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2월부터 100일도 안 된 아이 보육…가족간 정 다지고 유산 아픔도 치유

지난 10월 19일 일요일 부산의 어느 뷔페. 저녁 6시가 가까워 오자 식당 내 가장 작은 룸으로 한두 명 모여든다. 손에는 포장된 물건이 들려져 있다.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테이블에 앉는다. 잠시 후 한살 배기 여자 아이가 30대 여성 품에 안겨 모습을 드러낸다. 앳된 얼굴의 여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뻗친다. 품 안에 꼭 안긴 아이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막상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아직 소녀티가 채 가시지 않은 여성은 어찌 할 줄 모른다. 결국 아이 첫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를 때도,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불 때에도 30대 여성 품에 맡기고 만다.

"안타깝지만 아직은 제 손길이 익숙하고 편한가 봐요."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말하는 권정임(34·창원 대방동) 씨. 그는 올 2월부터 당시 채 100일도 안된 아이 은희(가명)를 맡아 키우고 있다.

◇운명처럼 = 2007년 결혼한 정임 씨는 2010년 3월 첫 아이를 얻었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오로지 육아에 전념했다.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일상에 여유가 찾아들자 문득 품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기회가 되면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1년 전 유산의 위기를 넘기고 첫째를 출산했을 때 속으로 되뇌었던 말이다.

인터넷을 뒤지던 중 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가정위탁. 친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수 없을 때 보호양육에 적합한 가정에 일정 기간 위탁하는 제도다. 정임 씨는 지체없이 전화기를 들었다. 아이 키우는 데 집중해 온 그에게 더없이 적합한 일이라 생각했다. 지원 신청을 하고 며칠이 지나도 기다리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그는 직장인으로 돌아갔고 2년여 뒤 둘째를 가졌다. 기쁨도 잠시, 임신 사실을 안 지 한 달 만에 유산이 되고 말았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3개월 되던 즈음, 다시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셋째가 들어선 것이다.

"이번 아이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 다짐하며 하나하나 신중을 기했죠. 병원도 열심히 다녔어요. 임신 15주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16주(4개월)째 자궁 경관 무력증 진단을 받고 말았죠."

자궁 경관 무력증은 자궁 입구가 힘이 없어지면서 점점 커지는 태아와 양수를 지탱하지 못하는 질환으로 갑자기 자궁이 열려 유산 또는 조산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곧장 병원에 입원한 정임 씨. 엎친 데 덮친 격 세균에 감염돼 결국 임신 25주(6개월)도 못 채우고 초미숙아를 출생한다. 체중 500g 가냘픈 생명체는 온몸에 주삿바늘을 꽂은 채 몇 번의 수술을 반복했고, 끊어질 듯 잡아 온 세상과 인연의 끈을 끝내 놓고 말았다.

젖 한 번 물리지 못하고 떠난 자식을 차마 못 보내던 정임 씨. 사망신고 한 달 기한을 버티다 마지막에서야 동사무소로 발길을 돌린다. 모든 일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온 지 이틀 째 되던 날, 공허한 방 한구석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하던 정임 씨 눈에 순간 생기가 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 주인공은 3년 전 정임 씨가 신청을 한 가정위탁지원센터 관계자다. 며칠 후 드디어 얼굴을 마주한 은희에 대한 인상은 이랬다.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이랄까…마치 운명 같았어요."

◇ 진짜 가족 = 평소 무뚝뚝하고 과묵한 정임 씨 남편 김영환(41) 씨 . 그가 난생처음 아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아이를 잃고 얻은 상실감을 남자란 이유로 꾹꾹 참다가 기어코 터져 나온 슬픔을 두 뺨에 흘려보낸 것이다.

그런 그가 웃기 시작했다. 늦은 저녁 퇴근을 재촉하는 걸음이 가벼워졌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 표정도 달라졌다. 엉거주춤 걸음으로 마중 나가 영환 씨를 반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은희. 눈을 마주친 아이가 방긋 웃자 남편도 환한 웃음으로 보답한다.

다섯 살 찬희는 은희가 오기 전만해도 장난감도 옷도 음식도 모두 본인 차지였다. 유치원에서 왜 줄을 서야 하는지, 물건을 왜 나눠 써야 하는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뭐든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 옳다고 생각했던 찬희가 변했다. 언제부턴가 동생인 은희에게 장난감, 음식 등을 양보하고 있는 것. 엄마인 정임 씨가 옆에 없어도 동생 은희와 놀아주며 제법 오빠로서 할 몫도 하고 있다. 혼자였으면 일찍이 깨치기 어려웠을 배려의 미덕을 터득하고 있었다.

정임 씨가 힘들까 봐 처음에 만류했던 다른 가족들도 정임 씨 집에 잠시 들를 때면 은희를 먼저 찾는다. 낯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잘 가는 은희가 마냥 예쁘다. 그때마다 정임 씨는 가족들에게 주의를 준다. 아들 찬희가 혹시 상처를 받을까봐서보다 괜한 시기로 은희를 미워할까봐서다.

은희는 잠시 맡다가 떠나보내는 아이가 아닌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내 딸이고, 내 동생이고, 내 손자였다.

◇ 혼자가 아니야 = 아이 친엄마에 대해 소상하게 밝힐 수 없다. 다만 갓 사회에 나온 미혼모로 은희를 3년간 위탁을 했다는 것만 분명하다.

약속된 기간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다. 어쨌든 아이 친엄마는 주어진 시간 내 아이를 스스로 힘으로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그동안 친엄마와 정임 씨는 한 달에 한번 센터를 통해 정기적 만남을 갖는다. 물론 은희와 함께. 언젠가 아이가 친엄마 품에 돌아갈 때 느낄 수 있는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서다.

잇단 유산의 아픔을 겪고 난 뒤 위탁가정에 맡겨진 아이를 키우고 있는 정임 씨. 그는 아이를 꼭 하늘에서 내려 준 동아줄 같다고 한다. /문정민 기자

정임 씨는 은희가 그날까지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길 바랄 뿐이다. 또 그때까지 은희는 잠시 누군가 키워야 될 아이가 아닌 우리 사회가 함께 책임지고 키워야 할 아이라고 당부한다.

"친부모 밑에서 못 자라도 얼마든지 좋은 가정에서 잘 자라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몫을 다할 수 있어요. 불이 꺼진 상황에서도 길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지금 처한 상황이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혹시 지금 누군가 순간적 판단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잠시 생각을 멈추고 여기 내민 손을 잡아 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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