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기반 사라지면, 우리는 한순간에 농락당해"

2월 4일 오전 우리나라 최대 농민단체 중 하나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 조병옥(48) 사무총장을 인터뷰하러 함안에 갔다. 전농 사무총장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농민운동가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다. 구면이지만 비교적 희고 곱상한 그의 얼굴은 '농민운동가'라는 타이틀과는 조금 어색해 보였다. 물론 먼지를 뒤집어쓴 해진 옷과 열댓 평 남짓한 그의 작은 집이 평범한 농민이라는 것을 증명하긴 하지만.

귀여움받던 막내, 운동에 눈뜨다

그는 함안조씨였다. 부친은 함안조씨 가운데 소문중의 7대 종손이었다. 또 부친은 공직에 오랫동안 근무했고 우체국 국장까지 지냈다. 큰 재산을 가지진 않았지만 그렇게 가난하게 산 것도 아니었다.

Q. 고향이나 학교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아, 그것도 말해야 합니까? 저는 지금 제가 있는 함안군 산인면 입곡리 숲안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함안고등학교 나와서 경남대학교 졸업하고, 석사도 경남대학교에서 했습니다."

Q. 제가 보기엔 부친께서 지역 유지신데, 어릴 때 귀여움받거나 알아보는 경우도 있지 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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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옥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 / 임종금 기자

"제가 어릴 때 아프고 막내라서 아무래도 귀여움은 좀 받았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지역에서도 활동하시고 함안조씨 문중 일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가면 누구누구 아들이라고 하면 많이들 알아보셨습니다."

Q. 제가 듣기로 고등학교 때 처음 운동에 눈을 떴다고 하던데요. 사실인가요?

"제가 천식이 있어서 고등학교 때 휴학을 한 번 하고 나보다 한 살 어린 친구들과 고등학교 생활을 했습니다. 1988년 고3 때 막 창간한 한겨레신문을 가져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때 전경환(전두환 동생)부터 온갖 5공화국 비리들이 나오던 때였습니다. 신문을 보면서 '세상이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제가 문학회 활동을 했었습니다. 교지를 만들고 싶은데 학교에는 교지가 없었습니다. 교지를 만들려면 복사도 해야 하고 편집도 해야 하는데, 그때 함안에 '시인과 농부'라는 조그마한 서점에서 해보려 했습니다. 그곳에 저 말고도 방위들이 오는데, 서울에 명문대 선배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서점이 함안에서 운동물 먹은 선배들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선배들과 막걸리 마시면서 세상 얘기하고, 그러면서 가치관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Q. 그때 그냥 그렇게 토론만 하셨나요?

"1989년에 함안에도 농민회를 만들겠다는 움직임이 생깁니다. 저는 오토바이 타고 유인물 같은 걸 막 붙이고 다녔습니다. 당시 기억나는 게 그 유인물 그림에 소가 그려져 있는데, 소뿔이 선동적이라고 온갖 토를 달아서 방해했습니다. 창립식을 도로에서 하는데 이정환이라는 분이 '자, 농민 여러분 창립합니다. 농민 여러분 모여 주십시오'라고 하는 순간에 잡혀 가버렸습니다. 구호 외쳤다고 말입니다."

Q. 아, 그게 구호가 되나요?

"네. 그리고 당시 창립식 주변에 농민들이 있었던 게 아니라, 농협 직원, 면사무소 직원, 경찰이 뺑 둘러싸고 있는 겁니다. 그걸 보면서 황당하다 싶었습니다. 이정환 씨 잡혀간 거 풀어내라고 경찰서 앞마당까지 갔습니다. '석방하라'고 하는데 참 인상 깊은 게, 등 뒤에서 밴드부를 앞세워 북한을 규탄하는 집회를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앰프를 크게 틀어놓고 구호도 외치면서 함안 시내를 활보하는 겁니다. 저거는 되면서 왜 우리는 못 하게 하느냐, 농민회 만들자고 고함 한 번 질렀다고 잡아가는 게 말이 되냐 싶었습니다."

Q. 그 전에는 함안농민회 같은 농민운동조직이 없었습니까?

"함안에는 없었죠. 일부 지역은 가톨릭농민회나 기독교농민회 이런 식으로 종교적 외피를 둘러야만 농민운동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전국에서 자생적으로 함안농민회처럼 만들어진 것이 1987년~1988년 무렵이었습니다. 1990년에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자생농민회가 합쳐서 전국농민회총연맹이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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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옥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 / 임종금 기자

Q. 대학에서도 운동을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요.

"많이 했습니다. 생물학과로 갔는데 학과공부는 안 하고 데모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곧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감옥 가는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Q. 그럼 감옥에 가셨습니까?

"수배를 받긴 했지만 감옥에 가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노래패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노래패, 몸짓패, 풍물패, 연극하는 친구, 영화패, 탈패 이런 친구들을 규합해서 다양한 운동을 했습니다."

나무 2만 그루를 말아먹다

Q. 대학을 나오신 후, 뭘 하셨습니까?

"조그마한 인쇄물 기획사에 있었는데 적성에 안 맞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농사지으러 가야겠다' 싶은 겁니다. 그런데 농사짓는 게 취미 같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생활인데, 나이도 먹었고 그냥 갈 수는 없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창원 설뫼 분재원에 가서 분재를 배웠습니다. 어릴 때부터 분재에 관심이 많았었거든요. 거기서 2년 정도 배우다가 1999년에 함안에 왔습니다."

Q. 분재는 돈이 좀 됩니까?

"돈 있는 사람들이 될 만한 나무를 사와서 개작하면, 어쩌다 운이 좋으면 제가 심어놓은 나무를 보고 조경수로 지자체 같은데 대단위로 들어가면 돈을 버는 거죠. 사실 분재는 취미생활이지 않습니까? 돈이 없으면 최고 먼저 줄이는 것이 취미생활입니다."

Q. 분재로 돈은 좀 버셨습니까?

"하나도 못 벌었습니다. 제가 나무를 2만 그루 정도 심었다가, 판로를 찾지 못해서 군청 이런 데 빼가라고 하거나, 주위 아는 사람에게 캐가도록 하면서 나눠줬습니다. 그렇게 나눠주고 나머지 남는 거는 톱으로 잘라서 다 불 질러 버렸죠."

Q.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네요.

"눈물이 났죠. 7~8년 키운 나무를 불 질렀으니. 농사라는 게 그런 겁니다."

Q. 제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논이 한 2000평, 양봉도 하시고, 매실차도 하신다고 하던데 맞는가요?

"말씀하신 대로 사무총장 하기 전에는 양봉도 했고, 매실 1000평 정도 하고, 소도 키웠고, 밭도 2000평 정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일 다양하게 했죠. 하지만 사무총장 하면서 서울 올라가야 하니까 벌도 돌볼 수 없고, 주말에만 내려오니까 농사를 많이 줄였습니다. 지금은 매실과 벼농사밖에 짓지 않습니다. 벼농사 같은 것도 제가 없으니까 동네 형님들이 많이 봐주시고 하니까 간신히 짓고 있는 겁니다. 제가 유기농으로 매실을 하는데, 유기농 제재로는 잡을 수 없는 병이 3년째 덮쳐서 농사로 인한 수익은 거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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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옥 사무총장은 백남기 대책위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Q. 그럼 빚도 지셨겠네요.

"물론입니다. 저 말고도 농사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빚이 있습니다. 농민들은 가구당 평균 4000만 원 정도의 농가부채를 안고 삽니다."

Q. 지역에서 농업을 하시면서 전농 부경연맹 사무처장을 하시다 서울에 사무총장으로 가게 되셨는데, 가족들 반응은 어땠나요?

"아무래도 안 가길 바랐죠. 2년 만 하고 내려온다고 했는데, 연임돼서 2년 더 한다고 하니까 처가 많이 속상해했습니다. 이번 임기 끝나면 정말 고향에 내려올 작정입니다."

Q. 참, 작년에 백남기 어르신이 돌아가실 때 대책위 집행위원장을 하셨는데요. 백남기 어르신은 어떤 분입니까?

"제가 보기엔 그야말로 성자처럼 살다 가신 분입니다. 누워 계시는 1년 동안 정권에서 백남기 선배님을 깎아내리려고 온갖 조사를 했는데 하나도 문제 되는 게 없을 정도로 성자처럼 사신 분입니다. 제가 회의를 하고 있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 듣고 서울대학교 병원에 가니 경찰이 엄청나게 깔렸었습니다. 장례식장도 경찰 천지였습니다. 부검 영장 떨어지면 바로 시신을 뺏고 부검을 하려고 말입니다. 부검 영장이 예상보다 늦게 나와 이슈화될 시간을 벌었습니다. 이후 시민들이 결집해서 가족들 뜻대로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왜 농산물 가격은 오르면 안 되는가?

사실 농업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다. 기자도 농촌이 고향이지만 뭔가 정부에서 농촌에 돈을 퍼붓는 것 같지만 실효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게다가 미국 같은 농업 대국에 비해서 농촌이 경쟁력을 갖추기란 쉬워 보이지 않아 보인다. 과연 농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Q. 채소값이 오르면 사람들은 유통과정이 잘못돼서 중간상인이 다 먹는다고 합니다. 이게 맞는 말인가요?

"유통구조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농산품의 가격결정권이 농민에게 없다는 겁니다. 모든 공산품은 생산한 회사에서 가격을 정합니다. 그런데 농산물은 농민이 매기지 못해요. 예를 들어 마늘 가격을 어떻게 정하느냐? 농민들이 밭에서 마늘을 캐면 그걸 통째로 메이저 유통상들이 삽니다. 자기 창고에 저장해 놓고는 가격을 올리고 내리고 결정합니다. 이러다 보니 농민들은 가격 구조에 영향을 못 미치게 되는 겁니다. 그럼 농민들에게 어떻게 가격 결정권을 줄 것이냐, 그걸 고민해야 합니다."

Q. 농민들이 농산물 가격 결정권을 가질 방법이 뭐가 있습니까?

"농민들이 조직화 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양파가 함양과 전남 무안 같은 곳에서 많이 납니다. 그럼 양파값이 떨어져서 함양 농민들이 '양파값 올려야 하니까 팔지 말자'고 묵혀 두면 전남 무안 농민들이 팔아 버립니다. 자기들은 비싼 값에 파니까 좋겠죠. 이렇게 조직화가 안 돼 있으니 문제입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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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총궐기에서 등장한 상여 행렬.

Q. 어떤 문제요?

"도시민들이 농산물 가격은 오르면 안 된다는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공산품, 서비스, 세금 등 모든 비용은 다 오르는데 왜 농산물 가격은 오르면 안 됩니까? 쌀값이 30년 전 가격으로 떨어졌는데, 소비자들이 '이렇게 싸도 되나?' 같은 고민이 없습니다. 비료값, 사료값, 농약값, 인건비, 자재값 등. 대부분의 물가가 올랐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Q. 정부가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계란 가격이 크게 올랐었는데요. 계란 가격이 오르자 정부에서는 관세를 없애주고 비행기값까지 줘 가면서 계란을 수입하지 않습니까?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겁니다. 반대로 계란값이 원가 이하로 떨어져서 농민들이 죽겠다고 하면 정부의 대책이 없거나 미온적이거나 아주 늑장 대응을 하는 겁니다. 농민들은 다 죽고 난 뒤에 말입니다. 요즘 채소값이 폭등하는데, 농민단체가 그토록 국가 수매제를 해서 미리 물량을 갖고 있어야 가격 폭등에 대비할 수 있다고 해도 정부는 우이독경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이러한 정부의 가격정책에 대해서 고민을 해줬으면 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먹는 게 내 몸이 되는 것인데, 이것을 생산하는 농민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줬으면 합니다. 싸면 좋다? 물론 싸면 좋죠. 그러면 정부에서 최소한의 생산원가를 보장해 준 상태에서 싸면 되는 겁니다. 국가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것도 없이 농민들에게 맨날 싼 값에 공급하라고 하니. 놀부 심보 아닙니까."

Q. 사실 우루과이 라운드(1986년) 협상과 WTO 발족(1995년) 이후 농촌에 많이 지원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퍼주는데도 왜 농가부채가 여전하고, 경쟁력이 그 모양이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루과이 라운드와 WTO 체제의 핵심은 모든 품목을 관세화하는 것입니다. 관세화한다는 것은 뭐냐?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농산물도 교역품목으로 넣고 교역 자유화를 하는 겁니다. 그 속에서 한국의 농산물이 다 관세화가 됐습니다. 누구나 관세율만 내면 다 수입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거기에서 유일하게 예외 받은 것이 쌀입니다. 쌀은 막았지만 어쨌든 농촌이 힘들어지는 것이 분명하니까 많은 지원이 된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대부분 시설투자에 투입됐습니다. 건물 지어주고, 창고 지어주고, 농기계 사는데 보조해주는 겁니다. 이거는 돈만 집어 넣어주면 농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천박한 논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 재원으로 돈을 번 사람은 건설업자거나 농기계상이거나 농자재상이 다 가져갔고 실질적으로 농민들에게는 이익이 된 것이 없습니다. 한국농업을 어떻게 바꾸고, 지속 가능한 농업을 만들 것이냐는 철학적 고민은 하나도 없이 하는 겁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녹색농촌체험마을', '농촌권역화사업' 이런 데에 엄청난 돈이 투입되고 있습니다. 녹색농촌체험마을 같은 건 성공률이 5%도 안 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 돈이 모두 다 업자한테 갑니다. 농민들에게 물어보고 정책을 세우지 않고 그냥 천박한 생각으로 '이거 하면 뭐가 되겠지'라며 단순한 생각으로 돈만 붓는 겁니다."

Q. 정부에 농민단체들이 얘길 하지 않습니까?

"농업정책 결정 과정에서 농민들 얘기를 들어보라고 끊임없이 말을 했지만 듣지 않고, 농업 관료들은 지들 선배들이 하던 대로 돈만 쓰고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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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랙터로 전남 해남, 경남 진주에서부터 국회로 상경한 전봉준투쟁단.

농촌 문제 아는 정치인 전혀 없어

Q. 말씀을 정리하자면 농업정책 결정 과정에서 농민들이 배제돼 있고, 관료들이야 당장 예산 있는 거 그냥 어디에 퍼붓든 쓰면 그만이고. 그럼 어디서부터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까?

"농업선진국을 봅시다. 이런 나라의 농민들도 실은 큰 이익을 내는 사람은 적습니다. 다만 국가가 나서서 농민들을 보호해 줍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에 국가 생존 차원에서 농민들을 지켜주는 겁니다.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신자유주의·개방화·FTA로 내 삶에 얼마나 많은 이익을 가져왔나요? 국가 GDP가 얼마 올라가고, 일자리가 얼마 생기고, 내 삶의 질이 좋아질 것이라고 장밋빛 미래를 말했지만 실제 좋아졌는지 물으면 답을 못합니다. 그 이익은 재벌이나 가져갔지 내 삶과는 직접적으로 연동되지 않았습니다. 농산물 가격에 대해서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도시민들에게 안정적으로 농산물을 공급하고 농민들에게는 생산비를 어떻게 보장해 줄 것인가 고민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농협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낙농가처럼 품목조직을 활성화해서 가격결정권을 가져오거나, 유통문제, 농업기술 등 다양한 농업정책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데, 농협은 '어떻게 하면 돈벌이 사업을 잘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금융사업을 잘할 것인가' 이런 고민뿐입니다. 농가부채도 심각합니다. 기업들에게는 끊임없이 전기요금도 할인해주고 기업들이 망할 것 같으면 공적자금을 퍼부어서라도 살리려 하지 않습니까? 사실 농가부채는 국가 정책적 측면에서 생긴 것이 큽니다. 농기계 사라고 해서 샀고, 이 농산물 지으라고 해서 지었고, 하우스 하라고 해서 정부 정책 따라온 죄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Q. 얼마 전 쌀 직불금을 정부가 환수하겠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요?

"정부의 쌀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농가 110만 호 가운데 70%가 쌀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WTO와 협상하길 쌀을 완전 개방하지 않는 대신, 의무(강제) 수입물량으로 매년 41만 톤씩 쌀을 수입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다가 지금 쌀이 남아서 30년 전 가격으로 떨어졌습니다. 정부에서 쌀 가격을 기준 가격의 85% 이하로 떨어지면 일정 수준으로 보전해주겠다고 변동 직불금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지만, 쌀값이 워낙 많이 떨어지니까 직불금 한도를 넘었습니다. WTO와 농민들에게 변동 직불금으로 1조 4500억까지 주겠다고 협상했는데, 그 수치를 넘어서 협상위반이 될 것 같으니까 못 주겠다, 다시 내놓으라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직불금제도를 통합해서 농가 기본소득 개념으로 농가당 얼마 이렇게 해야 그나마 직불금이 고르게 분배될 수 있습니다."

Q. 농업문제는 사실 기자들도 어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정치권에서는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 문제를 이해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김현권 국회의원이 있는데, 혼자서는 많이 힘들죠."

Q. 지금 다시 무역장벽이 쌓이고, 기후변화가 심해지고 있는데 최악의 경우 식량이 무기화될 가능성도 있습니까?

"우리에게 농산물을 수출하는 나라가 갑자기 무역 장벽을 쌓거나 가격을 올리면 농산물 가격은 폭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대한 대책도 없이 지금 계란 수입하듯이 얼마든지 사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천박한 겁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 때 구제역 파동으로 돼지고깃값이 올라가자 정부에서는 관세 20%를 없애고 싸게 대량으로 돼지고기를 수입하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해외업체에서 가격을 20% 일제히 올려 버렸습니다. 이렇게 식량 생산 기반이 약해지면 얼마든지 농락당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인터뷰가 끝났다. 기자도 농촌 출신이고 고향에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어서 간신히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었다. 농민은 농산물 가격 결정 과정, 농업정책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돼 있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잘 모르지만 한국농산물 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반적인 가격도 외국에 비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결국 농민에게서 가격결정권, 정책결정권을 빼앗고 희생을 강요했기에 도시에 사는 내가 이만한 식생활을 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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