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요청하며 묻는 소속·직책·학력…공기·물같이 소중한 '농부'몰라 씁쓸

가끔 학교와 시민사회단체들에서 강연을 해 달라는 전화가 옵니다. "서정홍 시인님, 여기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농사철에 이런 부탁을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큰맘 먹고 전화를 드립니다. 일정이 괜찮다면 저희 학교 학생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제가 지금 산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수고스럽지만 강연 날짜와 시간을 제 휴대전화에 문자로 남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농사일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일정을 살펴보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농사일 하다가 전화를 받으면 주고받은 내용을 거의 다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항상 문자로 남겨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집에 들어가서 일정을 살펴보고 난 뒤, 제가 문자를 보냅니다. "선생님, 그날 가도록 하겠습니다. '논밭 농사'도 소중하지만 '사람 농사'도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간단한 강의 안내서를 제 전자 우편으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전자 우편을 보내고 나면 대부분 며칠 뒤에 전자 우편으로 강의 안내서가 옵니다. 그리고 며칠 안으로 강의 원고와 강사 소개서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강의 원고는 내용에 따라 써서 보내거나, 때에 따라 써 두었던 원고를 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강사 소개서에는 적어야 할 게 많습니다.

성명 : 서정홍

주소 : 경남 합천군 가회면 목곡1길 50-2

소속 : 겨레의 목숨을 이어온 농촌 들녘

직위 : 사람을 살리는 농부

학력 : 1999년 제1회 생태귀농학교 졸업

전공 : 지구를 살리는 소농

경력 : 생명공동체운동 10년, 산골 농부 12년

출강 영역 : 농부를 돈보다 귀하게 여기는 학교와 단체

이렇게 강사 소개서를 적어 보내면 학교 담당 교사한테서 전화가 옵니다. "서정홍 시인님, 소속이 겨레의 목숨을 이어온 농촌 들녘이라고요. 소속된 다른 단체는 없나요?" "다른 데는 없어요. 농부가 사철 내내 일하는 곳이 농촌 들녘이잖아요. 그러니 소속이 농촌 들녘이지요." "그럼 직위는 농부 말고 없나요?" "농부가 다른 직위가 어디 있겠어요. 농부는 진급이 없는 직업이라 직위도 그냥 농부예요. 저는 농사짓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니, 그 자체가 시라고 생각해요. 꼭 직위가 있어야만 시를 쓸 수 있나요? 학교에서 직위 높은 사람을 원하는지요? 아니면 생명을 살리는 농부를 원하는지요?" "아아, 미안합니다. 한 가지만 더 묻겠는데요. 학력 말입니다. 생태귀농학교 졸업이라고 썼는데 그곳이 도대체 무어 하는 곳인가요." "생태귀농학교가 무어 하는 곳인지 알려면 적어도 오 분 남짓 시간을 내어 주셔야만 합니다." "아니, 무어 하는 곳이기에 오 분씩이나 시간을 내서 들어야만 합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도 윗사람에게 보고를 해야 하니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말 그대로 사람과 자연을 괴롭히지 않고 생태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는 학교입니다. 이웃도 모르고 살아가는 메마른 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땀 흘리며 땅을 일구고, 정직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학교지요." "서정홍 시인님은 다른 학교는 다닌 적이 없는지요?" "저는 사람을 마치 기계처럼 다루거나, 남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경쟁에서 이겨야만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는 학교는,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학력은 생태귀농학교뿐입니다. 저는 사람으로 태어나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생태귀농학교에서 배웠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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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괜스레 마음 한쪽이 아립니다. 어떤 시인은 농부를 이렇게 노래하였다는데…. "공기와도 같은 것/ 공기 속에 보이지 않는 산소와도 같은 것/ 물과도 같고 흙과도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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