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회 척결·금융실명제 '공'…친인척 비리·IMF 구제금융 '과'

1927년 거제 외포리에서 '김홍조'와 '박부연'의 외아들로 태어난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이 2015년 11월 22일 새벽 서거했다. 향년 88세.

19일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한 김 전 대통령은 병세가 악화돼 21일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나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끝내 사망했다. 근 몇 년 동안 고령과 지병으로 고통을 겪어온 김 전 대통령은 서울대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왔다. 임종은 차남 현철 씨 등 가족이 지켜봤다.

22일 박근혜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또한 정부는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해 김 전 대통령 장례식을 국가장으로 거행하기로 하고 유족과 합의에 따라 장지는 국립현충원으로 결정했다. 장례 기간은 5일장이고, 영결식은 26일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경남도청은 본관 1층에 분향소를 설치해 23일 오전 9시부터 조문객을 받을 예정이며, 거제시는 거제체육관과 장목면 외포리 생가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한국 정치사를 상징하다시피 했고 아직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양김'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한민국 14대 대통령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향년 88세. 사진은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식 후 카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박정희·전두환 군부권력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며 야당 정치계의 양대 산맥을 형성해 왔다.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로 불린 '김영삼·김대중'의 두 계파는 한국 정치의 주요 변곡점마다 굵직굵직한 발자취를 남겨 왔으며, 지금까지도 두 곳에서 배출된 정치인이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서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951년 장택상 국무총리 비서로 정계에 입문해 1954년 만 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민의원)에 당선됐다. 헌정사상 최연소이고, 아직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해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서 가시밭길을 걷던 김 전 대통령은 1970년대 후반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박정희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리고 1979년 의원직 제명을 당했다. 이 역시 헌정사상 최초의 일이었으며, 당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김 전 대통령 의원직 제명 사태는 '부마민주항쟁'의 주요 계기로 작용했다.

전두환 신군부 정권하에서는 가택연금을 당했고 23일간의 단식 투쟁으로 엄혹했던 정국에 파열음을 내기도 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주도했고,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문민정부를 탄생시켰다.

대통령 재임 시기에는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공직자 재산 공개 등 과감한 개혁을 단행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을 재평가했으며, '전두환·노태우 유혈 진압'을 단죄한 것도 업적으로 남았다.

그러나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킨 3당 합당에 대한 정치적·역사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특히 독재에 저항해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졌고 재임 시기 민주적·개혁적 제도적인 틀을 갖추는 성과를 창출하긴 했지만, IMF 구제금융 사태·노동법 개악·친인척 비리 등은 역사적 오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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