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홍보·진행 위해 발로 뛰고, 극단 스태프 의견 조율·취합
사업계획 발표 '개성 뚜렷'…"지역에도 얼마든지 기회 있어" 조언

진주 도심을 가로지르며 유유히 흐르는 남강. 선선한 바람 머금은 10월이면 유등을 품고 반짝인다. 잔잔한 강과 은은한 빛들이 자아내는 풍경은 삭막한 일상에 갇혀 살던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회색빛 콘크리트 속에서 줄곧 학창시절을 보낸 여대생의 눈에도 전에 느끼지 못한 여유로움이 묻어 나왔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에게 도심은 늘 어지럽고 부산스런 모습이었다.

"진주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한 덕분에 유등축제를 처음 마주했어요. 번잡한 도심을 적시며 흐르는 남강에 정서적인 안정을 느꼈죠. 관광객들이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축제를 즐기는 모습도 너무 보기 좋았죠."

진주 극단 현장 건물에서 마중 나와 사무실로 안내하는 이진희(31) 씨. 그는 현재 극단 연극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사학을 전공한 진희 씨는 유등축제를 체험한 뒤 직접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현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곧장 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로 진학한 진희 씨. 하고 싶은 꿈이 생겼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연했다. 기회가 더 많은 대도시로 떠나야 할지 고민은 깊어 갔다.

진주 극단 현장 기획자 이진희 씨는 같은 꿈을 꾸는 후배들에게 "지역이 필요로 하고, 스스로도 필요한 사람이 될 준비를 갖춰야 한다.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기회는 있다"고 조언한다. /문정민 기자

우연히 진주탈춤한마당 행사 진행에 참가하면서 지역에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는 느낌표가 달렸다. 관 주도가 아닌 순수 민간의 힘으로 만든 행사는 진희 씨에게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줬다. 지역성이 곧 세계적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 시민 스스로 이뤄낸 축제 성취감도 느꼈다. 진희 씨 꿈은 명확해졌고 욕구는 더 간절해졌다. 그 마음을 알았을까. 때마침 지역 예술인과 시민들이 직접 추진하는 진주 골목길아트페스티벌을 함께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현장에서 부딪히고 경험을 쌓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거든요. 발로 뛰어다니며 행사 프로그램을 짜고 진행을 맡고 홍보를 했어요. 초록색 스타킹 신고 머리에 똑같은 색의 두건을 쓰고 마이크를 잡기도 했고요. 눈에 띄어야 알릴 수 있으니깐요." 대학 동아리 풍물패 활동을 할 당시에도 공연 복장 대신 원피스를 입거나 우산 등 소품을 활용해 율동을 했던 진희 씨였다.

평범하고 흔한 것을 거부하던 그는 2012년 극단 현장에 몸을 담기 시작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기획자로서 역할에 충실하되,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극단 현장은 타지역 극단과 달리 10여 명이 상주한다. 꼬박 나가는 월급에 소극장 운영을 비롯한 각종 행사까지 연간 극단 유지비만 해도 상당하다.

공연·연극제 홍보물을 살펴보는 진희 씨. /문정민 기자

자체 공연 수익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 정부나 기관 지원예산을 따내기 위해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고 발표하는 진희 씨 역할이 막중하다. 진희 씨는 사업 보고회 무대에 오르면 비교적 작은 키를 극복하고자 마이크를 따로 떼어 단상에서 내려온다. 며칠 밤새워 써내려간 원고도 내려놓는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한다.

"배우들이 공연 준비를 하면서 연기 연습하는 걸 상기했어요. 대사를 할 때 호흡을 가다듬고 저마다 발음을 연습하는 걸 지켜보면서 발표할 때 나만의 화법을 구사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극단 형편상 연극배우가 대표를 겸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표가 직접 공연 기획을 짜고 예산을 따내기 위한 사업을 편성한다. 발표도 직접 나선다. 그들 틈에서 진희 씨는 단연 눈에 띄었다. 다른 극단의 사업계획이 작품과 예술성에 집중된 데 비해 진희 씨는 공연 기대 효과를 좀 더 부각시켰다.

그 결과 지난해 극단 현장은 공연장상주단체육성지원사업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지역협력형사업 우수사례 워크숍'에서 전국 시·도 대표 상주단체들과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최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차별적 프로그램 운영과 언론보도 실적, 지역민 호응 등에 따른 성과를 인정받은 것이다.

프레젠테이션하는 진희 씨 모습. 극단이 정부나 기관 지원사업 예산을 따내려면 계획서를 작성하고 발표하는 진희 씨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이진희 씨

물론 진희 씨 힘으로 온전히 이뤄낸 성과는 아니다. 극단 대표와 연출가, 배우 등 모든 스태프가 함께 끊임없이 소통하고 의논하며 협력해낸 결과물이다.

진희 씨는 그 중심에서 의견을 조율, 취합하고 정리한다. 함께 공연 홍보 포스터를 붙이고 리플릿을 배포하기도 한다. 때 되면 스태프 식사를 챙기고 공연 당일엔 입장 관객을 안내한다. 혹시 모를 안전사고에 대비해 객석을 수시로 점검하고 때론 뒤풀이 장소 섭외까지 진희 씨 몫일 때도 있다.

전천후 뛰어다니는 일을 '기획자 숙명'으로 받아들이지만 힘들고 지칠 때가 있다. 모든 관객이 공연장으로 들어하고 텅 빈 로비를 홀로 지킬 때다.

연극이 끝난 후 들려오는 환호와 박수 소리는 진희 씨를 외롭게 만들었다. 특히 배우들이 관객에게 첫선을 보이는 무대는 놓치고 싶지 않은 감흥이다. 함께 공감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밀려오는 서러움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스태프들이 건네는 "수고했다" 한마디에 서운함은 금세 사그라진다.

지역에서 축제를 기획하고 구현해내는 데에 의문을 품었던 진희 씨는 같은 꿈을 꾸는 후배들에게 고민만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진주 골목길아트페스티벌에서 활동하는 진희 씨 모습. 지역 예술인과 시민들이 직접 추진하는 이 페스티벌에서 진희 씨는 행사 프로그램을 짜고 진행·홍보도 맡았다. /이진희 씨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정하고 그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돼요. 지역이 필요로 하고, 스스로도 필요한 사람이 될 준비를 갖춰야 해요.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기회는 있어요."

진희 씨는 훗날 기획자로서 삶을 기약하지 않는다. 길거리에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커피숍 벽면이나 바닥에 새겨진 문양을 봐도 어떻게 작업에 활용할지 생각한다.

스스로 피가 뜨겁다고 말하는 그다. 사람도 세상도 겪어 보고 싶은 게 많은 진희 씨는 아직 꿈꾸는 청년 기획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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