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병탄 이후 핍박 받은 음력 설
'설'지킨 국민…촛불 열매 수확 기대

1898년 1월 13일 자 <독립신문>에는 달력 판다는 광고가 실렸습니다. "음양력서를 벽에 걸어두고 보게 만들었는데 보기가 매우 간편하고 긴요한지라 한 권 값이 십육 전이니 누구든지 이 음양력을 사서 보실 이들은 독립신문사로 오시오."

1895년 동짓달에 대한제국의 김홍집 내각은 태양력 사용을 공포했습니다. 그것은 중국 기준의 표준시간을 서양 기준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국제질서에 맞춘 신문명을 도입한 것이지만 다르게 말한다면 제국주의 열강의 야욕에 쓸려 병탄 됨을 알리는 포고였습니다. 중국을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며 섬겨 엎디었던 500년 인접국 인심으로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였을 것입니다. 문화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조선의 풍토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도였을 것입니다.

대한제국의 음력 폐지와 양력 도입은 '왜'가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이었고 조선인들에게는 주권 상실의 의미를 명토 박는 실체적 위세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회유와 강압이 교차하는 식민정책에 조선 천지가 녹아나도 초하룻날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던 듯합니다. 양력 '설'에는 학교에 10여 일의 방학을 주고 관공서와 기업은 공식 휴일로 지정하며 휴업을 권장하는 한편 음력 '설'에는 조업을 강요하고 학교는 시험을 치르게 하는 등의 굳히기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왜놈 설'은 쇠지 않겠다며 숨어 쇠는 명절까지 뿌리 뽑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억압이 식민지 시대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해방되어 수립된 이승만 정권이 뜬금없는 '크리스마스'는 휴일로 정하면서 36년을 쉬쉬거리며 쇤 '설'을 공휴일로 인정하지 않았으니 사람들 맘이 어땠겠습니까. 참 어이없는 일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설이 되면 가게 문을 내리고 피붙이 살붙이를 찾아 나섰습니다. 설을 두 번씩이나 쇠는 것은 국력 낭비라며 신정 쇠기를 권장하는 나랏말씀을 귓등으로 들어 넘기니 급기야 대목에 떡 방앗간이 조업할 수 없도록 감시하는가 하면 "음력설에 문을 닫는 상점들은 모두 처벌한다"는 으름장을 놓기까지 한 것이 박정희 시절입니다.

1985년이 되어서야 정부는 음력 '설'을 '민속의 날'이란 생뚱맞은 이름을 붙여 선심 쓰듯 하루를 쉬도록 해주었습니다. 1989년에는 '민속의 날'을 '설날'로 변경하면서 사흘 연휴로 늘어나게 되었고, 양력설은 사흘에서 이틀로 줄어들었습니다. 1999년에는 양력설이 경제난 극복, 이중과세의 이유로 1월 1일 하루로 줄어들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오랜 투쟁 끝에 시민이 이겨낸 씁쓸한 싸움이었습니다.

음양오행과 간지를 손끝으로 훑으며 만세력을 들여다보던 세대는 이제 저물어 갑니다. 정초에 찍어 나누던 그 많던 종이 달력도 자취 감춘 지가 오랩니다. '그레고리력'은 만인의 손바닥에 쥐어진 모바일의 바탕화면에 아이콘으로 오뚝 앉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태 음력을 고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설과 제삿날, 석가탄일, 생일 등입니다. 13억 세계 인구가 드나드는 SNS '페이스북' 본사에서 몇 해 전 발표한 성명입니다. "음력 설을 가장 큰 명절로 지키거나, 음력 생일을 축하하는 한국의 전통을 페이스북에서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저희는 음력 생일 표시 기능을 특별히 한국에만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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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시월 말 시작해 전국으로 번진 촛불 함성은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잦아들지 않습니다. 이번엔 '국민'이 바로 '국가'임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시위입니다. 이 평화적 정치투쟁에 세계가 놀라고 있습니다. 그때 억압의 시대에도 부당한 권력에 부역하던 이가 있었듯이 반동의 시도가 끈질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이겨낼 것입니다. 벚꽃 필 즈음 촛불의 열매를 수확하길 함께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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