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일간 사과 않아 애간장 녹았는데…부검 영장에 슬픔·억울함 더 솟구쳐

방금 들어온 소식이 약간의 안도감을 준다. 재청구된 경찰·검찰의 고 백남기 농부 부검영장을 법원에서 다시 퇴짜를 놓아서다. 경찰의 직사 물대포를 맞고 317일의 혼수상태에서 끝내 숨을 거둔 고 백남기 농부의 영안실은 추모 시간을 가지려 해도 사망 제공자인 경찰의 공격적인 대응과 가해로 긴장과 불안의 시간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27일 새벽 5시께 경찰이 시신을 탈취해 갈 것이라는 긴급 공지가 있었다. 새벽 1시께 경찰에서 부검영장을 법원에 재청구했다는 연락이 왔고, 판사도 재청구된 영장신청을 반려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 때문이었다. 몇 번째 반복되는 긴급공지인지 모른다. 운명하기 전날인 25일에도 경찰병력이 3000여 명이나 병원을 에워쌌다. 강제부검을 위한 시신 탈취가 목적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서울대병원 중환자실과 장례식장을 잇는 길을 무장 경찰들이 봉쇄했을 뿐 아니라 사복경찰들은 병원 곳곳을 감시했다. 시민들은 뜬눈으로 중환자실을 지켰다.

26일 일요일 오후 1시 58분. 백남기 농부가 운명하자 경찰은 병원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했다. 응급실 밖 복도에 있다가 서울대병원 입구 인도에 설치된 백남기 대책위 농성텐트에 있었던 나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경찰은 한 사람씩 검문했다. 어떤 경찰도 경찰관 직무집행법 3조에 의거해서 자신의 신분과 검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거친 항의 끝에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은 '불법행위 예방' 차원이라는 말이었다. 왜정시대에나 있었던 독립운동가 잡는 '예비검속법' 같은 얘기다. 어떤 불법행위가 예상되기에 예방하는 것이냐고 물었으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경찰 방패 앞에서 항의하는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백남기 농부님이 방금 운명하셨다는 팻말을 만들어 경찰 대열 앞에서 들었다. 출입이 막힌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면서 사태가 격앙되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고 병원을 찾은 젊은 부부가 있었다. 뒷좌석에 앉았던 눈물범벅인 엄마는 자동차가 경찰 앞에서 움직이지를 못하자 몸을 반쯤 자동차 밖으로 기울여서 애가 죽어간다면서 신발을 벗어 던졌다.

어떤 젊은 남자는 병원을 급히 나오면서 경찰대열에 막혀 시간이 지체되자 마구잡이 욕을 해대기 시작했고 항의 농성자와 시비가 붙었다. 흥분된 남자는 주먹을 휘둘렀다. 대상은 경찰과 시민을 가리지 않았다. 가족과 친지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사람들일 것이다. 오랜 병고에 시달렸건 불의의 사고를 당했건 한 인간의 삶이 위기에 처하면 주변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인다. 그것이 317일 동안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 사과도 병문안도 조문도 없다는 사실과 함께. 고소 고발을 했으나 10개월째 기초조사도 안 하다가 뒤늦게 사망원인을 알아야겠다고 부검하려드는 모습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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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 있었던 인상 깊은 팻말 하나가 떠오른다. '물은 마시라고 있는 것이지 사람 쏴 죽이는 도구가 아닙니다'라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저녁 문화제에서 발언했다. "시민이 잘못을 했다면 벌금을 매기든지 잡아 가두든지 하면 되지 그 자리에서 쏴 죽이냐?"라고.

판사가 부검영장을 반려한 것은 유가족들이 낸 '부검은 원치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는 탄원서와 야당 의원들의 경찰청 항의방문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유가족은 탄원서에서 "고인의 시신에 다시 경찰의 손이 절대 닿게 하고 싶지 않다"면서 이를 방치한다면 유족으로서 "도리도 아니고 패륜,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라며 영장을 반려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판사의 영장 반려는 큰 용기라고 여겨진다. 서울대병원에서 사망진단서에 사망의 선행 원인을 물대포 피격인 '급성 경막하출혈'이라고 하면서도 사고에 의한 죽음인 '외인사'라고 하지 않고 '병사'라고 한 것과 비교하면 더더욱. 내일은 어떤 아침이 우리 앞에 열릴지 슬프고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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