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화예술 일상에서 가깝게 만나기를"
미대서 서예 전공 10년여 붓 잡아
폐건물 활용한 도시재생서 '감흥'
미술관 도슨트 활동…새 꿈 키워
차근차근 전문 큐레이터로 성장
열린 장소서 소통하는 전시 기획
빈집·예술 접목, 복합공간 등 고민

초등학교 6학년 때 난생처음 먹물로 글씨를 써내려갔다. 담임 선생님이 방과 후 반 아이들을 죄다 남겨서 시킨 공부로 마지못해 붓을 쥐었다. 묵직한 먹의 필치는 그윽하면서도 은은했다. 고루하고 진부할 것만 같던 서예에 대한 인식이 깨지고 저도 모르게 붓 끝에 집중하고 글에 몰입했다.

중·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점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각종 대전에서 입상하며 실력을 뽐냈다. 내친김에 미술대학에서 서예를 전공하는 데 이른다. 졸업 후 전통서예에 현대적 해석을 가미해 생활에 응용하고 싶은 생각이 솟구쳤다. 목표를 이루려면 경험과 배움이 우선이었다. 마침 놀이와 체험으로 미술을 체득하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다.

"아이들을 위한 다양하고 재밌는 미술활동은 하고자 하는 일에 적합했죠. 하지만 학원 시스템은 순수하게 교육에만 매진할 수 없는 환경이잖아요. 스스로 자신과 맞지 않는 구조라는 생각이 들어 고민 끝에 그만두게 됐죠."

독립 큐레이터 김나리 씨가 자신이 기획·참여했던 전시·행사 안내 책자를 보여주고 있다. /문정민 기자

10년 넘게 잡은 붓을 잠시 놓고, 새삼 꿈과 미래에 대해 다시 한 번 들여다본 김나리(33) 씨. 기억을 거슬러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상기한다. 전 세계 이목이 올림픽에 집중될 때 나리 씨는 '북경798' 예술지구에 관심이 쏠렸다. 버려진 옛 군수시설에 예술가들이 찾아들면서 세계적 문화예술거리로 탈바꿈한 곳이다. 삭막했던 공간에 갤러리, 화랑, 작업실이 즐비하게 들어서면서 문화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폐공장이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한 사례를 지켜보며 나리 씨는 수년간 방치돼 있던 창원 가음정동 폐건물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유휴공간을 활용해 도시재생 효과를 창출하는 문화예술 상품이 왜 창원 지역에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을 품는다.

안타까움은 단순히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 나리 씨는 서예를 전공하면서 함께 공부한 미술 전반적인 이론과 지식을 바탕으로 지역 미술관에서 도슨트로 활동한다. 언젠가 유휴공간에서 예술가들에게 작품 전시와 창작의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민의 커뮤니티 공간 등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본인이 일조할 수 있는 날을 꼽으면서.

김나리(오른쪽) 씨가 아시아미술제 '회로' 기획 의도를 밝히며 전시 소개를 하고 있다.

도슨트를 시작으로 어린이 체험미술 교육 강사, 인턴 큐레이터를 거쳐 대학원에 진학해 3급 정학예사를 취득한다. 미술관과 박물관을 비롯해 전시회 관련 연구와 교육, 홍보에 관한 모든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춘다.

차근차근 전문 큐레이터 과정을 밟은 나리 씨는 단순히 전시 기획자로서 길만 고집하지 않는다. "창원은 문화 불모지. 즐길 게 없다"라는 말을 반증하고 싶었다.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를 가꾸고 또 즐길 수 있는 텃밭을 일구겠다는 의지를 굳힌다.

기관이나 시설에 소속된 삶 대신 독립 기획자로 발을 내디딘 이유다.

특히 공간에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공유하는 데에 대한 관심의 끈을 꾸준히 이어간다. 지난해에는 청년 사회적 기업가를 양성하는 사단법인 씨즈의 지원 사업에 선정돼 지역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문화 공간을 탐방하기도 했다. 이른바 '촌구석 탐방기'다.

지역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공간에만 집중했던 나리 씨는 탐방을 통해 사람들 생각과 이야기를 들으며 삶에서 문화예술이 만나는 방식을 다방면으로 궁리한다. 그러면서 공간을 넘어 일상 속에 예술작품을 들여 놓는 방안을 고안한다.

나리 씨가 경남도립미술관 '어린이미술교실-Eating Art' 미술강사로 활동하는 모습.

"이왕이면 지역 내 숨은 젊은 작가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 소통과 공감의 감성을 확산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어요. 실력 있는 젊은 예술가들이 꽤 많은데 작품을 알릴 기회가 잘 없거든요."

나리 씨는 지난해 문화가 있는 날 지역거점특화프로그램으로 열린 '청춘 사용설명서'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긴다.

5월부터 11월까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상남동 분수광장에서 지역 청년들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를 진행했다. 미술관과 전시실을 벗어난 작품은 평일 저녁 시민들 발길을 잡고 눈길을 머물게 했다.

올 10월 창원 용호동 가로수길에서 개최한 '미식예찬' 전시기획 또한 결을 같이한다.

2017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지원을 받아 진행된 전시는 식문화를 예술로 밝히는 주제를 내세웠다. 식당과 카페 안에 미술작품을 전시해 가게에 들른 손님이 자연스레 문화예술을 접하고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창원에서 문화를 융성시키고 도모하는 데 뜻을 두고 있지만 결코 창원 지역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창원 가로수길에서 열린 전시기획 '미식예찬' 의도를 설명하는 나리 씨.

지난해 12월 26·27일 이틀간 추진된 '아티스틱 투어 인 창녕'은 예술가의 시각으로 창녕의 문화·생태관광을 탐색해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이뤄졌다. 지역 조각가, 일러스트레이터, 페인팅 작가, 뮤지션 등이 참여했다. 나리 씨도 기획자로 머리를 맞대 빈집 활용방안을 모색하고 예술을 접목할 수 있는 방안을 살폈다.

누군가에게 큐레이터라고 불리기에는 직업이 주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크다는 나리 씨. 전시 기획부터 디스플레이, 리플릿 제작 등 전시에 관한 전반적인 일을 도맡는 만큼 미학적 관점과 지식이 깊고 풍부해야 한다. 자신만의 전문성이 바탕이 돼야 비로소 큐레이터라고 불릴 수 있다는 그다.

언젠가 복합문화공간이 창원에도 들어서길 바라는 나리 씨. 미술사에 기록될 만한 전시를 남기는 게 일생의 목표라는 그는 지역 특성을 살린 세계화를 뜻하는 '글로컬'의 가능성을 믿는다. 다양한 지역 문화를 접목해 도시를 재생하고 활성화시킨 공간에 그가 기획한 전시를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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