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마산출신 학생운동권 중에서 재경 마산학우회에 참여하지 않아 서울에서 함께 활동하면서도 서로를 모른 채 지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그 유명한 민청학련 사건의 이상익(현 민주당 창원갑 지구당위원장)씨라 할 수 있다.

73학번이던 그는 2학년 때인 74년 4월 3일 발생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한양대 총책으로 구속돼 3년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를 거쳐 74년 11월 3일부터 75년 2월 16일까지 마산교도소에 있었다.

같은 시기 서울대에서 선배와 동료의 부탁에 따라 민청학련 관련 유인물 등사작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한때 검거됐다 풀려난 바 있는 주대환(현 민주노동당 마산지구당 위원장)씨도 그때까진 학우회에 전혀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마산공고 출신인 장기표(현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씨의 경우도 74년 사건당시 <민중의 소리 designtimesp=24667>를 작성, 민청학련 학생에게 줬다는 혐의로 수배중 77년 2월 25일 검거됐다. 약 3년간 피신중 검거된 그는 긴급조치 9호 위반, 반공법 위반, 주민등록법 위반, 병역법 위반 등 네가지 죄목으로 구속·기소됐다. 그는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79년 10·26 이후 출옥했다. 장씨 역시 학우회와는 인연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같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검거 또는 구속됐으나 당시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고 한다.

민청학련 사건은 70년대 최대의 조직사건으로 있지도 않은 인혁당재건위를 배후세력으로 조작하여 의령출신 이수병씨를 비롯한 8명을 사형하는 등 대표적인 인권탄압 사례로 알려져 있다.(이에 대해서는 시리즈 53-4·19통일운동의 주역 이수병 편 참조) 당시 이 사건으로 조사를 받은 사람만도 1024명이었고, 203명이 군법회의에서 유죄를 받았다.

이때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1972)에 따른 초법적인 긴급조치를 통해 폭압통치를 본격화하던 시기였다.

74년 1월 8일 발표된 긴급조치 1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전 1, 2, 3항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이같은 긴급조치는 유신헌법 53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① 대통령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는 내정, 외교, 국방, 경제, 재정, 사법 등 국정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② 대통령는 제1항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③ 제1항과 제2항의 긴급조치를 할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

④ 제1항과 제2항의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이같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는 굳이 해설을 달 필요도 없이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조항이었다.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한 긴급조치 4호는 너무 길어서 소개를 생략하지만 이 역시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런 폭압의 시대에 그나마 항거할 수 있는 사람은 혈기 넘치는 젊은 학생들이었고, 대다수의 국민은 공포에 질려 침묵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학생들의 희생적인 투쟁에 대해 당시 보통시민들의 태도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민청학련사건으로 마산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상익씨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이 성장한 마산으로 이감된 후 바깥에 나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마침 그와 함께 구속됐던 장영달(현 민주당 국회의원)씨가 안경을 맞추러 밖에 다녀온 사실을 상기하고 간수에게 신청을 했다. 장영달씨는 당시 간수가 안경점에 가면서 수의를 벗고 오랏줄도 풀어 줬다고 했다.

이씨는 장씨의 경우를 생각하며 안경 신청을 했고 허락이 떨어졌다. 마침내 마산시내 구경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차가 창동에 도착하자 간수부장은 수의와 오랏줄에 묶은 채 그를 안경점까지 걷게 했다.

누더기같은 푸른 수의, 그 위에 붙여진 수번 306번, 시커먼 고무신, 수갑, 오랏줄, 오른쪽엔 부장, 왼편엔 간수…. 이런 굴욕적인 모습으로 창동거리를 걸어 시민극장 앞에 있는 안경점에 도착했다. 영남안경점이었다.

이씨의 이런 모습을 보고 거리의 시민들이 안경점 윈도우에 모여들었다. 5~6세쯤 되는 꼬마 두명은 그런 이씨를 향해 “나쁜 사람, 나쁜 사람”하면서 갖고 있던 장난감 총으로 “빵빵”하면서 쏘아댔다.

모두들 그를 살인자나 강도 등 흉악범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시력검사를 한 후 주인은 안경테를 녹이고 알을 갈고 있었다. 작업을 마친 주인이 얼굴에 안경을 씌워주면서 물었다.

“출소가 언제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아직 형을 받지 않았나 보지요·”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간수부장이 끼어들었다.

“학생이지요. 거 긴급조치 있지 않습니까.”

“아이구!”

부장의 말을 듣자 마자 주인은 이씨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일에만 열중이던 종업원들도 일제히 그를 돌아봤다.

“신문에서 봤어요. 마산에도 8명인가 왔다더니만….”

냉랭하던 안경점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다. 주인은 재빨리 다방에서 차를 주문했다. 부장과 간수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제재를 하진 않았다. 부장은 슬그머니 오랏줄은 그대로 둔채 수갑을 풀어줬다.

안경점을 떠날 때 주인과 종업원들은 바깥까지 나와 “걱정말아요, 걱정말아요.” 하며 손을 들어보였다.(이상익, <저, 이상익입니다 designtimesp=24750>, 학민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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