. 참! 그리고 햇살 드는 자리에 책 같은 거 놓지 않게 누나 꼬맹이 좀 교육시켜 줘. 야옹." 2. 매력 "잘생겼다거나 성격이 좋다거나 말을 잘한다거나 노래를 잘 부르거나 뭐 인간들이 매력을 느끼는 지점은 다양한 것 같아. 그런데...
1. 비법 운동 부족이 걱정되는 딸에게 검도를 권했어. 흥미를 느끼는 듯해 다행이다 싶어. 하루는 선배 언니에게 비기를 전수받았다더군. 지역대회 우승 경력도 있는 고수라네. "먼저 움직이면 안 된다던데.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상대가 공격하면 그 공격에 맞춰 역으로 공격하면 된대." 그러니까 그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잖아. 그래도 말하는 거 보니 그 언니가 고수인 것은 분명해. "참! 아빠가 전에 얘기한 것처럼 '머리' 외치고 허리 때리면 점수 안 준다던데." 내가 그랬었나? 내용을 보니 내 생각이 분명해서 부끄러웠어. 어쨌든...
1. 무술년 "아빠, 올해는 무술년이니까 술 먹지 말기" 2018년 첫날 딸이 요청하더군. 워낙 약점이 없는 아빠다 보니 음주 말고 시비 걸 게 없나 봐. 무술년이라, 술 앞에 없을 무(無)가 붙었으니 금주하라고? 그럴듯한 압박이었지만 쉽게 물러날 수 없었어. "무한대로 술을 마시는 해 아닐까?" 딸이 아주 콧방귀를 제대로 뀌더군. 진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한심한 표정까지. 세련된 제안을 뭉개는 게 못마땅했나 봐.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아직 정유년이라는 거 아닐까? 2. 견제 딸이 점점 강도 높게 아빠 음주를 견제하...
1. 디테일 "엄마는 그래. 내가 울면 사료가 떨어졌는지, 간식이 필요한지, 안아 줘야 하는지, 새 물로 갈아야 하는지 잘 알아. 아빠 양반? 말도 마. 운다, 크게 운다, 이상하게 운다 세 가지로 구분해. 장난해? 자기가 나 때문에 힘든 것은 몇 년 전 일부터 상세하게 말할 줄 알면서 내가 자기 때문에 힘든 일은 모르쇠야. 미숙한 인간일수록 자기 문제만 섬세하고 남 일에 대범해. 성숙한 인간일수록 남 문제에 섬세하면서 자기 일에는 대범하더라고. 안 그런가, 아빠 양반? 야옹." 2. 발톱 "현명한 고양이는 사냥을 하거나 뭔가...
1) 유소년 마트에 함께 간 딸이 야구 글러브를 한참 보더군. 그런 게 흥미를 끌 줄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 이리저리 돌려 보길래 점점 의아해졌어. "왜? 글러브 가지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왜 유소년 글러브야? 유소녀는 야구 안 해?" 듣고 보니 그렇더라고. 유소녀는?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졌어. 딸은 '유소년 체육관' 얘기를 들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네. 그런 문제의식이 참 대견했어. 게다가 유소년·유소녀 쓰지 말고 '어린이'로 바꾸면 좋겠다는 대안도 훌륭했지. 막상 어른도 대안 없이 지르고...
1. 배려 "별 보잘것없는 인간이지만 가끔 대견하다 싶은 게 있어. 바로 배려하는 모습이지. 인간들이 잘난 척하려면 이런 심성을 가꾸고 내세울 줄 알아야 해. 기술이 어떻고 지능이 어떻고 도구가 어떻고 같은 거 말고. 하지만, 역시 인간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내가 지켜보면 제멋대로인 인간일수록 더 배려받는 것 같더라고. 오히려 주변에서 쩔쩔매. 아닌가? 배려하는 사람일수록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 배려를 당연하게 여겨. 말이 돼? 아빠 양반도 조직 생활한다면서? 제발 배려하는 사람을 더 배려하도록 해. 참 안타까운 게 인간...
1. 절제 "절제는 고양이라면 타고난 소양이야. 우리는 그릇에 밥을 많이 담아둔다고 배 터지도록 처먹지 않아. 적당히 허기를 채우면 식사를 그칠 줄 알지. 인간은 가진 것은 하찮게 여기고 갖지 못한 것에는 집착하는 것 같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또 환장하지. 아빠 양반이 모니터를 보면서 비싼 차를 뒤적거리는 거 보면 참 한심해. 그나저나 아빠 양반, 여기 공 좀 꺼내 봐. 이게 왜 가질 수 없게 돼 있나. 성질나게. 야옹." 2. 언어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고양이는 인간들이 하는 그 복잡한 언어를 대부분 알아들어. 물론 ...
1) 성차별 "안 추워?" 밤에 티셔츠 한 장 달랑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온 아빠가 딸이 보기에 볼품없었나 봐. 사실 추위를 그렇게 타지 않는 편이라 옷차림이 철에 맞지 않는 편이기는 해. 일단 허세를 좀 부렸지. "강한 남자라서 괜찮아." "그거 성차별적 발언이야." "왜?" "남자니까 어떻고 여자니까 어떻고 하는 것은 성차별적 발언이야." 추위보다 딸 지적 때문에 더 오싹하더군. 2) 김영란법 어쩌다가 집에 기다란 과자를 좀 쌓아두게 됐어. 이게 뭐라고 '데이(Day)'까지 있는지 모르겠네. 딸이 학교에 몇 통 들고 ...
1) 선행학습 같은 반 친구 엄마가 고등학교까지 선행학습한 친구 얘기를 했다더군. 자기 아이는 중학교 과정까지 했는데 좌절감을 느꼈다고. 좌절감이라. "예지, 선행학습 하는 거 있어?" "선행학습?" "지금 4학년 2학기니까 5학년 과정을 배운다던가." "아! 수학 5학년 1학기 시작했어." 좌절감보다 더한 게 뭐가 있나? 아내에게 그렇게 얘기했어. "선행학습 시키는 부모 결정도 존중해. 선행학습 시키는 이유도 있고 안 시키는 이유도 있겠지. 그냥 교육은 늘 어려운 것 같아. 답이 정해진 것도 없고. 잘 관찰하고 고민하고 거들...
1. 수신 "아빠 양반이 그러더군. 하늘이는 '수신' 하나는 확실하다나? 항상 몸을 핥고 닦으며 맵시를 내는 게 중요 일과니 뭐. 사실 고양이만큼 수신에 성실한 생물도 없지. 그나저나 아빠 양반은 내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같은 말도 모르는 줄 아나 봐. 저 쉬운 말조차 이해 못하는 쪽은 인간인데. 아빠 양반만 봐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막 평해. 나랏일에 치를 떨고 나서 집안일을 하지. 마지막에 가까스로 씻더라고. 그러니까 '평천하치국제가수신'이잖아. 일에는 순서가 있는데 뭐가 중요한지 전혀 몰라. 아주 한심해. 야옹." 2....
1. 샌드위치 살짝 구운 식빵,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베이컨. 아내는 샌드위치 세 조각을 만들고 씻으러 갔어. 그 세 조각 중에 분명히 내 지분(?)이 있었을 거야. 딸이 한 조각이면 내가 두 조각, 딸이 두 조각이면 내가 한 조각이지. 샌드위치와 함께 마실 음료를 만드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해. 복숭아를 우유와 함께 갈면서 뒤를 돌아보니 세 번째 샌드위치가 딸 입으로 들어가는 거야. 도대체 아내는 딸 성장 속도를 어떻게 계산하는지 모르겠어. 다급하게 냉장고에서 푸딩을 꺼내 딸에게 내밀었지. "예지, 푸딩이랑 빵이랑 바꿔 먹자....
1. 밤 "밤은 얼마나 훌륭한가. 나는 한밤중에 별을 보며 생명과 우주가 교감하는 그 고요를 즐겨. 사고는 한없이 뻗어 나가고 깊어지지. 그런데 저 인간이라는 것들은 그 소중한 시간에 잠을 퍼 자. 가끔 나만 알 수밖에 없는 그 즐거움을 기꺼이 나누고자 방문을 두드리면 아빠 양반은 오히려 자라고 역정이야. 미쳤나 봐.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어. 더 어이없는 것은 잠들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햇살이 들어올 때부터 이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거지. 정작 잠들어야 할 시간에 말이야. 무슨 생체리듬이 그따위인지 모르겠어. 인간이 아...
(1)친구와 장난감 아쉬우면 딸을 찾다가도 아쉬울 게 없으면 딸을 험담하고 따돌린다는 괘씸한 아이 얘기를 들었어. 친구가 늘 아쉬운 딸이 선을 긋지 못해 끙끙 앓더군. 엄마만큼 강하고 단호하면 좋으련만. "예지, 너 친구가 되고 싶어, 장난감이 되고 싶어?" "친구요." "필요할 때 찾고 필요 없을 때 홀대하면 그게 친구야, 장난감이야?" "장난감이요." "아빠는 예지가 누구에게 친구 아닌 장난감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 잠깐이지만 딸 표정이 다부지게 바뀌더군. 당장 상황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 만만찮은 ...
(1)유통기한 냉장고에 있는 플라스틱 우유병에 희미한 글씨가 적혀 있는 거야. 딸이 볼펜으로 꾹 눌러썼던데 쉽지 않은 작업처럼 보였어 '유통기한이 지났습니다. 이예지'. 다시 보니 3일 지났더군. 엄마·아빠가 모르고 마실까봐 불안했나봐.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고 고맙잖아. 그래도 대부분 아빠처럼 남은 우유를 마셨어. 3일 지났으니 분리배출인가? 다른 아빠들도 그렇지 않나? 떠먹는 요구르트는 날짜 지나야 아빠에게 넘어오잖아. "아빠, 날짜 지난 거 왜 먹어?" "지구를 위해서." 지구를 위한 게 또 자식들을 위한 거지. (2)지구...
1. 역지사지(1) 딸이 유치원 다닐 때부터 주목하는 능력이 있어. 공감 그리고 입장 바꿔 생각하는 능력. '역지사지력'이라고 할까? 언젠가 한 친구가 딸에게 키가 작다고 놀렸다더군. "나는 원래 작아"라고 대응했다기에 조금 놀랐어. 그 정도 상황이면 십중팔구 울거든. 어쨌든 소심한 아빠는 또 복수를 구상하게 돼. "걔는 키가 크니? 잘생겼니? 놀릴 것 없어? 너도 약점 잡아서 놀리지." 7살 꼬맹이는 아빠를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이렇게 말했어. "안 돼. 그 친구도 자기가 놀림을 당했다면 그렇게 못 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