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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의 사랑방]마산 고전음악의 집 만초 조남륭·엄학자 부부

막걸리 한 잔에 안주는 폰 카라얀 연주…시대를 논하고 예술을 품던 곳

권영란 전 단디뉴스 대표 webmaster@idomin.com 입력 : 2018-05-01 13:41:01 화     노출 : 2018-05-01 13:59:00 화

'고전음악의 집 蔓草(만초)'. 막걸리, 맥주 등을 파는 대폿집이다. 경남 마산 창동예술촌 이리저리 이어지는 골목길 한 귀퉁이에 있다. 흔히들 '만초'라 한다. 40여 년 동안 '고전음악의 집'으로 알려진 곳으로, 지난 시절 경남 마산지역 청년들은 청춘과 시대를 논하고 예술인들은 문학 미술 음악 등 분야와 상관없이 다 모여들던 사랑방이었다. 하지만 지금 간판은 달려 있지만 장사를 안 한 지 이미 두어 달 된 듯, 개점휴업 상태였다.

가게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서니 탁자 세 개와 바텐이 있는 10여 평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군데군데 집기들이 쌓여있고 잔뜩 어지럽혀져 있었다. 정면으로는 음악가들의 브로마이드가 붙어있고, 오른쪽 벽면에는 오래된 인켈 오디오가 있고, 엘피(LP)판과 시디(CD), 폰 카라얀의 초상화가 달려있다. 왼쪽 벽에는 베토벤, 토스카니니, 차이코프스키 얼굴 석고상이 나란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 아래 200여 장이 될까, 낡고 빛바랜 사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어른들 따라 댕기다보이 그냥 좋았으께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 서울에 갔더만 온통 음악 천지야. 어른들 따라 댕기면서 오만 음악 다 듣고 다녔어. 우리 집안 어른들이 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어."

고전음악의 집 <만초> 주인장 조남륭(1936년생) 씨. 여든셋의 그는 현재 고혈압에 신장 투석 중이다.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해방이 되자 부모를 따라 경기도 평택으로 들어왔다. 10살 무렵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한국말을 못해서 낙제를 했다. 급기야 어머니는 서울로 이사를 갔다. 이 무렵 그의 음악 여정이 시작됐다.

"서울다방,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가기 전 종로2가 단성사 뒤 르네상스 음악다방에 가곤 했다. 그때만 해도 의자가 말이야 병원 가모 있는 기다란 나무의자, 스피커는 라카 스피커…. 6·25전이었지. 열두 서넛 살인가… 그때부터 접했지. 그래가꼬 '1812년' (차이콥스키·1812년 서곡) 같은 거, 옛날 포를 쏘면서 연주하는 기 있었어. 대포 소리 날 때쯤이면 주인이 스피커 소리를 팍 줄이고 그랬어. 그러던 기억이 나네. 그때부터 따라댕겼어. 단성사 영화도 보러 다녔지. 6·25 때는 걸어서 부산까지 갔다. 부산 피난 와서 보니까 얼라들이 다방은 못 가는데 음악실은 갈 수 있었어, 광복동 뒤에 아폴로 음악실, 칸타빌레로 바뀌었지만. 미화당 음악궁전, 부평동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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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주앉은 조남륭·엄학자 부부가 짐짓 서로 처음인 듯 인사를 나누고 소리내 웃는다. / 권영란 전 단디뉴스 대표

조 씨가 추억에 젖어 잠시 말을 멈추자, 같이 앉아 있던 부인이 나서서 말을 거든다. 옛 기억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지 머리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진해는 유택렬 선생이 하는 흑백다방, 대구에는 녹향이 있었지. 그때는 클래식 듣는 사람들이 많았어. 술에 취하면 미쳐가꼬 대구까지 올라가고. 부산이고 다 갔지. 대구 가면 거기 녹향에 가서 쉬고 온다고 했어."

엄학자(1942년생) 씨. 일흔일곱의 엄 씨는 현재 당뇨에다 무릎을 못 쓰고 허리 협착증이다. 재활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중이다. 경남 함안이 고향이다. 엄학자 씨가 조남륭 씨와 결혼한 것은 조 씨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다니다가 외가가 있는 경남 의령에 내려와 수 년째 농사 거드는 시늉만 하고 있을 때였다.

"농사를 할 줄 알아야 하지. 하는 일 없이 왔다 갔다 농사짓는 시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웬 아주머니가 내가 좋아보였나 봐. 딸이 있는데 사위하자고 하더라고. 그때야 뼈대 튼튼하고 장골이었지. 나쁜 짓 할 사람으로는 안 보였겠제. 미안하제. 그러고는 고생을 많이 시켰으니."

조남륭 31세, 엄학자 25세였다. 당시로는 늦은 결혼이었다.

"우리 집은 정미소를 했는데 그 동네서 살 만했거든. 그때 다른 데서도 중신이 들어왔는데, 엄마가 보고 와서는 할배가 사람이 좋아 보이더라며 좋은 말만 늘어왔어. 우찌 인연이 되겠다더라 해서 고마 할배한테 왔제. 시집이라꼬 갔더만, 중방에 있는데, 야 이런 집도 있다. 시집갈 때 가마 타고 가면서 아무것도 안 묵꼬 가야되는거든. 힘이 없어서 나는 대화를 할 수가 없지. 말을 못했지.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가꼬. 인자 말도 잘 하고 노래도 잘 하고 그리 됐지."

고전음악의 집 제1기…

제비집 같은 곳에서 울리는 '볼레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돌아가신 뒤 묻어드리고, 아무도 없는 마산 가서 살자, 하고 가족을 데꼬 왔지. 와서 보니까 아는 사람이 많데. 부산 피난 시절 남포동 대학촌에서 만났던 월초 정진업 선생도 있고. 월초 선생은 부산일보 문화부장 시절부터 알았지. 그때 우리야 어른들 몰래 거기 숨어서 술 마시고 할 때였지. 근데 마산 와서 다시 만났는데 어찌 반갑던지. 그 당시 내가 월초 선생이 삶들을 마이 데려오기도 하고 내가 심부름도 마이 했지."

경남 의령에서 농사를 짓던 부부가 아이 셋을 업고 경남 마산으로 옮겨온 것을 1971년이었다. 고전음악의 집은 1971년 북마산 문창교회 옆 대폿집에서 시작됐다. 처음부터 고전음악의 집도, 만초집도 아니었다. 그저 간판도 없이 테이블 몇 개뿐인 지붕 낮은 대폿집이었다. 이들 부부가 아이들과 먹고살기 위해 펼친 전이었다.

"애들 3, 4, 5살이던 시절에 가게를 열었지. 아무 의지할 데가 없으니 머시라도 해야지 싶어. 부모가 바쁘모는 아이들은 저그끼리 잘 논다. 한번은 우리 큰아들이 너댓 살쯤이던가, 화장실 들어가는 복도에서 꼬박꼬박 자불고 있더라고. 참말 어렵사리 살던 시절이었제."

간판도 없는 대폿집에서는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베토벤이니 쇼팽 등 고전음악이 늘 흘러나왔고 음악을 좋아하는 대학생이나 예술인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마땅히 간판도 없으니 손님들마다 약속을 정할 때 "거, 음악 나오는 집에서 만나"라고 했던 것이 입소문으로 '음악의 집'이 됐다. 그러니 단골 중 누군가가 한쪽 벽에다 '음악의 집'이라 썼다. 음악의 집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래 봤자 간판도 없는 허름한 대폿집인데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으니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상타 했을끼라. 그러더만 사람들이 자꾸 모이기 시작하데. 내가 좋아하는 거니 내 들을라꼬도 틀고 또 사람들이 좋다, 좋다하며 찾아오니 더 좋은 음악을 틀고 싶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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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음악의 집 만초에 누군가가 건네준 사진이다. 조두남 작곡가, 정진업 시인, 송인식 관장 등 지역 예술인들과 언론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록 사진이다. 마산 합포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화장장 앞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 권영란 전 단디뉴스 대표

조남륭 씨가 하나둘 말문을 여니 엄학자 씨도 당시 기억이 또렷하게 나는지 말을 보탠다.

"얄궂이 비 오면 비가 쭈욱쭉 다 새고 그랬어. 그때는 막걸리 팔았지. 서울대 고려대 학생들이 내려와서 다들 굉장하더라고. 대학생들 남녀 구분도 없이 참 대단하이. 근디 글을 써놓고 갔는데, 나중에 할배가 보더니 야, 이것들 위험한 짓을 하는구나 했지."

엄학자 씨는 당시 여학생들이 남자들 못지않게 다부진데다가 활달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막걸리 파는 대폿집에서 온종일 고전 음악을 틀어놓았을 뿐인데 문화예술인들은 물론 대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누구나 가난했던 그 시절, 밤늦도록 김치 한 조각 놓고 대폿술을 마셨으나 낡은 턴테이블에서 지익직 거리며 흘러나오는 쇼팽이나 베토벤은 언젠가 가고픈 아름다운 세계로 데려다주곤 했다. 거기에다 조남륭·엄학자 어른의 고전음악에 대한 박식함과 낭만이 있었다. 제비집 같은 대폿집은 날마다 사람들이 들락날락했다.

고전음악의 집 제 2기…

밤샘 토론과 예술이 있었다

고전음악의 집은 1973년 오동동 코아양과 맞은편 2층에다 새 둥지를 틀었다. 고전음악의 집은 실내는 온통 검은색이었고, 거기에다 카라얀과 오케스트라 악단이 누군가의 손으로 그려져 있었다. 당시 젊은 화가들이 그렸다. 예술가들이 많이 왔던 것은 순전히 음악 때문이었다.

"클래식 몇 곡 모르면 대화가 안 되던 시절이니. 지금 만미정 있는 자리에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 2층, 30평이 넘었는데 자리가 없어서 다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들어왔어. 자기 가오 세우려고 탁 디제이한테 음악 신청하고. 방학 때는 고려대 방위하던 윤○○ 학생이 와서 디제이 봤는데, 그리고 음악 수준이 달라. 그때 되면 손님들이 더 많아. 방학 때는 우리 집에 오면 다 만나. 우리 집만 장사가 최고로 잘 돼. 음악의 집에 오면 다 만나."

대학생들의 젊은 활기로 채워진 이곳은 본격적으로 마산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도 자리 잡았다.

"그라고 한 번은 고려대 학생들이 회의를 하는 기라. 데모 회의를 하고, 막 헤어지니까. 남성동 파출소에서 올라오는 기라. 정보를 듣고 딱 들어닥치던데…. 아이고, 그때 만약에 우리가 들켰으면 끝이었을끼다. 어마어마했다. 그때가 데모 시절이니까. 76년 그때가 그랬다. 마산에서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모임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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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동 입구 2층으로 옮겼던 고전음악의 집 2기 시절. 실내는 폰 가라얀 등 음악가로 그려져 있었다. / 권영란 전 단디뉴스 대표

당시를 떠올리는 엄학자 씨는 지금도 두려운 듯 몸을 움츠렸다.

"학생운동권 학생들이 자주 오고 밤에 토론하고. 이런 걸 용인한 거는 나도 유신정권이 싫었거든. 12시 넘으면 문을 닫아 삐거든, 저그들끼리 밤새 토론하고 저그끼리 싸우고…. 밖에서는 모르제. 저그들끼리 싸우는 거 보면, 임마 상대방 말도 들어줘야제. 니 말만 하지 말고 중간에 중재도 하제. 그래도 까불어싸면 니 죽여삔다 하고 협박을 하지."

조남륭 씨는 그 시절 정치사회적인 동향을 자세히는 몰랐지만 유신정권이 싫었다. 고전음악의 집에 드나드는 대학생들과 예술인들의 비판적인 토론도 좋았고, 그들이 뭔가를 도모하는 것도 좋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유롭고 호방한 기질 탓이기도 했다.

"그 당시는 주대환(현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도 우리집에 살다시피 했다. 서광태도, 서울대 간첩사건으로 엮인 서광태도 왔다."

유신정권이 기를 써대던 그즈음이라 시대는 암울했지만, 마산지역에도 막걸리 한 잔에도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로 밤을 새는 청춘도 있었고 시대의 울분을 토하는 지식인들도 있었다. 고전음악의 집은 이들에게 해방구가 되었다. 고전음악의 집을 알고 출입을 해야 예술인이고 지식이었다. 덕분에 고전음악의 집은 수년 동안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붐볐고, 조 씨는 덕분에 먹고 살며 기죽지 않을 수 있다 여겨, 주변 사람들이 힘들면 선뜻 나서서 도움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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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음악의 집 2기 시절. 실내에 음악이 울리면 일어나 지휘를 하던 대학생이나 군인이 있었다. / 권영란 전 단디뉴스 대표

그러니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도 제법이지만 나가는 돈도 제법이었다. 조 씨는 등록금을 내지 못해 쩔쩔매는 이가 있으면 등록금을 내주고, 누가 생활이 어렵다는 얘기가 들리면 슬쩍 생활비를 건네기도 하고, 돈 없이 술 마시러 오는 예술가들에겐 다음에 갚으라며 그냥 베풀었다. 그 예술인들 중 화가는 그림을 가져오고, 조각가는 조각 작품을 가져오고, 시인은 시를 써서 음악의 집에 가져다 주었다. 밥값이고 술값 대신이었다.

"술값 대신 그림 갖다 주는 이도 있고, 전시회 끝나고 여기 와서 걸어주는 이도 있고. 그러다 보니 작품이 수두룩 많지. 유명한 사람도 있고 무명인들도 많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제. 마산 출신 연대 철학과 학생이 음악의집에 와서 군복 입고 지휘를 하는 사진도 있다. 문학이나 음악, 그림을 하는 젊은 청년들이 오기도 했지. 조두남 선생도 내려오면 왔지. 설창수 선생도 왔지. 그 양반은 한번 이야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 아이고 말빨이 장난 아이제."

고전음악의 집 최대 번성기였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자 건물주는 나가라고 했다. 고전음악의 집은 옛 중앙극장 인근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결국 1978년 말 문을 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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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음악의 집 만초를 열어 지역예술인들과 함께 해온 조남륭 엄학자 부부. / 권영란 전 단디뉴스 대표

"갑자기 쫓겨났어. 그 옆에 빈 가게로 옮겼는데 그때부터는 딱 장사가 안되는 기라. 하는 수 없이 가게 문을 닫았제.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 나는 계속 파출부하고, 할배는 회사도 다니고 구두 수선도 하고 이 일 저 일 다 해봤지. 근디 그때 우리 할배가 죽을 병이 걸렸다. 의사도 포기를 하고 아이가나, 안 되겠다 싶어 고모, 가족들 다 불렀어. 그런데 그때 정신을 차리데. 할배가 정신력이 엄청 강하거든. 결혼하고 나서도 몇 차례 죽을 병이 걸려 고비를 넘겼으니까."

엄 씨가 이야기하는 중간 중간, 조 씨는 바 앞의 의자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음악을 틀었다. 정리되지 않은 많은 짐들이 쌓여 드나들기 힘든 까닭에 음악을 바꿔 틀 때마다 힘들게 오르락내리락을 해야 했다.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는 훌륭했지만 오디오는 한때 보급형으로 팔리던 인켈로 시디가 네 개 들어가는 거였다. 20년이 좀 넘은 거라니, 이곳에서 만초집으로 문을 열 당시 산 것으로 짐작됐다.

"더 좋은 거야 많것제. 비싼 오디오는 잘 모리것고. 저게 내가 질을 잘 내서 소리가 훌륭하지. 머시든지 제때제때 기름칠 잘 하고 잘 사용을 해야 제값을 하는 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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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48년 동안의 증거. 낡은 사진 속에서 지역예술인과 진보인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 / 권영란 전 단디뉴스 대표

고전음악의 집 제3기…

어울렁더울렁 '만초'

마산 창동 골목 안에다 음악의 집을 다시 연 것은 10년도 더 뒤인 1990년대 초였다. <만초>는 전 주인이 걸어두었던 상호였다. 장사를 접으면서 간판을 내리지도 않고 가 조남륭·엄학자 부부는 그걸 그대로 달아두었다. 그래서 음악의 집은 <만초>가 되었다. 만초가 되어도 골목 안을 빵빵하게 울리는 폰 카라얀의 지휘곡은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었다. 마치 1971년 처음 간판도 없이 대폿술을 팔던 그때 기분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옛 추억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상호는 <만초>이지만 고전음악의 집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막걸리나 소주 맥주를 마시면 술값만 내면 됐다. 안주라고야 멸치, 땅콩, 두부김치, 삶은 계란 등과 안주인인 엄학자 씨가 그날그날 내어주는 게 다였다.

"만초라는 기, 뜻이 좋더라고. 덩굴 만(蔓)에 풀 초(草) 아이가. 다들 덩굴처럼 엉켜있다. 어울렁 더울렁 살자는 뜻이다. 가족처럼 말이다. 같이 음악을 하고 니 술 내 술도 없고 같이 합이 되가꼬. 잘난 것도 없고 그리 지내자는 거제."

한 쪽 벽면 가득한 낡은 사진들 속에는 이름을 알만한, 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들이 웃고 있다. 시인 이선관과 구상, 박재호, 작곡가 조두남과 김봉천, 송인식 관장, 게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최운, 시인이자 연극인인 정진업 등 수많은 예술인들. 덩굴처럼 얽혀 한 시절을 보냈던 이들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한 사람씩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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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이 지나 불쑥 찾아온 남해금산 이성복(왼쪽) 시인과 함께. / 권영란 전 단디뉴스 대표

불쑥 엄학자 씨에게 노래를 청했다. 엄 씨의 노래 솜씨는 제법 알려진 터였다. 그의 래퍼토리는 가곡에서 이미자 노래까지 다양했다. 엄 씨는 잠시 목을 가다듬다가 현제명 작곡 '그 집 앞'을 불렀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방이 머물고…." 수줍은 듯 입을 가리고 음을 놓칠세라 정성스럽게 불렀다. 노래는 듣는 이의 마음을 휘저어놓을 만큼 청아했다.

"내 넋두리도 함 들어볼라요."

그렇게 읊기 시작한 시가 조남륭 씨의 자작시 '진단서'였다.

1968년 10월 15일은 / 내가 목에 꽃을 피우던 날. / 닥터김과 안의 진단서에는 / 급성위출혈이라고 적혔다. / 허나 나의 견해로는 / 다만 내 목에 아름다운 / 붉은 꽃이 피었을 뿐인 것을. / 내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 심각한 표정을 짓는 닥터여 / 나쯤 죽었다고 그리 야단스러울 일 없고 / 피쯤 토했다고 쉬이 죽을 내가 아니랍니다. /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 사형선고 받은 사형수 인생인 것을 / 집행될 일자를 모르는 바보 일 바에야 / 죽음은 현실 바깥의 일 / 다만 나의 견해로는 내 목에 / 아름다운 붉은 꽃이 피었을 뿐이기에 / 폭소라는 병명으로 이름 짓는다 / 담당의사 조남륭.

미처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조 씨는 줄줄 읊었다.

"나도 한창 문학청년 시절이 있었지. 인자 우리는 선배도 없고, 후배도 없어. 서라벌예대가 중앙대로 흡수됐삣제."

조남륭 씨의 자작시에는 꺼릴 것 없는 자유롭고 호방한 기질이 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거기에다 엄학자 씨가 시에다 해설을 덧붙인다.

"쓰기는 다 낫고 나서 쓴 거지. 자기 넋두리지. 고비 넘갔다는. 그만큼 강하다. 그 위기를 넘기고 난 뒤에 쓴 시지. 그 뒤에도 여러 번이다. 사람 명이 다 있는 거다. 머시든지 강하다."

그렇게 시작된 조남륭 씨의 자작시 읊기는 두어 편 계속됐다. 막히지도 않고 줄줄 읊어가는 그를 보며, 싯귀를 따라가며 감탄을 쏟아내고 있는데 불쑥 조 씨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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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동예술촌 골목길 고전음악의 집 만초. / 권영란 전 단디뉴스 대표

"이성복이 아나요? 아, <남해금산> 시인 이성복. 저게 있네."

그가 가리킨 사진은 낡은 흑백 사진들 중에서 칼라 사진이라 금방 눈에 띄었다. 거기에는 조남륭 씨가 이성복 시인과 찍은 사진이 붙어있었다.

"저게 몇 년인지 모르겠네. 대구 이성복 시인도 40년 만에 찾아왔더라. 저 사진이 그때 찍은 거 아이가. 마산서 경기고등학교 간 사람이 있었는데 친구였나 봐. 이성복이가 진해 해군 시절에 요 와서 음악 들었다 하더라고. 내는 그때 몰랐제. 40년 만에 여 찾아왔던데 그때 얘기하니까 아, 글쿠나 했제."

뜻밖에도 이성복 시인과의 인연을 듣게 됐다.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사진 귀퉁이에 찍은 날짜라도 나와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 사이 조 씨는 이미 이성복 시인과 통화를 시작했다.

"어, 성복이가? 내다. 오늘 온 손님들이 니를 아는 사람들이라 캐서 생각나 전화해봤다. 요 사람들이 이 교수 시를 좋아한다카네."

그렇게 한참 동안 조 씨는 이성복 시인과 통화를 이어갔다.

좋은 시절은 가고 10월이면 추억 속으로

<만초>로 문을 연 고전음악의 집은 한동안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하지만 마산 원도심인 창동 오동동 전체 상권이 쇠해지고 있던 터라 만초를 찾는 발길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2011년 창동 도심재생사업과 함께 얼마간 활기를 띠었다. 추억을 찾아오고, 젊은 사람들이 찾고…하지만 그것도 몇 해가 지나니 다시 조용해졌다. 옛사람들은 하나 둘 사라져갔고 지금의 젊은 예술인들은 고전음악의 집을 잘 모른다. 조남륭·엄학자 부부도 이제는 거동조차 어렵다. 찾는 사람이 있어도 장사를 할 수 있지가 않다.

"그래도 그때 신세 진 분들이 많이 찾아 오겠네예?"

"아이가. 마이 준 사람들은 찾아오지 않고, 한 개 주지도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찾아와서 고맙다고 한다. 어려울 때, 좋은 음악 듣게 해조서 고맙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덕분에 점수를 잘 받아 교장 됐다고 찾아오고… 한번은 그때 배고플 때 라면 한 개 끼리줬다고 찾아와서 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사람도 있었제. 인자는 우리 할배가 옛날보다 없으니께. 쓰는 게 없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한 그릇을 사야 저 사람이 오지. 자꾸 조야 또 오고…."

인터뷰가 끝날 무렵, 벽면 옛 사진 탁자에 앉아 마지막 사진 촬영을 청하자 두 분이 마주 앉았다. 엄학자 씨의 웃음은 끊이지를 않았고, 조남륭 씨는 쑥스러운 듯마냥 입가에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마주앉은 두 분이 손을 맞잡는 순간, 엄 씨가 "하우 두 유 두?"라고 한 마디 던지며 깔깔거린다. 그리고는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는 기자에게 다시 "니 구두 내 구두라고." 소리치고는 또 깔깔거린다. 조남륭·엄학자 부부는 끝까지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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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문상 화백이 그린 조남륭 씨. / 권영란 전 단디뉴스 대표

"술과 소리가 있소이다, 그냥 갈랑겨?"

하지만 이제는 골목 지나는 손님을 잡을 수가 없다. 만초는 개점 휴업 상태다. 간판은 달려있지만, 두 부부는 장사를 할 수가 없다. 거동조차 힘들다. 사실 찾아오는 이도 없다. 이들 부부가 밥은 제때 먹고 있는지, 하루를 어떻게 나고 있는지 안부 묻는 이들도 드물다. 어쩌다 옛 단골이 찾아오면 추억을 꺼내며 한잔 하고 술값도 알아서 내고 갈뿐이다.

"인자 10월 되모는 문 닫을 끼다. 지금도 장사를 하는 것도 아이지만 그때 되모는 계약이 끝나는 기라. 사람들도 알 사람은 다 안다."

때마침 모리스 라벨의 '볼레르'가 실내를 휘저어 놓았다. 오늘은 여든셋 조남륭 씨의 시 '진단서'에 눈두덩이 젖고 일흔일곱 엄학자 씨의 노래 '그 집 앞'이 더욱 애잔하고 구슬펐다. 어수선한 실내와 허름한 살림살이 사이로 흐르는 평온과 따뜻함과 추억이라니…. 폰 카라얀의 연주를 들으며 사회와 예술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 마시던 이곳은 경남 마산지역 문화예술의 소중한 추억이자 현장인 고전음악의 집 <만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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