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수근이는 어디로 갔을까…그렇게 많던 장의사는 또 어디로

어릴 때 창원남고등학교 앞에 있는 두 동짜리 창일아파트란 곳에서 살았다. 아파트와 학교 사이에 그네와 시소가 있는 놀이터가 하나 있었다. 물론 우리 꼬맹이들의 아지트였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불청객이 있었다. 수근이라 불리던, 나이로는 분명히 형이었는데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수근아"라고 불렀다. 덩치는 어른이었지만 정신은 우리 또래보다 어린 이른바 바보였기 때문이다.

수월한 상대는 아니었다. 아니 불편했다. 일단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쉽게 토라졌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덩치도 크고 힘도 셌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엉성하게나마 수근이와 어울렸다. 모래놀이가 됐든 그네타기가 됐든 어찌어찌 놀이터란 공간에서 수근이와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수근이 입장에서 그 상황을 그려본다. 수근이에게 그 놀이터는 어떤 공간이었을까? 어쩔 줄 몰라 쭈뼛대던 우리는 그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어느 틈엔가 우리 사이에서 수근이가 사라졌다. 중학교에 가면서 놀이터에 더 이상 출입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다른 일상 속에서도 수근이를 만날 수 없었다. 돌이켜 보니 비단 수근이뿐만이 아니었다. 그즈음 이 땅의 수많은 수근이들도 함께 종적을 감춘 것 같다. 통계로는 20명당 1명이 장애인이라는데 최소한 일상 속에서는 쉽게 마주치기가 어렵게 됐다. 숫자가 줄어서가 아니라(실제로는 늘어났단다) 공간적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진 것 중에 장의사도 있다. 초등학교 등하굣길에서 매일 흰바탕에 검은 글씨를 한 장의사 간판을 마주쳤다. 썩 유쾌하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지나쳤다. 다니던 교회에 그 일하시는 집사님이 계셨지만, 가깝게 지내기가 어려웠다. 그분이 아니라 내가 마음속에서 밀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1994년 개원한 삼성병원이 전환점이 됐던 거 같다. 장의사가 일상 공간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게 말이다. 지인 초상이 나서 그곳 장례식장을 찾았는데 깜짝 놀랐다. 밝고 깨끗하고 세련된 인테리어는 죽음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크게 덜어줬다. 문상을 끝내고는 마치 계모임이라도 온 것처럼 내가 아는 문상객들과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곧이어 대학 병원들이 장례식장 리모델링에 들어갔고, 전국 각지의 종합병원들도 호텔에 비견할 만한 인테리어로 장례식장을 꾸몄다. 이 흐름에 지자체들도 가세했다. 장례식부터 화장은 물론 봉안까지 원스톱에 끝나는 최첨단 고객만족 시스템(?)을 세금을 들여 구축하고 있다.

덕분에 길을 걸을 때 불편한 장면들이 크게 줄었다. 막상 나타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던 수근이들도 안 보이고, 등하굣길에 뒤통수를 잡아끌던 장의사 간판도 사라졌다. 이들 불편한 것들은 일상과 다른 공간으로 분리됐고, 또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위해 근사하게 포장되기까지 했다. 최소한 일상 속에서만큼은 이런 것들이 '없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며칠 전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애써 묵혀뒀던 질문들이 목구멍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눈앞에서 그런 것들을 치워서 행복해졌느냐고. 불편한 자리에 편리를 채운 만큼 보람도 찾아왔느냐고. 그렇게 외면한다고 실제 없어지더냐고.

평균 생존일 21일인 한 호스피스에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목숨〉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곧 개봉한다. 이 영화를 만든 이창재 감독은 그 호스피스에서 1년여를 머물며 그분들이 남긴 마지막 시간을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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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기 짝이 없는 죽음을 정면으로 부둥켜안은 그곳에 많은 생각과 의미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신학생 신분으로 이곳에서 봉사하는 스테파노는 "여기 분들은 다 사람 중심이에요. (삶의) 의미를 찾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불편이 우리에게 묻는다. 죽음이 우리에게 묻는다. 잘 살고 있느냐고. 사는 것처럼 살고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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